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골에서 젠더폭력 대응력 향상 훈련을 하다③
'여성이 시골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방어력이다!' 젠더폭력에 대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 모습 중. (나랑 제공)    
지난 2월, 나는 제주 정착을 돕는 한 시민학교에 입학했다.
제주에 살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부터 굴뚝같았지만, 매번 ‘다음’을 기약했다.
낭만 가득한 한달살이도 해봤으나 정착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었다.
숙소 사장님이나 자주 가는 가게 사장님 외엔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넓은 섬에서 어떠한 네트워크도 없이 나는 금세 외로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민학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상을 나눌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읍면 지역 여성들을 위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이었다.
  컨디션 체크! 나를 살피고 파악하기   우리는 매 수업에 앞서 서로의 컨디션 점수를 체크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 컨디션 어때요? 5점 만점, 혹은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겨보세요.” 그러면 저마다 5점 만점에 3점이요, 10점 만점에 7점이요, 하고 자신의 상태를 나눴다.
  처음엔, 이 과정이 어색했다.
누군가가 ‘컨디션 어때?’라고 물었을 때 ‘좋아’ 혹은 ‘피곤해’ 정도로 답했던 기억 외엔 나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혹여나 피곤하진 않을까 늘 남의 몸 상태나 기분은 늘 기민하게 살피고 걱정하는 내가, 정작 나의 상태는 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미안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훈련 시간만큼은 나를 최우선으로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는 꽤 큰 변화를 불러왔다.
타인의 눈치를 보기 전에 나의 욕구를 먼저 파악하다 보니, ‘타인’을 위한다는 생각에서 나를 스스로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이 줄어들었다.
이를테면, 훈련 도중 내가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은 동작이나 상황이 있을 때, 손을 들고 “이 부분은 쉬어가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폭력대화 욕구 카드. 시민학교에서 참여자들의 서로 간 대화와 다양한 워크숍 진행을 위해 자주 사용했다.
세밀한 욕구를 점검할 수 있어 좋은 도구였다.
(길또 제공)     이전 같았으면 나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 어색하고, 행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고 욕구를 참았다면, 이제는 내가 편하고 안전한 상황을 스스로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다.
이는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일상 속 많은 순간에서 나는 전보다 자주 편안하거나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기저면’ 절대 지켜! 몸으로 기억하는 안전의 감각   처음 이 훈련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일상 대응력’이라니. 공기처럼 늘 함께하는 수많은 젠더폭력에 그간 나는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아니, 대응이라는 것을 시도한 적이 있는가? 답은 ‘아니오’였다.
과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닥쳐올 젠더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고, ‘훈련’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조금은 긴장하기도 했다.
만취한 아저씨가 나를 공격할 때 무사히 빠져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걸까?   막상 훈련이 시작되자, 이는 단지 특수한 젠더폭력에 대응하는 것만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수확은 다름 아닌 ‘기저면’(base of support)이다.
생소한 이 단어에 대한 첫인상은 ‘무거움’이었는데,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기저면은 내 신체의 중심을 파악하고, 그 축을 기반으로 몸을 안전하게 지탱할 수 있는 면적을 뜻한다.
쉽게 말해, 서 있을 때 두 다리 사이의 너비가 바로 기저면. 이 면적이 넓을수록 우리는 보다 안정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
이 단순한 원리를 이제야 처음 감각하다니! 단순한 원리가 주는 커다란 안정감을 느꼈다.
  기저면의 원리를 실제 상황에 대입해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나에게 갑작스런 불편한 말을 내뱉어 당황했을 때, 기분 나쁜 손길이 닿았을 때,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라고 생각하거나 불안해하기 이전에 내 몸의 중심을 느끼고 기저면을 확보하며 숨을 고를 수 있다.
그 작은 멈춤이 나를 지키는 시작점이 된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도,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이 특별했던 건, 무조건적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지키는 감각’을 익히도록 기다려주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불편한 감정을 참는 대신 ‘멈추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웃어넘기거나 회피하지 않고도 상황을 헤쳐나가는 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처음에는 ‘맞서 싸우지’ 않을 거라면 내가 참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갈등이나 위험 상황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다양했다.
물론 맞서 싸우는 것이 좋은 선택지가 될 때도 있겠지만, 많은 상황에서 나는 내 상태를 살핀 후 상대에게 명확히 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종료하거나 해결할 수 있었다.
시민학교에서 머무르는 친구들과 산책한 제주 중산간. 숨이 확 트인다.
시골살이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 (길또 제공)       나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는 언어적, 비언어적인 방식이 있는데 그중 비언어적 표현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훈련 과정 도중 사람이 많은 길거리를 걸을 일이 있었는데, 혼자 걷는 내 앞에 사이비 포교 활동을 하는 여성이 나를 가로막았다.
“말씀 좀 들어보세요.” 예전이었으면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네?” 하며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상대방이 장황한 첫 멘트를 끝내고 나서야 “아 죄송합니다.
”라고 하고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훈련에서 배웠던 기술을 떠올렸다.
기저면을 확보하고 바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가슴 앞을 막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당신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내가 머뭇거렸을 때는 나와의 거리를 더 적극적으로 좁혀오며 말을 걸던 상대방이, 내가 몸으로 의사를 표현하자 되려 화들짝 놀라며 내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 경험은 내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다.
  훈련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 순간의 최선을 선택할 것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은 삶의 자세를 바꾼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소하지만 반복적인 피로감, 애매하게 침범당하던 나의 경계, 속으로 삼키던 말들, 불편을 참고 웃어넘기던 순간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내 가슴을 찌른 할아버지, 일터에서 내게 소리를 지르다가 남성 직원이 다가오자 목소리를 낮추던 아저씨, 남자친구 유무를 물으며 무례한 언행을 일삼던 직장 상사….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대부분 침묵하거나 애써 웃어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마음은 전혀 편해지지 않았고 나의 경계는 계속해서 침범을 당했다.
물론 당시 그렇게 대응했던 나를 탓하지 않는다.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금 내 감정은 이래. 그러니까 이렇게 반응할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 훈련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다.
  이제는 대중교통에서 모르는 남성이 내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해올 때, 남성 지인이 친분을 빌미로 집 앞에 찾아올 때, 길에서 사이비 포교 활동에 붙잡혔을 때, 상사가 무례한 언행을 일삼을 때, ‘이 정도는 웃으라고 하는 말이지~’라며 성희롱을 할 때, 웃어넘기거나 참는 것을 유일한 선택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먼저 나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만하시죠.” “부끄러운 줄 아세요.” 목소리 내는 길을, 그 순간의 최선을 선택할 것이다.
  [필자 소개] 길또 : 제주 사는 강아지 덕후. 쓰고 그리고 찍는 것을 좋아하는 기록쟁이이자, 돌아다니는 것이 제일 재밌는 여행자. 24개국 63개 도시를 여행하고, 가장 매력적인 제주에 정착했다.
열한 살 반려견과 함께 평온하게 나이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꿈이다.
몸으로 기억하는 안전의 감각, 30대 여성의 훈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