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돈, 외모, 가족…익숙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생각➂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하는 동안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민은 의외로 소수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핸드폰을 보는 등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사진: 비미이너 제공)     지난 9월 5일. 7시 50분, 선바위역. 장애인들이 지하철에 탑승했다.
‘63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가 시작되었다.
지하철이 멈추고 5분이 지난 시간, 지하철 안은 소리치고 욕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휠체어를 탄 Moon의 옆에 바짝 선다.
경찰들은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의 피켓을 밀치거나 팔을 당기고, 꼬집는 등의 폭력을 쓴다.
시민들이 장애인들을 밀칠 때도 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고등학교 교복 입은 학생 네 명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친다.
심지어 한 명은 “전장연, 파이팅!”을 외친다.
‘이런 멋진 고등학생이!’ 감동하려던 찰나, 학생 한 명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간절한 말투다.
“이 시위 언제까지 해요?”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수업에 늦을 테고, 시험을 볼 수도 있고, 가서 할 숙제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원하던 대답이 아닌 눈치다.
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귀엣말을 한다.
“두 시간만 더 버텨주시면 안 돼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득 지하철 안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새로운 질문이 올라온다.
지하철에 탄 사람 중에 우리에게 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많아 봐야 15% 미만이다.
대부분은 상황을 살피는 정도의 주의만 기울일 뿐, 핸드폰을 보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채비해서 놓칠세라 종종걸음하며 지하철을 탔을 텐데, 왜 일제히 분노하지 않는 걸까? 표현하지 않을 뿐인가?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찬성하기 때문일까? 혹시 “두 시간만 더 버텨달라.”는 학생과 같은 마음?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불쉿(bullshit) 직업들 당신 직업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가?   이 학생의 ‘성인 버전’들을 만나고 연구한 학자가 있다.
5년 전 타계한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다.
그는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2011년 뉴욕에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소득 양극화와 금융자본의 탐욕, 높은 실업률에 항의하는 점거 농성을 두 달 넘게 벌였고, 세계 각국으로 확산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나키스트 활동가이기도 했다.
  2013년 그는 “불쉿(bullshit) 직업이라는 현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발표했다.
‘불쉿 직업’에서 ‘불쉿’이란 ‘빌어먹을’, ‘젠장’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비속어로, 직업 앞에 불쉿을 붙이는 일은 어쩐지 불경스럽다.
하지만 일단 붙이고 나면, ‘왜 이 말이 이제야 나왔지’ 할 정도로 입에 짝 붙는다.
그는 ‘불쉿 직업’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책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데이비드 그레이버 저, 김병화 역, 민음사)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로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는 직업.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김병화 옮김, 민음사)   이런 직업으로 인사 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홍보 조사원, 금융 전략가, 기업 법무팀 변호사 등의 직업을 든다.
  이 글은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 원문의 조회수 100만 건, 접속자가 많아 서버 다운, 몇 주 만에 열두 개 언어로 번역, 각국의 신문에 재수록… 화이트칼라 전문직들의 고백이 논문 게재 사이트 홈페이지를 도배한다.
작가 역시 수백 통의 메일을 받는다.
대부분이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제 고통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같은 내용이었다.
  이후 여론조사업체인 유코프(YouGov)가 이 가설을 조사한다.
영국인 대상으로 “당신 직업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37%가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하고, ‘그렇다’는 50%,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13%였다.
그레이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그레이버는 이런 직업 자체가 ‘뿌리 깊은 정신적 폭력’이라며, 이렇게 일갈한다.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자존감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그가 자아로 존재한다는 인식의 기초 자체에 대한 정면공격이다.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   그는 불쉿 직업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불쉿 직업의 사회적 해로움에도 주목한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진행한 연구는 고소득 셋, 저소득 셋의 직업 여섯 가지의 사회적 가치를 검토한 결과를 보여준다.
  시티은행가는 보수 1파운드(현재 원화로 약 1,900원)를 받을 때마다 7파운드의 사회적 가치가 파괴되고, 광고회사 사장은 11.5파운드, 세무사는 11.2파운드가 파괴된다.
반면 병원 청소부는 1파운드 받을 때마다 사회적 가치가 10파운드 발생하며, 재활용품 처리 노동자는 12파운드, 유아원 근무자는 7파운드가 발생한다.
  (그레이버는 현대자본주의의 비효율적이고 계급화된 관리구조가 일의 효율을 떨어뜨리며, 절차나 내부 정치가 일의 성과나 목적보다 앞서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구조를 왕, 영주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과시하기 위해 위계적으로 사람을 거느린 중세 봉건제와 유사하다고 본다.
“경영 봉건제도는 생산을 위한 구조가 아니라, 권력과 위계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한 체제이다.
”)   결론적으로 최소 40%의 사람들이 봉급을 받을수록 사회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불쉿 직업에 종사하며, 이를 모두가 알지만 아닌 척하며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본주의 고도화로 금융자본주의가 가속화될수록, 경영 봉건제도가 심화될수록, “자신의 직업이 무의미함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가 불쉿 직업으로 가득차 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노동의 불쉿화로부터 우리의 노동, 그리고 우리들을 구출할 방법이 있을까?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문화공연, 캠페인 등을 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 제공)       생산하는 게 아니라, 권력과 위계가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는 체제 불쉿-화로부터 우리의 노동과 우리 자신을 구출할 방법은?   그레이버는 증가하는 불쉿화의 대안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반가운 제안이지만 나는 장애활동지원을 하며 또 하나의 대안을 찾게 되었다.
전장연의 집회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였다.
노래를 듣는 순간, 숨이 멈춰졌다.
  “노래 만들고 춤춰요/ 그림 그리고 짜잔잼/ 아이고 깜짝 깜짝 놀랐지/ 아이고 깜짝 깜짝 놀랐지. 신나고 즐거운 시간/ 돈을 모아서 선물도 사고/ 돈을 모아서 저축해야지 일하고 싶어요/ 밥 먹고 살아야지/ 일하고 싶어요/ 사람이 일을 해야지 일하고 싶어요/ 밥 먹고 살아야지/ 일하고 싶어요/ 사람이 일을 해야지 내 일자리 돌려줘/ 내 밥그릇 갖다놔/ 내 일자리 돌려줘/ 내 밥그릇 갖다놔”   도대체 이런 놀라운 가사를 누가 썼을까? 작사가를 찾아보았다.
“작사작곡: 고지선 김수진 김주희 박소민 신병선 신승연 신현상 왕지용 이승미 이연옥 최재형 황임실 최바름 탁영희”   무슨 작곡작사가가 이렇게 많은가? 그렇다.
이 노래는 개인이 만든 노래가 아니라,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에서 나온 공동 생산물이었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는 또 무엇인가? 이것은 현재 13개 지자체가 중증장애인에게 제공하는 일자리이다.
장애인 고용에 관한 법들이 있어도 중증장애인에게까지 차례가 오지는 않고, 중증장애인 복지일자리가 있지만 이는 일자리가 아닌 복지 서비스에 가깝다.
    결국 우리 사회는 중증장애인을 ‘일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해왔다.
이에, 중증장애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왜 일에 우리 몸을 맞춰야 하는가? 우리 몸에 일을 맞춰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017년 말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 쟁취 투쟁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 2020년 하반기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2023년 예산 전액 삭감으로 사업이 사라졌다.
해고노동자들은 ‘오세훈 서울시장,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노동자 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 투쟁을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이 요구는 헌법 제32조 1항, 우리나라도 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27조의 내용과 일치한다.
결국, 각 지자체에서 조례를 만들고 현재 시행되고 있다.
  여기서 중증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몸’이 아니라, 한국도 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을 알리는 캠페이너로, 장애인 정책과 실태를 모니터링을 하는 모니터로, 시민사회 인식개선 교육자, 장애의 통찰을 예술작업으로 보여주는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돈을 모아서 선물도 사고/ 돈을 모아서 저축해야지/ 밥 먹고 살아야지/ 사람이 일해야지”   이 놀라운 가사가 나온 데는 중증장애인 아티스트들의 노동이 있었다.
나의 밥이 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물이 되고, 내일의 밑천이 되는 노동, 딱 ‘내 밥그릇’만큼의 노동, 누구의 것도 빼앗거나 훔치지 않는 노동, 손이 없으면 발로, 눈이 없으면 귀로, 그조차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노동, 누구 흉내 낼 것도 없이 그저 나로서 하는 노동, 너와 내가 달라서 신기한 노동, 내가 우리로 이어지는 노동, 노동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노동….   이런 노동이 흘러넘치는 공장을 나는 상상한다.
생산물도 나오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도 돌지 않지만,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 공장. 공장을 돌리고 돈을 벌수록 가치와 존엄을 생산하는 공장. 불쉿 직업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불쉿 직업의 과녁을 정확하게 꿰뚫는 노동의 공장을.   위의 곡 제목은 “내 밥그릇 갖다 놔”이다.
2020년, 가장 처음 시작된 서울형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중심일자리는 2023년 12월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되면서 사라졌다.
노동자 400여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것이다.
서울시 사례는 이 일자리를 지자체가 아닌 법으로 제정해야할 필요를 절실히 보여준다.
(400여 명의 해고노동자들은 ‘권리중심노동자해고복지투쟁단‘으로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이 노래는 복직투쟁가이다.
)   2024년 12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지원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불쉿 직업에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이여, 새벽부터 나와 힘겹게 지하철행동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지하철 좀 더 멈춰달라고 (속으로 기도)하지 말고, 이 법이 통과되도록 힘써 달라. 우리를 불쉿 직업에서 구원할 열쇠가 여기에 있다.
  [필자 소개] 호미 .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한국양성평등교육원 농촌성평등 전문 강사, 전국귀농운동본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
지하철을 조금 더 멈춰달라는 고등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