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청년 암 생존자 슬아 씨의 이야기
항암 치료 시작 전의 모습. 가족들이 낯설어할까 봐 치료 몇 주전에 긴 머리카락을 먼저 자르고, 치료 직전에 미용실에 다시 가서 머리를 밀고 왔다.
(슬아 제공)     슬아는 약 6년 전인 2019년에 건강검진을 통해 희귀암 진단을 받고, 방사선 치료, 수술, 항암까지 긴 과정의 암 투병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제는 일 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으며 일반인처럼 지내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가운 마음에 “5년이 지났으면 완치 판정을 받으셨겠네요!”라고 말하자, 슬아는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들어본 듯 말했다.
  “저한테는 완치라는 개념이 사실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보통 잘 모르시니까 당연히 5년이 지났으면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앓았던 암은 워낙 예후가 안 좋았던 암이라 정기검진을 받을 때마다 1년 더 살았다, 이런 생각으로 지내고 있어요.”   ‘1년마다 갱신되는 삶.’ 그 삶을 잘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귀암 진단과 투병, 그리고 ‘이별의 이유’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슬아가 마주한 첫 번째 난관은 진단받은 희귀암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이 생겼고, 블로그에 진단 이후의 모든 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했다.
  “치료기간 중간 중간에 쓰러져서 119에도 많이 실려갔는데, 그렇게 병원에 있게 될 정도의 컨디션이면 사실 핸드폰을 겨우 잡을 수 있거든요. 그래도 누군가 수술을 하면서 제가 쓴 글을 읽고 입원 준비물 챙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블로그를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분들 입장에서는 제가 어쨌든 살아 있는 존재니까, 이 과정을 지났는데 ‘지금 아직 살아 있어. 나 생존자야’. 이런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뭔가 위로를 받고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슬아의 블로그에는 사람들이 “어머니(혹은 아버지)가 그런데요,” “친구가 그런데요.”하며 문의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슬아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움을 주려 한다.
  암 투병은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슬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일 죽자. 오늘 죽지말고 내일 죽자. 오늘은 너무 날씨가 좋으니까 내일 가자.”라고 대뇌이며 하루 하루를 버티던 날들이었다.
  게다가 슬아는 암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애중이던 사람과 헤어졌다.
상대는 이렇게 힘든 상황에 자기가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일이 바빠서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자신이 없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말로 이별을 이야기했다.
슬아는 그 말을 수없이 곱씹어보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은 그 사람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보다, 누군가 암이라는 질병을 이유로 자신을 떠나갔다는 사실 자체가 슬아를 더 힘들게 했다.
  “그 사람 덕분에 치료 과정을 정말 독하게 잘 버텼어요. 토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허벅지 꼬집으면서 버텨, 버텨야 돼. 잘 먹고 건강해지고 나아서 내가 잘 사는 거 보여줄 거야. 이렇게 악에 받쳐서 열심히 투병을 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랍니다.
”   친구들은 치료 과정 내내 큰 힘이 되어줬다.
다른 지방에 있는 친구는 물론, 해외에 있는 친구들까지 슬아를 직접 찾아왔다.
“어제 뭐 했어?”, “오늘 기분은 어때?”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슬아를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항암 치료 중 필요한 가발이나 모자도 사서 보내주는 등 실제로 필요한 부분을 세심하게 주는 친구들을 보며, 그 동안 잘 살았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잖아요, 정신 건강도…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힘든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큰 일이 벌어졌잖아요. 암 뿐만 아니라, 만나던 사람도 잃었고, 그리고 체력도  잃었고. 항암을 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생리가 끊기고 하는 신체적 증상들마저 뭔가 잃게 된 것들인 거죠. 정신이 온전치 않아요.”   원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지내던 중에 암 진단을 받은 슬아는 치료를 받는 기간 동안 다시 부모님 집에서 지내다가도, 몸이 조금 괜찮다 싶으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껏 울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 때도 부모님 앞에서는 방긋방긋 웃고 있어야 했어요. 그게 유일하게 제가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괜찮아 괜찮아 이러면서 지내다가도 사실은 괜찮지 않잖아요. 마음껏 울 곳이 필요했어요.”  항암 치료를 마치고 머리카락을 기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예전 헤어 스타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슬아 제공)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아는 신경정신과의 도움을 받았다.
3주에 한 번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마침 복용하던 약도 최대 3주치까지 처방이 가능했다.
항암 휴지기 때면 집에서 가까운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다시 처방받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슬아는 대학 병원의 협진 시스템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덧붙였다.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과 이외에도 여러 과에서 협진을 하잖아요. 그 협진을 하는 동료 의사 분들이 정보 교환을 빨리 하고, 체계적인 협진 시스템이 잡혀있더라고요. 저는 이 협진에 당연히 신경정신과 협진도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쩌면 암보다 무서운 가난   첫 일년은 치료 과정에 집중하느라 그래도 시간이 금방 갔는데, 힘든 순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찾아왔다.
자다가 깨면 ‘이 모든게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순간들이 있었고, 항암 후 머리를 기르는 동안에는 주위의 시선도 힘들었다.
머리가 아주 짧았을 때는 여자 화장실에 갈 때 주위 시선의 불편함을 겪었고, 머리가 조금 자랐을 때는 30대 초반 나이에 “어머니” 소리를 자주 듣기도 했다.
  그렇게 항암 치료를 마친 지 3년쯤 되자 머리카락도 어느 정도 다시 자라고, 원래의 직업이었던 학원 강사로서의 삶에도 복귀해 다시 적응해갔다.
이제야 조금 괜찮아졌다 싶었던 그때, 온몸의 이상 신호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뼈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급기야 허리 디스크까지 생겼다.
항암 치료 이후의 몸 상태는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
각종 병원에 자주 다녀야 했고, 병원비 관련 지출도 많아졌다.
    문제는, 아픈 이후에는 무리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이전과 다르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서 수입 역시 절반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슬아는 이것이 암 생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암보다 무서운 건 가난인 것 같아요. 아플 때는 아픈 걸 견뎌내고 나을 걱정만 하면 되는데, 낫고 나서는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은 마음대로 안 좋은데,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프고 나면 대개 직업이나 수입 같은 게 많이들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젊은 친구들도 있고, 아니면 가장이었는데 직업을 잃게 되면 가정에 타격이 크게 오고.”   경제적 문제가 암 생존자들이 겪는 불안의 근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유급은커녕, 무급이라도 좋으니 치료를 마친 뒤 ‘내 자리가 그대로 있는’ 직장은 세상에 많지 않다.
  “이건 정말 짠한 부분인데, 암 관련 사이트나 환우회 카페 같은 데를 보면, 사람들이 내가 수술을 받고 나면 언제쯤 괜찮아질 수 있을지를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 수술을 받고 나면 언제부터 근무할 수 있을지를 물어봐요. 이게 사실 진짜 끔찍한 일이거든요.”   또 다른 삶의 고비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간신히 살아내고 있던 차에 찾아온 또 다른 삶의 고비에, 슬아는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엄마가 사시는 곳 근처로 이사했다.
자신의 앞가림도 안 되는데 엄마를 챙겨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지난 6년 동안 가장 힘들었을 때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시기였다.
  “그 때 우주가 힘을 다해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데 내가 눈치 없이 살아 있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몸 상태도 좋지 않고, 돈은 다 써서 일을 해야 하는데, 엄마를 책임져 줄 사람은 없는 상태. 너무 많은 부위가 아파서 삶의 질이 정말 낮다고 느낄 때는 죽어야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던거죠.”    암담했던 시간이 1년쯤 지났을 때, 이전에 근무했던 학원의 원장으로부터 “다시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또 한 번 학원 강사로서의 삶에 복귀했지만, 생각보다 삶이 이전과 비교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창 치료를 받을 때, 응급실에서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적이 있어요. 근데 그러다 살아났거든요. 그때는 이렇게 죽지 않고 내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하면서 삶에 의미 부여를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똑같이 이전처럼 밥 해먹고, 학원에서 애들 가르치고. 그런데 몸은 오히려 더 안 좋아졌고. 그러니까 재미가 없는 거에요. 제가 떠올릴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이 볼품이 없어서 좀 많이 슬프고 아쉽더라고요.”   자주 걷는 산책로. 격한 운동은 여전히 힘들어서 주로 동네 공원을 걷는다.
(슬아 제공)     ‘얼마나 더 살 줄 알고 그런 고민을 해, 하고 싶은 거 하자’   어느 날 친구가 “요즘 전시 본 거 있어?”라고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몇 년 동안 아프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너무 놀랐어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내가 그렇게 아프고도 살아남았는데, 그걸 극복한 이후에 뭔가 달라져 있을 줄 알았거든요. 뭔가 특별해지거나, 최소한 이전보다 나아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달 빠져나가는 고정비만 생각하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서바이벌하듯 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블로그 체험단 활동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맛집을 가고, 공연을 보고, 다양한 제품을 써보며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잠깐이나마 ‘다른 내가 되어보는 느낌’을 받았다.
일회성일지라도, 삶에 작은 자극이 되었다.
슬아는 최근 용기를 내어 소규모 모임을 만들었다.
사람들과 함께 독서 모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전시회도 다니며 조금씩 문화 생활을 해보려고 한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어요. 제가 완전 내향형인데, 이게 되게 짜릿하더라고요. 전혀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전에 몰랐던 분야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같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제가 놓친 부분을 다른 사람이 짚어주기도 하고요. 또 전혀 관심 없었던 분야의 책도 같이 읽어보게 되니 흥미롭고요.”   여전히 삶은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슬아는 어떻게 해서든 일상을 살아내보기 위해, 그것도 가능하면 잘 살아내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픈 회수가 줄어드는 것에 감사하고, 가능하면 직접 집밥을 해 먹고, 날씨 좋은 날이면 일부러 밖에 나가 많이 걷는다.
틈틈이, ‘학원 강사 일을 계속 하는 게 보람이 있을까, 앞으로도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건 여느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라는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슬아는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얼마나 더 살 줄 알고 그런 고민을 해. 하고 싶은 거 해.’    요즘, 슬아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한 노력도 조금씩 시작했다고 말했다.
입시전문반은 저녁 늦게까지 수업을 해야 해서,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보다 조금만 더 나아진 내일   앞으로 슬아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망설임 없이 답하던 슬아는 한참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직업을 찾아서 마음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지낼 수 있으면 해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할인 마트에 가서 가격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장을 보고 그걸 일일이 소분해서 집밥을 해 먹는 일상에, 가끔은 온라인으로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밀키트를 주문하면 집앞에 딱 배달되는 일상이 늘어나는 여유. 아니면 돈을 조금씩 모아서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을 해본다든지… 작고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내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슬아는 “사실 다른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는데, 암을 잘 견디고 나면 괜찮아지는게 아니라 현실은 이렇게 팍팍하고 적나라하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제 인터뷰가 힘이 될 수 있을까요?”라며 걱정했다.
  암을 극복하고 나면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 찾아온다는 해피엔딩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극복 서사는 분명 누군가가 마주한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청년 암 생존자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가장 담고 싶었던 것은, 극복 서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팍팍하고 적나라한 현실. 하지만 그 현실 역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들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힘을 주고 희망을 상상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지 않을까.   인터뷰를 글로 기록하는 동안, 슬아의 연락을 받았다.
새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냥 지금보다 조금 나아졌으면 좋겠다.
”는 바람에 슬아의 일상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지아 . 개인의 몸과 건강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건의료 불평등을 해소하고 건강형평성을 높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 날카롭지만 다정한 글을 쓰고 싶다는 실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
길동무 문학학교 르포교실을 수강했다.
  ※더 많은 청년 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이가 되어주실 이삼십 대 청년 암 생존자 분들은 메일로 연락주세요. youngadultcancersurvivors@gmail.com
희귀암 투병 이후 ‘1년마다 갱신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