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돌봄의 법⑤ 실패를 거듭하는 정신장애인 C의 도전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도록-모두를 위한 평등, 자유, 정의” 아일랜드의 교차 신경다양성 장애인권 단체 Neuro Pride Ireland에서 2024년 국제 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IDAHOBIT)을 맞아 SNS에 게재한 이미지. 출처: 인스타그램 @neuroprideireland
[연재 소개] 2023년 생활동반자등록법이 발의된 후, 가족구성권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오히려 이 법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작년 9월, 가족구성권연구소와 민달팽이유니온, 사회복지연구소 물결, 성별이분법에저항하는사람들의모임 여행자, 언니네트워크, 장애여성공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공동으로 〈
연대와 돌봄의 법
〉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살아가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차별과 억압을 드러내고, 동시에 동질적이지 않는 소수자들이 법 제도를 넘나들면서 이미 해나가고 있는 돌봄과 연대를 발견하고 더 많이 발명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우리의 고민과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던 C의 이야기
게으르고, 눈치 없고, 무능력하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C는 30대 지적/정신장애 여성이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카페와 도서관 사서보조 등의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한 직장에서 정주하기 어려웠다.
잦은 실수와 지각, 소통의 한계로 동료와 갈등이 생겼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C의 게으름과 눈치 없음으로 설명되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무렵에는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심리상담을 더 잘 받고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가족들 또한 그러한 기대를 표현해왔으며, 그들의 기대감은 C에게 ‘장애 극복하기’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C처럼 발달장애인, 그리고 경계성 장애를 지니고 있는 이들의 경험을 들어 보면, 스스로의 장애를 이해하고 토론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대 후반이 지나서 장애등록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공부를 잘하면 혹은 더 노력하면 장애를 없앨 수 있다는 압박을 받기도 한다.
머리를 부딪친 사고로 인해 장애가 생겼다는 식으로, 장애에 대한 불충분하고 부적절한 정보를 주입 받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조력과 지원이 필요한 몸은 곧 ‘게으르고 눈치 없고 노력하지 않는 몸’이라는 부정적 낙인이 찍힌다.
이런 문화 속에서 C는 스스로의 장애를 인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다.
장애에 대한 부정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다른 몸,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몸으로 나의 몸을 바라보지 못할 때, 남들과의 ‘차이’는 어떤 조력이나 지원, 연대와 돌봄으로 채워가야 하는 것이 아닌 ‘정상’의 기준에 도달해야 할 개인의 몫이 되어버린다.
이는 비단 당사자가 자신의 장애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장애를 수용할 수 있게 조력하지 못한 가족의 문제만도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장애를 개인의 몫으로 돌리며, 도달하지 못하는 ‘정상성’의 기준을 들이미는 사회이다.
또한, 장애 차별의 결과값마저 장애를 지닌 몸의 ‘무능’으로 보는 시선이 문제이다.
가족과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고립되는 삶
C는 10대 후반 시기를 지나면서 또래집단에서 관계 맺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가족 내에서의 갈등은 극심해졌다.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관계에서의 갈등 자체를 병리화하는 세상은 C에게 필요한 지원과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C를 고립시키고 탓하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졌다.
학교는 물론 노동시장에서의 하루도 쉽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들어도 알 수 없는 이야기, 잦은 지각은 동료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누구도 C가 시계를 볼 수 있는지, 수와 시간을 어떻게 가늠하는지, 스스로를 씻고 챙기는 돌봄의 과정에서 조력이 필요한지 묻지 않았다.
복지일자리, 장애인고용의무제를 통해 들어간 서비스 직군에서조차 장애에 대한 몰이해는 여전했다.
장애인의 고립된 삶은 ‘2023 장애인 통계’(고용노동부)에서도 확인된다.
2023년 5월 기준 장애인구의 경제활동 참가율과 고용률은 각각 37.4%, 36.1%이다.
전체인구 65.3%, 63.5%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치다.
반면 전체인구 중 무학 비율은 2.6%인데 장애인은 8.9%이며, 전체인구 44.7%가 대학을 진학할 때 장애인은 14.3%만이 대학을 진학했다.
이러한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인의 무능과 게으름인가? 아니다.
장애인이 학교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 공교육 종료 이후 경제적 독립은 물론이고, 사회적 관계망을 가지기 어려운 구조임을 드러낸다.
관계에 대한 갈증이 깊었던 C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줄 관계를 갈구했다.
그러나 술값과 밥값을 지불하면서 맺는 친구관계만이 지속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자발적인 때로는 강압에 의해 성관계를 갖게 되기도 했다.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밥과 술을 사는 것은 C에게 얼마 없는 선택지 중의 하나였기에, 돈이 필요했던 C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건만남’, 신용대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짧게 머물렀던 직장에서도 사람들은 C를 탓하거나, 무시하거나, 무관심했다.
C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붙잡고 싶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채는 가족 내에서 C를 더욱 문제적인 구성원으로 만들었고, C가 만나는 친구는 위험하고 하지 말아야 할 관계로 낙인 찍혔다.
‘섹스중독’이라며 심리상담과 성교육을 받게 하기도 했다.
2020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부양의무제(가족 구성원, 특히 부모와 자녀 간의 부양 책임을 규정하는 제도로, 일정한 소득/재산을 가진 부모나 자녀가 있으면,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음)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광화문 농성장. (출처:장애여성공감)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용돈을 받지 못하고, 월급이 차압 당하자, C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채팅앱을 켜고, ‘원나잇’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위험한 폭력 상황에 내몰렸다.
성폭행 혹은 성추행 피해를 여러 번 겪었다.
돈이 필요했던 C는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합의금으로 상황을 무마하기도 했다.
무고로 역고소를 당한 적도 있다.
돈과 몸을 활용해야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였지만, C는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사랑해 줄 관계를 욕망했다.
돈을 주지 않고, 성관계를 하지 않고도 곁에 있어주는 친구관계,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동료관계,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내 속도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지지망’을 갖는 것. C의 바람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C가 꿈꾸는 미래를 실현할 토대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C의 노력과 도전은 늘 실패로 귀결되었다.
실패하며 의존하며 서로를 돌보며 살아간다
장애인, 특히 장애여성이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은 성폭력의 위험을 안고 있는 ‘위험한 관계’ 혹은 ‘일탈행동’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C의 삶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지적장애 여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려 노력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많은 경우 성폭력 피해 및 사기 피해 등의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
이러한 ‘실패’는 C가 관계 맺는 방식이나, 관계 맺는 이들의 폭력성 속에서 발생하지만, 본질적으로 C가 동등한 친구, 동료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는 위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C의 피해를 장애인의 무능, 즉 ‘취약성’에서 비롯된 장애여성의 몫으로 설명한다.
성폭력 등의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C의 ‘무능’과 ‘취약성’을 나열케 하며, 이를 입증하지 못할 때는 개인의 ‘문란함’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C의 도전이 왜 실패하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C의 관계 맺기가 피해 혹은 가해로 어떻게 변모하는지도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 사법체계와 사회복지제도는 이 사회와 분리되어 권리와 자원을 차단당한 장애인의 ‘고립’을 보지 않는다.
외로움과 관계의 단절을 장애인의 ‘무능’으로 설명할 뿐이다.
또한 장애로 인한 ‘자기결정권 실현 불가’라는 조건을 갖추어야만 피해로 인정한다.
결국, 평등하지 않은 관계나마 선택하고자 했던 장애인들은 때로는 카드 빚과 부채, 임대주택 퇴거, 기초생활수급권 박탈과 같은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결과는 다시금 장애인의 역량을 의심하는 차별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하며 삶을 살아간다.
돈을 떼이고, 거짓말에 속고, 실연을 당하고, 사기를 당하고 슬퍼하지만, 이 모든 한 과정 과정을 꾹꾹 밟아나가며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돌보고 타인과 의존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해내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누구도 성장의 과정을 의심받지 않는다.
실패의 기회를 박탈당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장애인의 실패와 독립은 의심받고 승인 받아야 하는가? 이들의 저항과 연대는 왜 인정되지 않는가?
누구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답 없는 차별에 저항하며 우리는 끝없이 실패하고 서로를 돌보며 연대하며 살아간다.
장애를 가진 A와 B, C의 삶은 가족과 보호자의 감금망에 균열을 내며,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일상의 저항을 쌓으며 나아왔다.
이들의 삶의 족적은 ‘장애인이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역량과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돌리길 요청하고 있다.
서로를 돌보며 존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평가하는가?
우리의 실패 경험은 어떻게 도전과 연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필자 소개] 유진아
: 소수자를 배제하는 기준과 제도에 저항하며, 다양성이 인정되고 실현되는 일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장애여성공감’의 활동가다.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 해결을 지원하고 연대하며, 사회와 제도의 문제를 장애여성 동료들과 찾아가고 있다.
이 과정이 시설화된 공간과 관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며 동료들과 다른 삶의 전략을 만들어 가는 여정이라 믿고 있다.
어린이와 동거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경험을 장애여성 운동과 연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고립된 정신장애인에게 ‘자립 역량’을 묻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