[안치용의 노벨문학상의 문장]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원수들 사랑이야기>
"헤르만 브로데르는 돌아누우면서 한쪽 눈을 떠보았다.
머리가 몽롱해서 여기가 미국인지, (...) 아니면 독일의 수용소인지 알쏭달쏭했다.
이따금씩 이렇게 여러 장소가 한꺼번에 떠올라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지금 이곳이 브루클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귓가에는 나치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를 끌어내기 위해 총검으로 건초 더미를 푹푹 찔러 대는 중이었다.
그는 건초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총검의 칼날이 그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
<원수들 사랑이야기>(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김진준 옮김, 열린책들)
소설의 시작과 함께 인용문과 같은 꿈을 꾸다가 깬 주인공 헤르만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이다.
꿈과 비슷한 내용으로 과거 폴란드에서 위험한 처한 그를 실제로 헛간에 숨겨준 사람은 순박한 시골 여인 야드비가이다.
야드비가는 폴란드인 가톨릭 여성으로, 유대인이 아니어서 나치의 박해를 받지 않았다.
아마, 사랑 때문에 야드비가는 목숨을 걸고 헤르만을 구해주었다.
헤르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과 의무감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야드비가는 뉴욕에서 헤르만과 함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남편을 사랑하기에 아이를 원하고, 유대교로 개종하려고까지 한다.
정작 헤르만이 사랑하는 여자는 유대인인 마샤다.
마샤는 헤르만과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강제 수용소에서 끔찍한 경험을 겪었다.
공통의 트라우마는 두 사람을 격렬한 사랑으로 연결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며, 헤르만과 어디론가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을 꿈꾼다.
헤르만이 이렇듯 두 여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던 가운데 나치 학살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던 원래 아내 타마라가 등장한다.
타마라는 헤르만이 폴란드에서 결혼한 지적인 여성으로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았다가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헤르만은 갑자기 중혼 상태에 처한다.
결혼을 요구하는 마샤까지 포함하면 아내가 세 명이다.
헤르만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세 명의 아내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또 때로 도망친다.
결말은 헤르만의 실종이다.
그는 어느 날 아무런 말 없이 사라진다.
마샤도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사망한다.
자살로 보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야드비가는 떠난 헤르만이 남긴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마샤라는 이름을 붙인다.
타마라는 야드비가 출산 이후 모녀를 돌보기 위해 생활을 합친다.
헤르만을 두고 경합한 세 여자가 헤르만이 사라진 후 함께 사는 결말이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타마라는 헤르만을 찾으려고 이디시어 신문에 몇 번이나 심인 광고를 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헤르만이 자살했거나 아니면 미국 땅 어딘가에 숨어 폴란드에서의 건초 다락 생활을 재현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
이디시어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실상 유일한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1902~1991년)는 미국의 유대계 소설가. 본명은 이츠호크 바셰비스 징게르(יצחק באַשעװיס זינגער)이나 보통 영어식 발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디시어가 모국어로 이디시어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작가다.
이디시어 사용 인구가 줄고 있어 유일한 이디시어 작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폴란드 바르샤바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고 어머니 역시 랍비의 딸이어서, 어려서부터 유대교와 유대계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유대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현대 히브리어를 배우고 유대교 신비주의에 빠져들었으나 곧 문학에 열정을 쏟게 된다.
1925년 글을 쓰기 시작하여 단편소설을 몇 편 발표하다가 1932년 첫 번째 장편소설 <고레이의 악마>를 출간했다.
초기에 잠깐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을 빼고는, 평생 거의 이디시어로만 작품활동을 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형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하여 1943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50년대에 솔 벨로 등이 그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미국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주로 폴란드와 미국 내 유대인의 생활을 작품에 담았다.
노년에는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는 행위가 나치의 유대인 학대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여 죽기 전까지 35년을 채식했다.
싱어의 대표작인 <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그가 고향 폴란드를 떠난 지 거의 40년이 지나고 고회를 앞둔 1972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0년대 말엽의 뉴욕을 배경으로 어느 폴란드계 유대인 지식인의 어처구니없는 삶을 그렸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뉴욕에 정착한 주인공 헤르만과 그의 세 아내 이야기를 통해 치유되지 못한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상흔, 불안한 현대인의 삶과 사랑을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그는 드문 이디시어 작가다.
이디시어는 중부·동부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뜻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사용한 언어다.
이디시어는 9세기경 중앙 유럽에서 발생하였으며 고지 독일어를 바탕으로 히브리어, 아람어, 슬라브어 등의 요소가 들어있다.
유럽 유대인의 언어적 표지인 셈이다.
이 책은 이디시어를 쓰는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와 겪는 정신적 풍요와 물질적 빈곤, 홀로코스트의 참상과 신앙의 상실, 그리고 사랑의 욕망과 가족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유머와 위트, 역설이 가득하며 시종일관 재미와 긴장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꾼으로서 작가의 재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상황은 여인들이 주도하지만 주인공은 남자인 헤르만이다.
야드비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폴란드에서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고, 마샤를 사랑하지만 야드비가를 떠나 마샤와 새 삶을 모색하지도 못한다.
경제적으로도 무능하다.
주체적으로 상황을 돌파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소설 속의 세 여자는 왜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헤르만을 부도덕한 인물로 바라보거나, 줄거리만으로 아침드라마와 다른 바가 없다고 서둘러 판단을 내리는 건 금물이다.
물론 헤르만은 도덕적 혼란을 겪으나,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의 사랑 문법이 작동하지 않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지만, 그는 어쨌든 사랑하고 가능한 책임을 다한다.
그러나 끝내 보통 사랑의 사랑을 하지 못하고 보통의 욕망을 추구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불모성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마지막에 헤르만이 실종된 것을 단순한 도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전쟁과 학살의 생존자로서 자아의 붕괴와 심리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비극적이지만 현실적인 결말이다.
풍자와 아이러니, 통찰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야드비가의 아이에게 ‘마샤’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화해와 치유, 희망의 작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1978년 수상.
▲Heady study of Love for ‘The Triumph of Love over Oblivion’, Sir Edward Coley Burne-Jones (English, 1833 – 1898)
아내가 셋인 유대인 남자가 불행한 이유[안치용의 노벨상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