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不)동의 성교죄로 형법 개정, 성폭력 신고‧검거율 높아져
2025년 4월 15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 일본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 자료집 뒷면엔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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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6일, 일본 국회에서 ‘강제성교 등 죄’(강간죄)를 ‘부(不)동의 성교 등 죄’로 변경하는 형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관련 기사: 한국보다 앞서 강간죄 개정한 일본…‘비동의 성교죄’ 들여다보기 https://ildaro.com/9727) 과거에는 강간죄를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 협박이 있었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였지만, 개정 형법은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국과 유사한 성범죄 규율 체계를 가진 일본의 변화는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지난 4월 15일, 일본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당사자 모임으로, 형법 성범죄 개정을 이끈 시민단체인 ‘Spring’(스프링) 활동가 및 연대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오전 10시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 일본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에 참석하여 발표하였으며, 오후 1시 반부터는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여해 형법 개정 전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연이은 성폭력 무죄 판결에 분노한 시민들 ‘플라워 데모’
Spring의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형법 개정 이전의 일본 또한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성범죄가 성립하려면 “폭행·협박 요건과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의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의 저항을 전제로 범죄가 성립”되었던 탓에 “‘피해자가 더 저항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가해자가) 무죄를 선고 받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법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고 사회 인식 또한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성범죄는 신고율도 낮았다.
“법무부 종합연구소의 2007년~2011년 조사에 따르면, 강간 사건 추정 피해자 수는 15만 3천438명이지만, 피해 신고 접수율은 4.7%에 불과”했다.
이 중 “법정에 가는 경우는 1.9%로, 법정에서 재판 받는 성범죄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 힘들게 재판에 가도 유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비교적 약한 유형력이 있었더라도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판례도 있지만, 판사마다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였음을 인정하는 판단이 크게 엇갈리는 등 판결의 불균형이 존재’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된 건 “2019년 3월, 4개의 성범죄 판결이 연이어 ‘무죄’로 결정”되면서다.
“특히 사회의 공분을 샀던 건, 2019년 3월 26일 나고야지방법원에서 판결한 친부의 딸 성학대 사건”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5년에 걸쳐 성적 학대가 진행되고 있었던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변호사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정신적인 지배 하에 두었지만, 피해자가 복종·맹종할 수밖에 없는 강한 지배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심리적 항거불능의 상태와는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가해자가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일본 사회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이냐? 법 규정을 반드시 개정해야 된다’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일본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졌던 것 같다.
”고 했다.
이런 목소리는 ‘플라워 데모’라는 일본 사회의 움직임과도 연결됐다.
‘플라워 데모’는 2019년 3월의 판결들에 분노한 시민들이 4월 11일 도쿄역 앞에 꽃을 들고 모이면서 시작됐다.
5월에는 후쿠오카와 오사카에서, 6월에는 나고야와 센다이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보탰다.
사오토메 쇼코 공동대표는 “물론 ‘플라워 데모’ 이전에도 피해생존자들은 목소리를 내어왔다”며, “다만 (이전에는) 언론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Spring 활동에 함께하고 있는 테라마치 토코 변호사는 “플라워 데모로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고, 이를 언론이 보도하고, 그로 인해 성폭력 실태조사가 행해지고, 이를 토대로 학자와 연구자가 분석하여 자료를 만들고, 그것이 다시 언론으로 보도되고, 또한 시민단체가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형법 개정을 요구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설명했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순환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2025년 4월 15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 일본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가 열렸다.
(공동 주최: 이연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 정춘생 조국혁신당 국회의원, 정혜경 진보당 국회의원, 용혜인 기본소득당 국회의원,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윤종오 진보당 국회의원,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224개 단체) ©일다
‘동의한 성행위’를 어떻게 입증하냐고?
강간죄 개정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폭행·협박 요건은 ‘성행위의 동의가 없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것이 없어지면 사실 인정과 입증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에 맞서 형법을 개정하기 위해 Spring 활동가들은 “처벌 범위를 명확화”하는 대안을 내세웠다.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성범죄 처벌 규정의 본질은 ‘동의 없는 성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고 설명했다.
“폭행·협박뿐만 아니라 ‘성행위의 동의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원인 사유는 그 밖에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여 유죄가 선고된 사례도 이미 있다.
오히려 비슷한 사례에서 판사마다 판단이 엇갈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는 것. “재판에서 판단이 엇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동의’를 나타내는 원인 사유를 형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번 형법 제117조 ‘부동의 성교 등 죄’ 안에 포함된 8가지 사유다.
1. 폭행 또는 협박을 이용하는 것 또는 이를 당한 경우
2. 심신의 장애를 발생시키거나 발생시킬 수 있는 경우
3. 알코올 또는 약물을 섭취하게 하거나 그 영향이 있는 경우
4. 수면 및 기타 의식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거나 그 상태에 있는 경우
5. 동의하지 않은 의사를 형성, 표명 또는 완수할 틈이 없는 경우
6. 예상과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하여 공포를 느끼게 하거나 놀라게 하는 것 또는 그 상황에 직면하여 공포를 느끼거나 놀라게 하는 경우
7. 학대로 인한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 또는 그러한 반응이 있는 경우
8.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상의 지위에 따른 영향력으로 인한 불이익을 우려하게 하거나 이를 우려하는 경우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No라고 명확히 말하지 못하더라도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음’을 형성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인정되면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No Means No’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법 규정”이라고 강조했다.
Spring 유튜브 채널 내 다큐멘터리 〈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는 전해진다.
예스 민즈 예스의 세상으로〉 예고편 중 “No도 침묵도 동의가 아니다.
Yes만이 동의다.
Yes Means Yes”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https://youtu.be/CVs4YsMTYIw?si=tdCCjcvmrSpIsrLq)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동의 여부는 내심(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입증이 어려워서 (가해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닌가?” 등이다.
그러나 Spring 측은 “억울한 누명은 성범죄에만 국한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이는 경찰의 수사와 검찰의 기소 판단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또 “내심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의 실태를 법에 정확히 반영하여 객관적으로 부(不)동의라고 추정할 수 있는 요건을 명시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입증이 어렵다’는 비판은 맞지 않다.
”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테라마치 토코 변호사는 “실제로 (그들이) 어떤 근거가 되는 사건이나 근거를 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 밝혔다.
늘어난 건 무고가 아니라, 성범죄 검거율과 기소율이다
‘부동의 성교죄’로 형법 개정 이후, 늘어난 건 무고가 아니라 성범죄 검거율과 기소율이었다.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2024년 기준, 성범죄 가해자 검거율과 기소율이 전년 대비 각각 62.9%, 78.4%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동의 없는 성행위는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전달되는 조문이 만들어지고 죄명이 된 것”과 “부동의 성관계의 원인 행위, 양태가 형법에 명시된 것”은 “피해자가 용기를 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
형법 개정은 큰 성과이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있다.
“공소시효를 늘리고, 피해자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일”과 더불어 “동의를 얻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 Yes Means Yes(거절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동의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동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 형법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 행위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 놀람, 당혹감 등으로 굳어져서 저항을 할 수 없게 되는 점”, “가해자가 ‘무신경’하여 비동의 여부를 알지 못하거나 ‘동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면 처벌을 면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가해와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No는 No이고, 침묵도 No이며, 대등한 관계에서의 Yes만이 Yes다.
’라는 개념을 사회 통념으로 삼고, 행위자는 상대방의 동의를 명확히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학교 현장에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언급이 되었다.
사오토메 쇼코 공동대표는 “아직 일본에선 문부과학성이 정한 학습지도 규정에 따라 중학생한테도 성교에 대해서 가르칠 수 없다.
”고 실태를 이야기했다.
“보수세력의 반대 등으로 포괄적 성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생명안전교육 안에 성교육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기 위해 여러 NGO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해 여러 측면에서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포괄적 성교육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국회의원과도 논의를 이어가고 있고, 교과서에 성적 동의 및 성교육 관련 내용을 싣겠다고 하는 출판사도 생겨나고 있다.
”는 긍정적인 소식도 덧붙였다.
일본의 활동가들은 부동의 성교죄로 형법을 개정한 이야기를 전하며, 2012년 한국에서 “13세 미만 여자 및 여성장애인에 대한 강간(준강간)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이 일본 사회에 큰 용기를 줬다.
”고 밝혔다.
이어 “일본의 부동의 성교죄 개정이 한국 사회에도 용기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