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매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읽다
과학자 캐런 메싱(Karen Messing)의 회고록 『보이지 않는 고통』 원서(Pain and Prejudice: What Science Can Learn about Work from the People Who Do It) 표지 이미지. 원제는 ‘고통과 편견’으로, 저자가 수십 년간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과 건강을 연구하며 깨닫게 된 과학, 노동, 젠더, 계급, 편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최근 반도체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반도체특별법’이 추진되고 있다.
이 법안은 ‘주 52시간 근무 예외’와 같은 조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산업 성장에만 초점을 두고 기업의 입장만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의 그늘에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희생이 존재한다.
  지난 3월 6일은 한 반도체 사망 노동자의 18주기였다.
그는 사망 7년 만에야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오늘날에도 반도체 노동자들은 ‘위험한 물질’을 다루며, 자신이 다루는 물질조차 모른 채 병에 걸리거나 생명을 잃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오랫동안 입증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고, 사회적 무관심 속에 묻혔다.
  이는 반도체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노동 현장에서 이와 유사한 고통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은 왜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기 어려울까? 왜 어떤 고통은 더 잘 보이고, 어떤 고통은 쉽게 무시될까?   캐런 매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은 이 질문에 대한 사려 깊은 응답이다.
책은 공장 노동자, 마트 계산원, 식당 종업원, 간호사, 교사 등 다양한 직군의 노동 현장을 다룬다.
놀라운 점은 그 사례들이 1990년대 전후의 캐나다 상황임에도, 지금의 한국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고통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반복되고 있었고, 그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적 구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보이게 하는 공감의 힘   이 책은 저자가 생물학 전공자에서 인간공학 전문가로 변화해간 과정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중시하는 과학자의 태도로 노동자를 바라보던 저자는, 점차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에 깊이 귀 기울이게 된다.
이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학자의 ‘객관적인 태도’가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인해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이 개선되는 데에 수십 년이나 걸리고 있다는 점 역시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1978년, 방사선에 노출된 공장 노동자에게 유전적 영향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내 딸의 건강 문제가 제 직업 때문이라는 건가요?”라며 충격을 받았고, 저자 자신도 그들에게 더 친절히 다가가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나 역시 엄마로서, 또 다른 기형아를 출산할지 모른다는 수잔의 불안감에 공감했다.
”는 저자의 고백은 과학적 사실 그 자체보다 전달자의 태도, 즉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노동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고통을 공론화하기 위해 과학자의 증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통계적인 유의미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과를 판단하는 데에는 노동자의 삶에 공감하는 태도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공감 없는 과학은 사람을 위한 과학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캐런 매싱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 문제 제기해 온 30여년 간 “학자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가 낮은 노동자들이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공감 격차’로 명명하였다.
그 공감 격차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좁히려는 실천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일깨운다.
  사실 우리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공장 노동자나 특수직군들의 삶을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노동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에 대해 정부나 관련 기업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이나, 일반대중조차도 왜 그렇게 그 사안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하는 장면을 우리 역시도 종종 봐왔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충분히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한 고통의 정체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사안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공감 격차’를 줄이고자 분투해야 한다   책 『보이지 않는 고통-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느 과학자의 분투기』(캐런 메싱 저/김인아, 김규연, 김세은, 이현석, 최민 역, 동녘 2017) 표지 이미지. 캐런 메싱은 캐나다 퀘백대학교에서 생물학 교수로 재직했고, 국제인간공학협회 젠더와 건강기술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의 작업환경과 건강에 대해 주로 연구하였다.
대표 저서로 『반쪽의 과학-일하는 여성의 숨겨진 건강 문제』, 『일그러진 몸-일하는 여성의 몸, 수치심, 연대에 관하여』 등이 있다.
(필자 제공)     『보이지 않는 고통』에 등장하는 인물 중 생계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며 연구에 참여한 미미와 달리, 저자는 “다국적 기업의 부회장인 아버지와 좌파 성향의 예술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과학자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물론이고 정책결정자 혹은 고용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에서 성장을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성장하여 얻은 부와 권력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며 노동자의 삶은 관심 영역 밖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만드는 데에 왜 관심을 갖지 않을까. 공감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계층의 문제에 공감한다.
과학자들이 식당 직원들보다 박물관 방문객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은 박물관에서 시간은 보내고 ‘박물관 피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당 직원들에게 의자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는 연구는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고통』 p.97   동질화된 경험을 가진 집단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기 쉽다.
그것이 자신의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면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동조하고 해결하고자 나서도 한다.
반면, 사회적 발언권이 별로 없는 집단의 고통은 ‘과민한 반응’, ‘감정적 호소’로 여겨지기 쉽다.
여성, 비정규직, 하급자, 순환근무자는 구조적으로 ‘믿기 어려운 고통’을 떠안는다.
그 고통을 정당하게 호소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공감’이 과학자들에게 높게 평가되는 특성이 아님에도, 노동자의 고통을 보여주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특권적 성장 배경을 돌아보며 반성한다.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네 학비를 낸다는 걸 기억하렴.”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으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이 성찰은 공감의 출발점이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체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취가 타인의 노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고용주, 정책결정자, 과학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태도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학생들이 집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와 다른 교수들의 의견을 계속 반박했다.
우리가 임신한 학생이 느끼는 불안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공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 -『보이지 않는 고통』 p.259   결국 문제 해결은 당사자의 끈질긴 목소리,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고 연대하는 대중의 공감에서 비롯된다.
그와 같은 공감은 문제 상황을 개선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결정하는 이들에게도 가닿을 수 있다.
반도체 노동자뿐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의 고통에 대해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수많은 현장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개선책에 대해 공론화하여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의 당사자가 직접 드러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단지 과학자 개인의 성장기나 연구보고가 아니다.
이 책은 공감 격차를 줄이고자 분투한 실천의 기록이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를 묻는 윤리적 질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우리의 문제로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필자 소개] 김선희 . ‘정치하는 엄마들’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연대하고, 특히 교육환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이 ‘공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