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존재는 금지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존재는 금지할 수 없다〉 (원제: Banned Together, 케이트 웨이, 톰 위긴 감독, 미국 2024) 중 엘리자베스 포스터, 밀리 베넷, 이사벨라 트로이 브라조반이 “나는 금서를 읽는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란히 앉아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13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비평을 금하기 위해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끔찍한 사건을 뜻한다.
이 용어는 이후 독재자 혹은 권력자가 언론이나 특정 사상과 문화를 탄압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때 쓰이는 말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분서갱유가 일어나고 있다.
  ‘음란물’ 민원으로 시작된 학교도서관 '금서’ 퇴출 사태 가만히 있지 않은 청소년들 “독서는 범죄가 아니다”   2022년 10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뷰포트 카운티. 지역사회 내의 주민 2명이 민원을 제기한다.
학교 도서관에 ‘음란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뷰포트 카운티 학군 내 모든 학교에서 97권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며 도서관에서 퇴출당했다.
금서로 지정된 책엔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가렛 앳우드의 명작 『핸드메이드 테일즈』(The handmaid’s tale), 흑인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데뷔작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 역시 흑인여성 최초로 퓰리처 픽션 부문 수상 경력을 가진 앨리스 워커의 대표작이자 영화,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걸작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열린 18회 여성인권영화제 FIWOM(Film Festival for Womon's rights, 피움)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존재는 금지할 수 없다〉(케이트 웨이, 톰 위긴 감독, 2024)는 바로 이 사태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터무니 없는 금서 지정 사태에 맞서는 세 명의 고등학생, 엘리자베스 포스터, 밀리 베넷, 이사벨라 트로이 브라조반을 조명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또한 파헤친다.
  엘리자베스와 밀리, 이사벨라는 각기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갑자기 97권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다양성 인식 청소년 문해력 모임 DAYLO(Diversity Awareness Youth Literacy Organization)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모임은 2021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홀랜드 페리먼이 시작한, 청소년이 주도하는 지역사회 봉사단체였다.
2022년의 금서 지정 사건이 일어나자, DAYLO 모임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청소년들은 “독서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시위를 하며, 뷰포트 지역 교육위원회에 참석해 직접 의견을 낸다.
  트랜스젠더 동생을 둔 엘리자베스, 퀴어로 정체화한 밀리, 이민자이자 유색인종으로서 살아온 이사벨라에게 몇몇의 책이 금서로 지정돼 도서관에서 사라진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삶이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 당사자로서, 책을 사랑하는 청소년으로서, 도서관 내 다양성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으로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존재는 금지할 수 없다〉 (원제: Banned Together, 케이트 웨이, 톰 위긴 감독, 미국 2024)     이들은 격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교육위원회에 참석해 3분의 제한된 시간 내 의미있는 발언을 하고자 애썼다.
밀리는 보수적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작은 지역사회에서 퀴어 문학을 접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말했다.
이사벨라는 ‘약물 사용 장려’를 이유로 금지된 책들을 언급하며, 그 책들을 접하지도 않은 자신의 형제가 왜 약물남용으로 죽을 뻔했는지 묻는다.
정말 그 책의 책임이 맞는지, 책이 없어지면 이런 문제가 사라지겠냐고.   이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패기는 교육계가 금서 지정을 다시 검토하게 하는 결과로 이끈다.
그리고 모든 책이 되돌아 오진 못했지만, 91권의 책이 다시 학교 도서관으로 되돌아 오게 하는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또한 이들의 끈질긴 투쟁은 미국 전역의 금서 금지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유(?!)를 위한 엄마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과 같은 승리가 다른 지역에서도 펼쳐진 건 아니다.
문학과 언론, 연구보고서 등의 검열에 반대하며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인권단체 ‘펜 아메리카 ’( Pen America)에 따르면, 2021년 이후 전국 공립학교에서 거의 16,000건의 도서가 금지 조치를 당했다.
금서로 지정된 책들의 다수는 인종 이슈를 다루거나 유색인종, LGBTQ에 대한 것, 그리고 성적인 내용이 포함되거나 성폭력을 다룬 책들이다.
  2023~2024학년도에 가장 많은 학교에서 금지 당한 책은 베스트셀러 작가 조디 피콜트의 『19분』(Nineteen Minutes)으로, 이 책은 학교 내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금지해야 한다는 이들은 책이 학생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봤을 때 ‘안 좋은 것, 나쁜 것’인 ‘페미니즘, 비판적 인종이론, 퀴어이론’ 등이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입시키고, 세뇌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강력하게 외치고 있는 건 “자유를 위한 엄마들”(Moms for Liberty)이다.
‘양육자’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닌 ‘엄마들’이라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 단체는, 미국의 공화당 텃밭으로 잘 알려졌으며 ‘리틀 트럼프’라고도 불리는 론 디샌티스가 주지사로 있는 플로리다 주에서 시작됐다.
  다큐는 “자유를 위한 엄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조명하며 주요 인물들도 언급한다.
놀랍지 않게도, 남편이 플로리다주 공화당 대표로 있는 등 공화당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탄탄한 정치 인맥과 풍족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유를 위한 엄마들”은 급성장한다.
  “자유를 위한 엄마들”은 교육부, 교육위원회, 학교, 교사 그리고 학생의 권리보다 엄마로서의 내 권리를 강조하며, 내 아이한테 읽힐 책은 내가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교육자라 불리는 전문가를 불신하는 한편, 플로리다 출신의 한 간호사가 설립한 ‘북룩스’(BookLooks)라는 사이트를 맹신한다.
북룩스는 ‘성별 개념’, ‘성적 묘사’ 등에 대해 자신들만의 기준을 내세워 책의 등급(1~5점, 5점에 가까울수록 유해함)을 매기는데, 2022년 뷰포트 카운티에서 민원을 제기한 이들도 “이 사이트에서 3점 이상 받은 책이 학교에 있다”며 항의를 한 것이었다.
한 남성 학부모가 항의를 넘어 그 책을 수업시간에 활동한 교사와 사서, 학교에 지속적인 민원을 제기하고 심지어 협박까지 자행한다.
이런 민원 또한 “자유를 위한 엄마들”의 방식이며, 그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떠나는 교사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존재는 금지할 수 없다〉 중 엘리자베스 포스터, 밀리 베넷, 이사벨라 트로이 브라조반이 조디 피콜트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베스트셀러 작가 조디 피콜트의 『19분』(Nineteen Minutes)은 학교 내 총기난사 사건을 다루었으며, 2023~2024학년도에 가장 많은 학교에서 금지 당한 책이다.
      이들의 이런 과격한 움직임이 “교육부 해체”를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동일한 궤에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이들은 단지 금서 운동만 하는 게 아니다.
과거 미국의 노예제도가 노예에게도 이익이었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담으려 하는 시도에 함께하는 등, 백인 극우주의자들과도 공명한다.
이들이 금서 운동을 통해 무엇을, 왜 금기하고자 하는지는 매우 분명하다.
  한국도 성교육 도서 퇴출, 리박스쿨 사태 등… ‘느린 정치 쿠데타’를 경계하라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는 ‘피움톡톡’에서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는 “영화 속에 등장한 ‘느린 정치 쿠데타’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금서 목록을 만들며 청소년들의 알 권리를 빼앗고, 곳곳에서 다양성을 없애려고 하는 ‘느린 정치 쿠데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빠른 쿠데타보다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겠다, 윤석열보다 더 무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사실 이 영화가 다룬 사건은 남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성평등·성교육 도서가 열람제한이 되거나 폐기되었고,(관련 기사: 성교육 어느 때보다 절실한데, 성평등 도서 열람 제한? https://ildaro.com/9990)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유해도서로 낙인 찍혀 폐기된 일도 있었다.
독재 대통령을 숭배하고, 임신중지 권리와 동성애에 반대하는 등 극우 역사관이 담긴 교육을 초등학생 대상으로 진행한 ‘리박스쿨’과 극우정치와의 연결 또한 드러났다.
이미 우리 사회 안에서도 ‘느린 정치 쿠데타’는 시작된 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도 금서 지정에 반대하며 투쟁하는 청소년 당사자들이,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다양성의 세상을 열어주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육자들이 있다.
2017년, 페미니스트 교사라고 밝혔다가 엄청난 백래시를 겪은 마중물샘/최고현희 교사는 영화를 본 소감을 전하며 “(극우들의) 동력은 ‘공포심 유발’이지만, 우리의 동력은 ‘다양한 존재와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랑과 포용성이 차별과 혐오, 배제하는 마음에 질 리가 없다.
우리는 금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