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기] 소설을 쓰고 각색을 하고 노동조합도 하고
카메라로 모니터 부분만 잡으면 ‘있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현실은 이렇다.
(김효진 제공)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올 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답은 하나가 아니다.
‘저는 웹소설 작가입니다.
소설을 써서 먹고 살아요.’ ‘저는 웹툰 각색가입니다.
원작 웹소설의 줄거리와 연출을 웹툰에 적합하게 다듬는 일을 하죠.’ ‘저는 노동조합의 임원입니다.
제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질문의 맥락이나 상황에 따라 나는 이 중에서 하나 혹은 둘, 어떤 때에는 세 가지 답안 모두를 내밀곤 한다.
그리고 내가 뭘 고르건, 대체로 비슷한 말을 듣는다.
‘우와, 멋있네요.’ 겉으로 보기에 꽤 있어 보이는 활동만 모아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이 기쁘냐 하면, 딱히.   ‘있어 보이는’ 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목이 한껏 늘어난 맨투맨을 입고 있다.
옷에는 고양이 털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대충 말린 머리는 하루 종일 까치집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중에서 무슨 일을 할 때건, 나는 대체로 이런 상태다.
  외면만 엉망이면 다행이지. 도미노처럼 밀려 쓰러지는 마감 앞에서 허둥대다 식사조차 깜박해 굶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커다란 책상에 공간을 죄다 내어준 탓에, 잠을 자려면 방문 앞에 접이식 토퍼를 깔고 몸을 웅크려야 한다.
그렇게나마 자는 것도 시간이 아까워서 자꾸만 밤을 새운다.
  당장 다음 달의 수입이 얼마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담배는 죽어도 안 끊는다.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불안정한 삶 속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7년째 정신과를 개근 중이다.
  이 모든 현실은 정말이지 단 하나도 멋있지 않다.
하지만, 무슨 일 하냐는 가벼운 질문에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내놓을 수는 없다.
‘멋지다’라는 반응에 대한 내 대답은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하고 끝난다.
물론, 이런 대답은 일종의 겸양처럼 보이는 탓에 상대의 환상만 다듬어줄 뿐이다.
그럼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 그게 아닌데…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이 일은 조금도 멋있지 않다   사실 나는 평화주의자다.
마찰이나 싸움 같은 건 되도록 피하고 싶다.
불편한 상황은 내가 조금 양보하더라도 좋게 좋게 넘어가는 쪽이 마음 편하다.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 싸움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누군가가 양보하고 참는다면 대부분의 일은 편안하게 흘러간다.
문제는 일이 ‘좋게 좋게’ 끝나기 위해 양보를 강요당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라는 점이다.
싸움도 싫지만, 강자가 약자 등쳐먹는 꼴 가만히 보고 있기는 훨씬 더 싫었던 나는 차라리 투쟁하는 쪽을 골랐다.
  썩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노동조합에서 일한다고 말했을 때, ‘멋있다’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은 ‘네가 그걸 왜 해?’이다.
나는 상근활동가가 아니므로 이 일로 월급을 따로 받지 않는다.
안 그래도 웹소설이니 웹툰이니 하는 것들은 주요 이슈부터 과노동인데, 그 와중에 투쟁하겠답시고 일을 사서 늘리기까지 하는 미련한 인간이 대체 어딨담? 네, 바로 그런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쨘!   그러나 나의 가장 미련한 선택은 창작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당장 내 주변만 둘러봐도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채무를 조정 받는 작가가 나를 포함해 세 명이나 된다.
쉽게 꺼내기 힘든 얘기이므로 실제로는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기본소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산 일이 되기 전까지는 내 통장에 꽂힐 금액이 얼마일지도 알 수 없는 탓에, 작가들의 생활고는 어쩌면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내가 출간한 책 중에서 매출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작품이 있다.
이유는 모른다.
나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작품의 분량도 퀄리티도 비슷했고, 객관적 재미도 평균점은 됐다.
아주 무명인 상태도 아니었고 공백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이유 없이 뚝, 하고 매출이 떨어졌다.
프로모션을 잘못 탔거나, 경기가 나빴거나, 불법 공유 사이트에 작품이 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장에 정산금이 찍힐 무렵, 나는 이유 같은 걸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9월에 보낸 소설이 아주 망했다는 걸 나는 11월에나 알 수 있었다.
가스비가 너무 올라 감당이 되지 않던 무렵이었다.
다음 원고의 완성이 코앞인데 월세가 모자라 쿠팡을 뛸까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중노동을 하자니 마감을 못 지킬까 걱정됐고, 원고에 집중하자니 생계가 불안했다.
그 와중에 나는 아주 한참이나 뒤늦게 몇 달 전 탈고한 소설의 실적을 받아 든 것이다.
  어이쿠 야단났구만. 그럼 뭐 어쩔 수 있나. 급한 불부터 꺼야지. 그래서 나는 쿠팡도 뛰었고, 콜센터에 취직도 했고, 그 와중에 원고도 썼다.
받아둔 마감을 팽개칠 수는 없으니까. 지금 돌이켜봐도 그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마감은 밀렸고, 나는 밤을 새우다 못해 46시간 깨어 있기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당연하게도 콜센터 실적 역시 바닥을 쳤다.
악순환이 고장 난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멀미 나게 돌아가는 동안 현실감각이 덩달아 고장 난 나는 ‘어라? 이게 왜 안 되지? 원래 되는데? 나 할 수 있는데?’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했다.
  나의 현실감각은 사실 그 전부터 고장이 나 있긴 했을 것이다.
30시간 이상 깨어있는 채로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으니, 그게 조금씩 늘어 46시간이 되어도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렇게 일하고도 수입이 불안정한 것이 익숙하고 당연해서, 월급이 생기고서도 남는 시간에 일을 더 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애초에 회사를 부업으로, 창작을 본업으로 생각했으니 무엇 하나 관둘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결말이야 뻔했다.
아주 그냥 여러모로 폭삭 망했다는 뜻이다.
금전도. 시간도. 마감도. 건강도. 멘탈도.   그 와중에 오래 키운 고양이가 나를 떠났고, 도저히 감당 못할 병원비를 카드 값으로 받아든 나는 문장 한 줄 새로 쓸 여력도 남기지 못했다.
단순히 지쳤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문장 구조가 망가졌다.
그럼 뭐 또 별 수 있나. 몸으로 때워야지. 경기도 어느 농원에서 2달을 꼬박 구르면서 이놈의 언어 능력은 언제 돌아오나 찔끔찔끔 간을 봤다.
그 와중에 작년 말, 계엄이 터져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도 꼬박꼬박 나갔다.
4월 5일 마침내 탄핵이 선고된 그날, 내 문장도 그때쯤에나 간신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하시죠?   물론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이 일을 하는 이유가 꼭 사랑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동력이 사랑이기는 하다.
  나는 문장을 벼려내는 순간을 정말 좋아한다.
같은 뜻이라도 어감이 미세하게 다른 수많은 단어 중에서 꼭 맞는 것 하나를 골라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순간이 좋다.
문장에 속도감을 부여해 완급을 조절하는 게 즐겁다.
묘사의 순서를 통해 누군가의 상상 속 시선을 조절하는 게 짜릿하다.
그 세세한 작업을 통해 원하는 연출을 만들어낼 때면 나는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통제하고 연출을 빚어내는 작업은 즐겁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내 뜻대로 둔 글을 읽고도 독자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담아 각자의 완성본을 만든다.
그건 창작의 모든 과정 중에서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지점이다.
  투쟁 역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일이다.
마땅한 제도적 울타리가 없는 이 업계에 아주 조금씩이나마 뭔가를 쌓아 올리는 순간이 좋다.
작게나마 세상을 변화시키는 때가 좋다.
그걸 혼자서가 아니라 연대를 통해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더없이 기쁘다.
그렇게 모여 연대하다 보면 내가 미처 몰랐던 분야를 발견하며 나의 세계는 넓어진다.
남태령의 어느 새벽,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비로소 농민을 알아보게 된 것처럼. 투쟁하다 마주친 수많은 연대를 통해 나의 세상이 비약적으로 넓어질 때, 나는 벅찰 만큼 행복해진다.
  좋아하는 일 하면 됐지, 뭐가 문제냐고?   내가 하는 노동들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결국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여서일 것이다.
내가 좋아서 택한 일이니, 그에 따른 어려움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고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내가 선택했든 아니든, 노동이라는 건 이렇게까지 가혹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설령 본인이 원했다 한들 40시간씩 잠도 안 자고 밥도 굶어가며 노동하도록 사람을 놔두어서는 안 된다.
본인이 어떤 각오를 했건 간에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로 노동하도록 사람을 놔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내가 원해서 밤을 지새우고 밥을 굶어가며 노동할 것이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스템의 지원이나 강제 없이는 과노동을 관두지 못할 것이므로. 그러니 회사들이여, 작가가 휴재를 원치 않는다는 핑계는 집어치워라. 작가가 고료제를 원치 않는다는 핑계도 내다 버려라. 누군가가 자신은 노동권은 물론이고 노동자성조차 원치 않는다고 말해도 그러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웹소설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