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책 〈침몰가족〉에서 발견한 무한의 가능성
2025년 4월 26일 서울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침몰가족> 상영과 인디토크가 진행되었다.
가노 쓰치 감독,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가 참석했고,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가 통역을, 한디디 커먼즈·도시운동 연구자가 진행을 담당했다.
©일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 불린다.
건강가족기본법 12조엔 “가정의 중요성을 고취하고 건강가정을 위한 개인ㆍ가정ㆍ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매년 5월을 가정의 달로 하고,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한다”는 말이 담겨있다.
이러한 의미가 있는 “가정의 달”에 추천하고 싶은 영화/책이 있다.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침몰가족〉 그리고 동일명의 책 『침몰가족』(가노 쓰치 지음, 박소영 옮김. 정은문고)이다.
  가노 쓰치 감독 본인이 겪은 ‘공동육아’ 경험을 다룬 〈침몰가족〉은 1990년대 도쿄에서 비혼 싱글맘인 가노 호코 씨가 ‘저지른’ 도전과, 그와 함께한 수십 명의 돌보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자란 감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쓰치 감독은 2014년, 침몰가족을 떠난 이후 아주 오랜만에 참여한 침몰가족 동창회를 계기로, 어린 시절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있던 침몰가족을 다시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이는 대학 졸업 과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상 작업은 영화제 출품으로, 그리고 극장판 제작으로 이어졌다.
2019년 일본 극장 개봉 이후, 감독은 못 다한 이야기를 담아 2020년 책도 발간한다.
현재 책은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했고, 영화는 지난 4월 26일 서울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처음 공개됐다.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사라진다면, 사회는 침몰한다?   감독의 엄마인 가노 호코 씨는 21살 나이에 당시 파트너였던 야마 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영화에서 호코 씨는 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생겼어, 너라는 존재는.” 결혼제도에 회의감을 갖고 있던 호코 씨는 야마 씨와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였고, ‘공동육아’에 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공동육아를 둘러싸고 야마 씨와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고, 서로 맞지 않는 걸 느끼게 된 둘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그렇게 호코 씨는 생후 8개월이 된 쓰치 감독을 데리고 도쿄 히가시나카노로 이주했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무작정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긴 호코 씨는 일단 연립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 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수도 검침원으로 일했고, 아동부양 수당 등의 지원금도 받았지만 생활은 빠듯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호코 씨는 ‘공동육아를 함께 하지 않겠냐’는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만들어 뿌렸다.
역 앞에서 나눠주거나 전봇대에 붙이는 방식이었다.
전단지 내용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나는 쓰치를 만나고 싶어서 낳았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종일 가족만 생각하느라 타인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살다가 아이는 물론 나 자신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공동육아라는 말에서 공동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아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등 아이와 지내다 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 영화 <침몰가족> 극장판 예고편 중 어린 쓰치 감독과 돌보미들의 모습 https://youtu.be/6CIUL_msLs0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았지만, 책을 보면 사실 “실제로 전단을 받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 하지만 지인, 지인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등 여러 인연이 겹치고 이어져 공동육아를 함께 할 돌보미들이 꾸려졌다.
정말 다양한 구성이었고 여럿이 함께 했다.
호코 씨조차도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며 “널(쓰치 감독)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데~”라며 웃을 정도로 공동육아를 하는 침몰가족은 열린 공간이었다.
  침몰가족이라는 이름은, 당시 어느 정치인이 나눠준 팸플릿에 쓰인 말에서 왔다.
“지금 일본은 가족의 유대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혼 가정도 늘고 있습니다.
남자는 일하러 가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사라진다면 일본은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라는 말이 쓰여있었다.
그걸 본 돌보미들은 화를 냈지만, 이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침몰가족”이라고.   평범하지 않지만, 특수하지도 않은 ‘침몰가족’   침몰가족은 이후 하나의 연립주택에서 같이 사는 쉐어하우스 형태의 침몰하우스로도 이어졌고, 아이는 쓰치 감독뿐만 아니었다.
메구와 유피도 함께였다.
침몰가족의 이야기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여러 관심을 받았고 방송, 잡지, 신문 등 미디어에도 보도되었다.
하지만 침몰하우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시엔 ‘쉐어하우스’라는 말도 없었고,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서 맹독성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테러를 일으킨 이후라, ‘여러 명이 함께 산다’는 형태에 경계심이 높은 시점이었다.
침몰가족 멤버였던 시노부 씨(메구의 엄마, 역시 싱글맘)와 호코 씨는 “최후의 수단으로, 친척 사이”라고 말하는 방식을 썼다.
  침몰가족은 독특한, 흔하지 않은, 사실 조금 이상하고 퀴어한 공동체이긴 했다.
침몰가족의 돌보미의 대다수는 육아와 가장 거리가 있다고 분류될 싱글 20대 남성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연과 노력, 의지가 뒤섞인 결과였다.
일본 사회여서, 도쿄여서, 1990년대 중반이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시작하고자 용기를 낸 호코 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마침 ‘낙오연대’(1992년 와세다대학 동창이던 가미나가 고이치와 페페 하세가와가 결성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한 청년들의 모임. 보통 사람들처럼 ‘일하지 않는(일할 수 없는)’, ‘가정을 꾸리지 않는(꾸릴 수 없는)’, ‘연애를 하지 않는(못 하는)’ 청년들의 교류 활동이라고 책에 소개되어 있다)와 연결되어, 그곳의 남성들이 돌보미로 함께하게 됐다.
호코 씨는 처음에 망설이는 낙오연대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육아 같은 건 평생 못 할지도 모른다”며 설득인지 협박인지 모를, 오묘하고도 흥미로운 미끼를 던졌다.
그렇게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책 『침몰가족』(가노 쓰치 저/박소영 역)의 홍보물 (출처: 정은문고)     이처럼 ‘침몰가족’은 평범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감독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하치조지마로 이주하기 전까지 지냈던 침몰가족에서의 경험을 아주 특수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건 침몰가족에서 자란 메구나 유피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15년만에 어른이 된 메구를 만났을 때, 메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말을 들은 감독은 안도하며 공감한다.
“침몰가족에서 자랐던 것이 아주 좋았다거나, 혹은 아주 나빠다는 두 가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감독은 영화가 공개된 이후 여러 곳에서 ‘침몰가족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궁금해했지만, 사실 “그곳에서 자란 기간은 인생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삶엔 여러 장소와 사람이 거쳐간다.
침몰가족과 침몰하우스도 그 중 하나였다.
메구는 “나라는 사람이 침몰가족으로만 완성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라는 말을 덧붙인다.
책에만 등장하는 유피는 침몰가족의 영향에 대해 “시야가 넓어졌지. 뭔가 나한테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느낌이랄까. ‘아,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건 좋은 일이잖아.”라고 한다.
“나는 아주 평범하게 자랐어. 주위에서는 내가 정신 연령이 높다느니 무미건조하다느니 말하지만.”   침몰가족은 특수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특수하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보통’과 조금 달랐을 뿐. 그래서 ‘평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뿐.   ‘가족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쓰치 감독은 침몰가족의 일원이었지만 사실 침몰가족을 잘 알진 못했다.
그가 침몰가족에서 시간을 보낸 건 유아기였으니까. 영화를 만들며 감독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침몰가족과 돌보미들에 대해 알아간다.
돌보미들이 쓴 몇 권이나 되는 육아노트를 읽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를 접하게 되고, 돌보미들과 다시 관계 맺기를 진행한다.
돌보미 중 누군가는 이젠 아이가 없는 침몰하우스에 여전히 살고 있다.
또 누군가는 파트너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침몰가족의 경험을 각자의 방식대로 품고, 또 풀어가며 살고 있다.
  영화 속엔 침몰하우스의 일원인 이노우에 씨 덕분에 15년만에 침몰하우스를 방문한 쓰치 감독과 호코 씨가 이노우에 씨와 함께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쓰치 감독이 “오랜만에 만났다고는 하지만, 이노우에 씨가 왜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고 하자, 이노우에 씨는 “어른이잖아. 어린 시절의 쓰치와 말하는 거면 몰라도, 지금 직접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어.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역사 속의 쓰치 같은 느낌일까.”라고 답한다.
  과거의 쓰치, 기저귀를 갈아주던 쓰치를 단순히 아이로 기억하지 않고 ‘역사 속의 쓰치’라 명명하는 돌보미가 지금의 쓰치와 관계 맺기를 시작하는 이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이 침몰가족…!!’이라는 게 단번에 와닿는 순간이기도 했다.
2025년 4월 26일 서울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침몰가족> 상영과 인디토크 중. 커다란 스크린 위에 책 속 문구가 쓰여져 있다.
“엄마는 영화 개봉 후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공동육아의 힌트를 얻은 것도 과거에 공동육아를 했던 사람들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야. 그래서 침몰가족을 보고 힌트를 얻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겠어.’” ©일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침몰가족 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이 이야기가 너무 신기하고 유별나서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4인 정상가족’에서 자랐고 지금껏 육아를 해 본 적 없는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엔 다소 앞뒤가 안 맞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이상한’ 삶이 나와 가깝게 느껴졌다.
붓으로 “인간해방”을 쓰는 호코 씨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고, 그 글자가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감독 또한 호코 씨가 “‘가족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이라고 쓴 점을 짚으며, “가벼움, 느슨함, 여러 화살이 사방팔방 날아가는 듯한 단어”라고 표현한다.
  책 속엔 쓰치 감독이 이렇게 쓴 부분이 있다.
“돌보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호코가 널 안고 왔을 때, 내 눈에는 정말 지쳐보였어. 이대로라면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것이 확 느껴지더라.’ 침몰가족이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경제적으로 몸시 쪼들린 엄마와 생후 8개월인 나. 우리 두 사람은 길거리에 나앉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가 집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와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 두 사람을 살린 건 ‘전통가족’이나 ‘건강가족’이 아니었다.
사회를 침몰시킬 것이라고 지목된 사람들이었다.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아니 ‘해방된’ 사람들 혹은 인간해방을 좇는 사람들 말이다.
  이 침몰가족엔 밤새도록 떠들어도 부족할 것 같은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중요한 이야기들이지만 다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감독의 차기작이 호코 씨의 엄마,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힌트로 남겨둔다.
부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책도 읽고, 침몰가족과 관련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영화 〈침몰가족〉은 정식 개봉은 아니지만, 5월 동안 서울 홍대에 위치한 인디스페이스에서 몇 번 상영될 예정이다.
기회가 된다면 놓치지 마시라. 공동체 상영도 가능하다.
육아로 인해 영화관까지의 이동이 힘든 사람들에겐 책을 추천한다.
이번 “가정의달”엔 가족을 넘어서 “인간해방”을 외치자. 더 다양한 “침몰가족”을 꿈꾸며.   ※ 공동체상영 문의는 한디디 연구자 wildeyed76@gmail.com
‘건강가정’이 아니라 ‘침몰가족’이 나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