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스틸컷
"낙수야, 우리 둘이 이 회사에 20년 넘도록 붙어 있었다.
이 정도 붙어 있었으면은, 기본적으로 우리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봐야 돼. 위에서는 '저 새끼 왜 안 그만두나' 싫어하고, 밑에서는 '저 새끼 왜 안 잘리나' 싫어하고. (…) 정말 시간이 없어. 이제 바뀌어야 돼."
대기업에 다니는 김낙수 부장(류승룡) 인생은 요즘 수모의 연속이다.
가방끈도 짧고 나이도 어린 도진우 부장(이신기)이 자신과 함께 임원 경쟁을 하는 상황도 영 못마땅한데, 영업부서 관리자로서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업 실수로 상사 백정태 상무(유승목)에게 큰 질책까지 받았다.
그가 사원, 대리, 차장쯤 되는 젊은 인력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암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을 저지르기보다는 수습하고 책임져야 하는 업무 25년 차의 관리자고, 명문대에 입학한 자기 아들을 회사 서포터즈에 지원시킬 만큼 애사심도 강한 데다가, 임원으로 진급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회사 생활이 녹록지 않은 위기의 50대 부장이다.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스틸컷
2주 전부터 JT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대기업 김부장')가 묘사하는 김부장의 삶이 인기를 끄는 건 '좋은 일이 영원히 좋지만은 않다'는 우리 삶의 얄궂은 진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통신 대기업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할 때만 해도 인생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김부장은 지나치게 안일하게 살았다.
술 마시며 고객사 비위를 맞추던 접대 실력, 사내 정치에 따라 인사고과를 몰아주던 관습을 2025년이 되도록 탈피하지 못했다.
'대기업 한 번 입사하면 한국에선 위대한 인생'이라는 철 지난 관념 앞에 그의 아들까지 넌덜머리날 정도다.
합리적으로 일하고 정당하게 보상받길 원하며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과감히 퇴사해 버리는 젊은 후배 세대 앞에서 무능한 꼰대 취급을 받는 건 그래서다.
이 드라마가 흔치 않은 재미를 확보하는 건 한국인의 최대 재테크 수단인 '부동산'이라는 소재로 김부장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삶을 보여주는 대목들일 것이다.
김부장이 대기업 직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이십여 년을 우쭐대듯 살아오는 동안, 그만큼 번듯한 대학이나 직장으로 인생 첫발을 떼지 못한 주변 친구와 회사 후배들은 절치부심으로 차곡차곡 종잣돈을 모았다.
그리고 소리소문 없이 투자용 아파트와 건물을 사들였다.
김 부장이 대기업 입사를 일종의 '사회적 계급'으로 인식하고 삶을 안주하기 시작했다면, 그보다 아쉬운 처지로 삶을 꾸려야 했던 이들은 상대적 악조건을 기회로 삼아 그보다 힘이 센 '경제적 계급'을 확보한 것이다.
좋은 일이 영원히 좋지만은 않듯, 나쁜 일도 영원히 나쁘지만은 않은 셈이다.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스틸컷
중대한 업무 실수로 상사 눈 밖에 났고, 구시대적인 업무 방식과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후배들의 민심도 잃은 데다가, 대기업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느라 부동산 자산 증식에도 한참 뒤처진 김부장은 이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계 전선에서 살아남아 자식을 무사히 졸업시키고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난 2일 공개된 4화에서 그는 지방 공장의 안전관리팀장으로 강제 발령났다.
완전한 좌천이다.
평생 자랑으로 알았던 서울 대기업 사무직 생활을 접고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지방 현장직에 출근해야 하는 그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혹은 그대로 도태되고 말까. 동시대의 수많은 김부장들과 그를 가족으로 둔 평범한 아내, 자식이 시청자가 되어 그의 행보를 지켜본다면 아마 그런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연재되며 자산 증식과 부를 통한 계급 전복 등을 고민하게 했던 원작 소설과 달리 가족을 중심으로 한 김부장의 삶을 중심으로 상당 부분 각색된 작품인 만큼, 그 새로운 전개와 결말이 보는 이의 마음을 얼마만큼 뻔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을지도 기대해볼만한 지점일 것이다.
도태된 50대, 궁지에 몰린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