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행기와 공항이 로망이었던 청년 암 생존자 하늘씨
회사에 출근해서 찍은 공항의 모습. 하늘이 암 수술 이후 취직한 외국계 항공사는 이전에 일했던 항공사와는 조직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하늘 제공]
하늘은 고등학생 시절,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직접 모자를 떠서 전하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머리카락이 없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바늘을 움직이던 그 시간은, 어쩌면 하늘이 암 환자라는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본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십 대의 하늘은 남들과 다르지 않게, 열심히 살아가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취업이 어렵기로 소문난 항공사에 인턴 승무원으로 입사했고, 2년간의 인턴 기간이 끝나고 정규직 전환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성실히 일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차를 사고, 언젠가는 집을 사야지, 하고 꿈꾸던 하늘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그러나 정규직으로 첫 출근을 해보기도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승무원에서 암 환자로
처음에는 당연히 휴직하고 치료를 받을 생각이었다.
한 달에 보통 12일 정도를 쉴 수 있는 승무원이라는 직업 특성도 있었기에, 일단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는 어떻게든 통원으로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회사 인사팀은 완강한 태도로 일관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자마자 바로 병가를 낼 수는 없다고 했다.
돌아와서 일한다고 해도, 건강이 다시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게다가 어려운 코로나 상황에서 정규직 전환이 안 돼 떨어진 동기들도 많은데, 계속 ‘고집’을 피워 자리를 보존하려고 해야겠냐고 다그쳤다.
퇴직은 하늘의 선택이었지만, 사실 그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필, 하늘이 암을 진단받은 2021년 1월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보호자가 병원에 출입할 수 없었다.
수술을 위한 입원부터 퇴원까지, 그리고 이후 통원 치료 내내 하늘은 혼자였다.
지금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이는 ‘잘 다녀오라’는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혼자 병원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고, 병실에서 짐을 정리하고 각종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내내 혼자였으며, “수술 중 출혈이 많아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때조차 오롯이 혼자였음을 의미한다.
가족과 휴대전화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서러워 많이 울었다.
수술 후 이어진 한 달간의 입원 기간 동안 병동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발생했을 때는 ‘나도 사망자가 되는 건 아닐까’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토록 불안한 상황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입원 기간 내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틈이 나면 책을 읽거나 컬러링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암 환자라는 주변의 시선과 “끝났다”는 말
문제는 바깥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암 치료를 받던 시기, 주변에서는 자꾸 “이제 네 인생이 끝났다.
”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끝났다’는 말에는 하늘의 건강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괜찮은 직장도 있었고 젊은 여성이라 결혼 상대로 괜찮았는데 이제는 ‘망했다’는 의미까지 실려 있었다.
심지어 한 친척은 남동생에게 “누나가 못 살 수도 있으니까 엄마, 아빠는 네가 잘 보살펴라. 이제 희망은 너밖에 없다.
”라는 말을 건넸다고 했다.
오기가 생겼다.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암 환자라고 일을 안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서 암 환자가 된 지 1년 만에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와 공항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에 승무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하늘이 암 진단과 치료라는 긴 과정을 통과해내고 다시 찾아본 직장 역시 항공사였다.
퇴근길에 찍은 사진. 하늘은 공항에서 다른 사람들의 여행을 곁에서 함께하며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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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얻은 외국계 항공사 서비스팀 면접 기회. 어떤 역경이나 어려운 일을 겪었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출장이 잦은 업무에 지원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회사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솔직하게 암 환자였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되게 무서웠죠. 이것 때문에 혹시 채용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싶어서요. 사실 회사 입장에서는 암 환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거나 기피할 수도 있잖아요.”
다행히 이번 회사는 이전 회사와 조직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하늘은 간절히 바라던 재취업에 성공했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는 독일 본사와 소통하며 한국 여객서비스 현황을 파악하는 일이다.
때로는 몰래 승객처럼 비행기를 타고 직접 서비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옆자리 승객들에게 서비스에 대한 의견을 묻고, 그 내용을 꼼꼼히 기록해 개선책을 찾는 것도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다.
일이 너무 재미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행이 누군가에게 큰 행복이자 설렘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하늘에게, 그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보람찬 일이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업무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회사에 갈 때마다 발걸음이 가볍다고 자주 말하거든요. 저는 이 직업이 제게 날개를 달아줬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하늘은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
다만 현재는 독일 노선 업무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회사는 암 경험이 있는 하늘에게 방사선 노출 가능성이 많은 노선을 배정하지 않는다.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증명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허가가 난다.
그래서 하늘은 건강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 넓은 노선을 경험하고, 더 많은 곳으로 여행의 기회도 함께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달라진 습관과 취미 생활, “나에게 집중하는 삶”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남들보다 늦어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남들처럼 잘 달려가고 있다가 갑자기 청천병력 같은 병 때문에 커리어도, 삶도, 중간에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하늘의 현재 모습은 암 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암 진단 이후, 하늘의 삶에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무엇보다도 수술 이전에 비해 체력이 떨어졌음을 느낀다.
의사들은 꼭 수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전과 비교해서 운동할 때 호흡이 가쁠 때가 많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어지러워서 주저앉을 때도 있다.
그래서 러닝과 수영,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암 수술 이후 바뀐 생활 습관 중 하나는 새벽 러닝이다.
매일 아침, 하늘은 러닝 혹은 수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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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술 직후처럼 매일 그러지는 않지만, 지금도 종종 샤워할 때 몸에 생긴 수술 상처를 보면 ‘내가 환자였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 상처 때문에 수영을 잠시 그만두었던 적도 있다.
수영장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몸에 상처가 났어?” “여자인데 흉이 있으면 시집 못 가는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좀 아팠어서 수술을 했어요.’라는 말을 매번 해야 하는 거에요. 그런 상황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좀 견디기가 힘들어서 한동안 수영을 못 다녔죠. 그만큼 몸에 난 상처가 저한테는 좀 숨기고 싶은 부위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인의 시선과 말 때문에 건강을 위한 운동 하나를 포기하는 건 억울했다.
결국 좋아하던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지금도 수영장에 꾸준히 다니고 있다.
불편한 시선과 질문들은 여전하다.
“제가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분들이 다른 분들에게도 이야기를 했는지, 어떨 때는 ‘수술하고 나서 그렇게 된 거라며?’라고 먼저 아는 척하는 분들도 있어요. 제 벗은 몸을 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민망해서, 그냥 ‘네’ 이러고 빨리 씻고 나올 때가 여전히 있어요. 근데 그런 것도 제가 견뎌야 되는 상황인 것 같아요.”
식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승무원으로 일할 때는 승객 호출이 있기 전에 시간 날 때 기내식을 아무렇게나 비벼서 빨리 먹을 때가 많았다.
이제 하늘은 되도록이면 직접 요리해서 식사 준비를 한다.
하루에 한끼만 먹는 1일 1식을 한 지 꽤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 먹는 식사인 만큼 정성스레 준비한다.
그러면서 건강한 음식을 만들려면 생각보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처음에 요리를 시작할 때는 힘들었는데, 점차 유튜브나 요리 관련 앱에 올라오는 레시피들을 참고해 만들어보면서 요령이 생겼다.
하늘은 이제 몇 년째 식사 시간이 되면 가장 먼저 채소를 섭취한다.
그리고 15분에서 20분이 지난 후 단백질 위주의 음식을 먹고, 마지막에 소량의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순서를 꼭 지킨다.
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있을 때는 종일 굶고 가서 샐러드 같은 야채 위주의 식사를 선택할 때가 많다.
보통의 의지로는 쉽지 않은 생활 습관이다.
“가끔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싶고, 친구들 SNS에서 다들 이곳 저곳 자유롭게 다니며 음식도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걸 보면 너무 부럽죠. 괜히 억울하고 슬플 때도 있는데, 또 건강을 생각하면 이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요. 이렇게 습관을 바꾸고 나서 몸 상태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걸 보면서 이런 생활이 저한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이 생긴 것도 중요한 변화다.
그 중 한 가지는 유화 그리기다.
취미 이야기를 하면서 하늘의 눈이 반짝였다.
본인이 한 달 동안 그렸다는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정성이 들어가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온전히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게 저한테 너무 의미 있고 재밌는 일인 거에요. 이런저런 취미를 찾아보면서 즐기려 해요. 전에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아니면 사회가 원하는 대로 성실하게 사는 게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나한테 집중하는 삶을 살려고 마음먹었어요.”
하늘이 챙겨 먹는 건강 식단. 가끔은 힘들어도, 꼭 신선한 채소 위주의 샐러드를 챙겨 먹으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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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받는 위치에서 목격한 가족 간의 갈등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놓기도 했다.
“제가 아픈 동안 부모님과 동생이 서로 너무 많이 싸웠거든요. 제가 아프다는 이유로 다들 지쳐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저는 정말 안 좋았거든요. 만약 내가 가정을 꾸렸을 때 똑같이 그런 갈등을 지켜봐야 한다거나 갈등의 당사자가 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무엇보다도, 투병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보다 혼자 지내는 데 능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은 혼자 사는 삶은 계획하면서도, 주위에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하늘에게 혼자 사는 사람은 결코 외로운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과 삶의 밸런스를 잘 맞춰서 생활하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제가 가진 여유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주위에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청년 암 생존자가 청년 암 환자에게…
청년 암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반복적으로 듣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암 진단을 받고 막막했을 때, 다른 사람의 투병기와 완치된 이야기들을 찾아보면서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 그리고 그 때 받은 도움이 너무 고마워서 자신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는 얘기. 하늘도 비슷한 이유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치료를 받으면서 완치된 제 또래들의 이야기를 일부러 찾아볼 때가 많았어요. 저도 열심히 치료받으면 완치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거든요.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런 도움을 좀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투병을 거치며 생각보다 자신이 굉장히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하늘은, 다른 청년 암 환자들에게도 본인이 스스로가 강하다는 걸 항상 잊지 말라는 당부를 전했다.
“암 투병 이후 제가 구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서 다시 일을 못할 거라고 했어요. 암 환자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일하려고 하냐고 했고, 인생이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근데 저는 그게 편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질병에 걸린 사람을 나약하고 능력 없다고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도 자존감이 낮아질 때가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필자 소개] 지아
. 개인의 몸과 건강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건의료 불평등을 해소하고 건강형평성을 높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 날카롭지만 다정한 글을 쓰고 싶다는 실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
길동무 문학학교 르포교실을 수강했다.
※더 많은 청년 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이가 되어주실 이삼십 대 청년 암 생존자 분들은 메일로 연락주세요. youngadultcancersurvivors@gmail.com
정규직 승무원으로 첫 출근해보기도 전에 ‘암 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