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작가 파르자나 아흐메드 우르미의 〈빌려온 시간〉
“가자로 가는 배 위에서 해초” ©개척자들 2025년 10월 1일자 인스타그램
어떤 얼굴
요즘 계속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얼마 전 구호 물품을 전하러 바닷길을 통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향했던 활동가 해초의 얼굴이다.
그가 나포되기 전에는 무사히 도착하길 기도하며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을 맞는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나포된 이후에는 대한민국 여권을 든 채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잘 알지 못하는 얼굴임에도 한동안 나의 일상과 함께했던 그 얼굴에는 단지 ‘용기’라고만 말할 수 없는, 어쩌면 많은 이들은 보지 못하는 여러 시간대를 내다보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간의 긴박했던 시간 동안 해초의 얼굴은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어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바다 위를 떠다녔다.
그곳에는 잔인하고 차가운 말들이 무기처럼 그 이미지를 할퀴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의 얼굴 속에서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해초에 대한 기사 댓글에는 도덕적이고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감, 일종의 반지성주의와 같은 반응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가가 허락하지 않는 위험한 곳에 가서 국가를 곤란하게 만든 것에 대해 개인이 책임을 지라는 식의,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비난이 많았다.
특히 눈여겨보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캄보디아의 보이스피싱 조직에 연루되는 청년들의 실태와 비교하며 해초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취업 사기를 당한 구직자 청년과 세금 낭비하는 활동가 청년이라는 대립구도. 그 속에는 생존만으로도 벅찬 자본주의 현실에서 정치적 신념에 따른 활동(종종 이 자리에 문화예술 활동이 등장하기도 한다)은 사치라는, 혹은 현실 감각이 없는 행위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국가가 하지 못하는(혹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시민 활동가 정체성에 대한 전국민적 인식이 부족한 것도 한몫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가가 만들어둔 울타리 안에서 안락하게 살고 싶은 욕망들의 아우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종종 보도되는 죽을 고비에 처한 누군가를 구한 의인을 바라보는 우호적인 시선이 왜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에 직면하고 있는 가자 지구 난민들을 구하려는 사람에게는 가 닿지 않는 걸까. 또, 인간의 노동력과 생명을 사고파는 음지의 범죄 현장과, 전쟁무기 거래시장이 만들어낸 난민캠프의 현장이 자본주의의 폭력성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왜 보지 못하는 걸까.
그래도, 일단은 해초를 향한 차가운 말들을 뚫고서 ‘가자’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타오르고 있는 상황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덕분에 나도 미루던 『팔레스타인 시선집』(2025, 접촉면)을 며칠 전 구매했고, 틈틈이 팔레스타인 소식을 다시 챙기고 있다.
나에게 온 변화의 바람을 잊지 않을 것이다.
동물행동학자이자 평생을 바친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박사가 타계한 후, 넷플릭스는 미리 촬영해둔 마지막 인터뷰를 공개했다.
제인 구달 박사는 자신이 죽고 난 후 공개될 이 내밀한 인터뷰에서, 곧 영상을 보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명사들의 마지막 한마디: 제인 구달 박사〉(2025) ©Netflix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댓글과 싸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흘러 넘치는 어두운 정동들을 생성하는 세계, 우리를 양분화하는 세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타계한 제인 구달 선생님이 마지막 메시지에서 “끝까지 싸워 봅시다.
”라고 했던 건 아마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를 파편화하는 더 큰 힘과 싸울 것.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세계와 싸울 것. 그리고 이 행성에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것.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연히’ 만난 얼굴
해초 활동가는 내 동료의 동료이기에 가깝다고 하면 가깝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멀다면 먼 거리에 있다.
하지만 며칠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안도하던 시간은 나의 몸과 마음을 수시로 가자 부근 바다 한복판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 그와 나의 거리, 나와 가자의 거리는 어느새 꽤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해초는 돌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해초가 가자 지구에서 보고자 했던 얼굴, 어쩌면 만날 수 있었을 얼굴,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얼굴’을 상상해 본다.
내가 해초의 얼굴과 우연히 만났듯,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을 그 얼굴을.
이때 ‘우연’이라는 말은 ‘먼 곳’에 존재했던 여러 존재를 잇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가까움이라는 단어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2023, 오월의봄)에서 고통의 우연성에 대해 분석하며 ‘우연성’이라는 단어와 ‘접촉하다’라는 단어는 동일한 어원을 공유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함께’ ‘만지다’라는 뜻을 담은 라틴어 단어 ‘contigere’다.
우연성은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건들과 존재들 사이의 접점을 일컫는 것 같지만, 우연이 발생함으로 인해서 ‘접촉’이 발생하고 어떤 것이 가까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우연성이 발생하려면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결과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우연한 만남이 발생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시야에서 가능한 사유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생기는 일들,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여러 사건들은 늘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깨달음. 그렇다면 우연은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뜻과 마음과 발걸음이 촘촘히 모인 거대한 기획의 일부이다.
우주적인 시야에서 보면 필연과도 같은 만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의해 내가 우연히 만났을 수많은 얼굴을 되짚으며, 작년에 만났던 한 방글라데시 작가를 떠올린다.
2020년부터 동료 예술가들과 나는 인권단체 아디(ADI: Asian Dignity Initiative)의 지원을 받으며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 사람들이 제노사이드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근처에 자리 잡은 난민캠프를 살피고 있다.
2023년에는 동료 예술가와 함께 직접 난민캠프에 방문해 로힝야 난민 여성들과 예술 워크숍을 함께 했다.
그때 난민캠프에 작업을 하러 방문하는 여러 예술가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당시는 캠프 안에서 바쁜 일정으로 인해 그들을 찾아서 만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남긴 작업의 흔적들만 살필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여성 화가 파르자드 아흐메드 우르미는 2024년 5월 인천 KMJ아트갤러리 초대전을 통해 한국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빌려온 시간(Borrowed time) 10,11,12〉(2024) ©Farzana ahmed urmi
한국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동료 예술가가 인천의 한 전시장에서 방글라데시 작가를 만났는데 ‘우연히’ 그 또한 로힝야 난민캠프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파르자드 아흐메드 우르미(Farzana ahmed urmi)였다.
동료의 소개로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방글라데시 작가를 만났다는 것과 그 또한 로힝야 난민캠프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의 연속된 우연은 놀랍지만, 돌이켜보면 이 또한 그간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예상된 만남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당시 파르자나 작가는 전주의 청목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고,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는 그간 그려온 작업들이 걸려있었다.
대부분 초상화였고, 작가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난민캠프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었다.
그림은 검은색과 갈색, 적색이 섞인 어두운 색감의 얼굴들이 많았는데, 버려진 커피가루나 나무, 흙에서 추출한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그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겉으로 드러난 표정보다는 그 내면에 고인 감정, 혹은 그림을 그리는 순간 둘 사이를 흐르고 있는 감정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이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시간성을 빠르게 응축한 얼굴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느껴지는 어두움이 부정적인 정동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렇게 이 그림들은 죽음의 불가피성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의 흔적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는 로힝야 난민캠프이지만, 파르자나 작가의 여러 작업들 속에서 눈에 들어온 하나의 단어는 우연히도 ‘팔레스타인’이라는 글자였다.
얼굴을 되찾는 세계
〈빌려온 시간(Borrowed time)〉 시리즈는 파르자나 아흐메드 우르미의 근작이다.
이 작업을 소개하는 작가 노트에서 그는 현재 자신의 모든 생각이 전쟁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하며, 전쟁을 겪고 있는 건 당사자만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라고 강조한다.
팔레스타인 하늘에 미사일이 떨어질 때, 그 소리는 흔적으로 남아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에도 도달하기 때문이다.
〈빌려온 시간(Borrowed time)〉(2024) 확대 이미지 ©Farzana ahmed urmi
‘빌려온 시간’이라는 작업 제목 속에는 아무리 높은 벽을 쌓아도 같은 공기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이 행성 속에서 연루된 ‘우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들어있다.
물리적으로 전쟁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잊은 채 숨을 쉬고 글자를 읽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누군가의 긴박한 시간과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잠시 주어진 시간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생존이란 누구에게나 잠시 빌려온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빌려온 시간〉 작업 안에는 얼굴과 손,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 없이 나열된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숫자는 파르자나 작가의 주된 소재처럼 보인다.
숫자는 주민등록번호, 차량번호, 계좌번호, 도로 주소 등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정보이자 정체성이다.
또한 자신과 멀리 떨어진,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가시화될 때 숫자는 부상자, 실종자, 사망자를 추상화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파르자나 작가는 눈앞의 숫자가 가리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숫자와 함께 수많은 추상화된 얼굴들을 배치하며 숫자에 함축된 서사와 감정들을 들여다볼 시간을 관객에게 주려 한다.
이 그림을 보며 나는 팔레스타인 전쟁이 장기화되며 수십 채의 집이 파괴되고 수만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리며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뉴스의 반복 속에서, 매일 조금씩 바뀌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둔감해지는 일상이 두려워 가자 지구로 가는 바닷길에 올랐을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이 만났을 숫자 뒤의 얼굴들을 떠올렸다.
해초의 얼굴, 실종된 사람들의 얼굴, 제인 구달의 얼굴, 파르자나 작가의 얼굴, 그를 소개해 준 동료의 얼굴, 그림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이름 모를 얼굴, 그리고 어떤 얼굴. 이 글은 우연 속에서 연결된 얼굴들을 생각하며 쓰였고, 그래서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건, 나의 세계는 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이렇게 차츰차츰 확장되기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들어오는 하나의 얼굴, 한 명의 이야기로 인해 갑자기 저 바다 끝까지 확장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가 단번에 확장되는 경험은 힘들게 안정시키려고 노력해 온 조그마한 나의 세계를 뒤흔들어놓기도 하겠지만, 내가 서있던 이 단단한 땅이 사실 폭풍우가 치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집이라고 여겼던 곳이 사실 배라는 것을. 흔들리는 세계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건 혼자 살아남을 힘이 아니라는 것을. 저 먼 곳에서 우연히 나를 기다리는 얼굴들을 상상하는 것이 결국 나를 나아가게 하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함께 기쁘게 흔들리는 세계 위에서 우리는 반드시, 우연히 서로의 얼굴을 찾아낼 것이다.
[필자 소개] 전솔비
. 시각문화 연구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캠프라는 현장을 만나며 〈연약한 기록들의 춤〉(신촌문화발전소, 2022), 〈캠프 사운드 커뮤니티〉(웹사이트 http://campsoundcommunity.com 2023)를 함께 만들고,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라는 책을 함께 썼다.
‘해초 활동가의 얼굴’에서부터 우연히 만난 얼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