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동성혼 법제화 이끈 유메이뉘 전 의원 인터뷰
유메이뉘(尤美女) 전 의원이 대만 동성혼 법제화 여정을 담은 저서 『亞洲第一(First in Asia)』를 들고 웃고 있다.
©일다
대만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한 지 벌써 6년이다.
이후 네팔, 태국에서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혼인평등 논의가 매우 더딘 상황이다.
지난 21대 국회 기간인 2023년 5월 31일, 당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을 대표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 한번 못한 채 국회 임기가 끝났다.
이후 2024년 10월 10일, 11쌍의 동성 부부가 동성혼 법제화 실현을 위해 ‘혼인평등 소송’을 시작하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원고들은 자신들의 혼인신고를 수리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불허하는 민법 조항들의 위헌 여부를 묻는 11건의 소송을 전국 6개 법원에 제기했다.
1년이 지난 현재, 9건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 중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난 10월 16일, 무지개행동과 모두의결혼이 〈국제 혼인평등 컨퍼런스〉를 열어, 동성혼이 법제화된 각국의 사례를 공유하였다.
(관련 기사: ‘동성혼 법제화’, 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공유하는 과정 https://ildaro.com/10307) 대만에서는 유메이뉘 전 의원이 연사로 참석했다.
1955년생의 유메이뉘(尤美女) 전 의원은 인권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로 오래 일하다 민주진보당(민진당) 소속으로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입법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2012년 민법 내 ‘결혼은 남녀 간’이라는 문구를 ‘당사자 쌍방’으로 바꾸는 민법 개정안 초안을 제출하며, 동성혼 법제화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민법 개정은 실패하였고, ‘사법원(헌법재판소) 해석 제748호 시행법’이라는 특별법 형태의 정부 입법안이 입법원(국회)을 통과하며 2019년 대만은 아시아 첫 동성혼 법제화를 실현시킨 국가가 되었다.
과연 대만 사회는 어떻게 동성혼 법제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그 역사의 현장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유메이뉘 전 의원을 만나 들어보았다.
송이원 무지개행동 활동가가 통역으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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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동성혼 법제화에 큰 역할을 하셨는데요. 이 사안에 관심을 갖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성소수자 당사자는 아님에도 ‘혼인평등 법안’에 참여하게 된 건, 인권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로서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여성운동을 하면서 많은 인권단체들과 연대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법안에도 관여하게 되었어요. 마침 제가 입법위원이 된 시기에 동성혼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내가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사명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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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에서 국회의원이 된 이유도 묻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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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민주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제안 받았어요. 당시 친구들이 “너 괜찮겠냐? 굉장히 힘들 것이다.
”라고 했었죠. 하지만 이미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때부터 입법 운동을 해 왔고, 가정폭력방지법, 성폭력방지법, 성희롱 관련 법 등 여러 여성 관련 법안을 추진해 온 경험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실 입법은 아무리 법안을 잘 써도, 국회 안에서 그 법을 ‘끝까지 책임질 의원’이 없으면 소용 없잖아요. 그런데 한동안 그런 의원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 시기에 의원직을 제안 받았고, 여성단체와 시민운동단체들이 “당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직접 그 일을 하는 사람이 해 보자 결심하게 됐죠. 그렇게 8년 동안(비례대표로 2번 역임) 입법위원으로서 동성혼 법제화뿐만 아니라 여성인권 관련 법안, 사법개혁, 과거사 정의, 연금개혁 등 여러 법안을 추진하는 역할을 했어요. 차이잉원 총통(2016년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으로 선출. 2024년까지 임기를 수행)이 추진하고자 했던 주요 법안 대부분을 국회 안에서 실제로 통과시키는 일을 했죠.
유메이뉘 전 의원의 〈국제 혼인평등 컨퍼런스 - 변화하는 가족, 성숙하는 민주주의: 동성혼 법제화〉 발표 자료 중, 대만 동성혼 법제화 관련 입법 과정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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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여성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아요. 의원님은 어떻게 많은 개혁 법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나요
?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것이죠. 사회운동가로서의 역할과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시민단체의 요구와 정당의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난 민진당이 추천한 비례대표였고, 시민단체들은 거의 100%의 기대를 걸었어요. 하지만 정당의 요구는 또 다른 것이었죠. 그래서 늘 고민이었어요.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시민사회의 목소리인가? 당의 입장인가?’
저를 민진당에 추천했던 선거위원회 담당자에게 찾아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당신은 민진당이 추천한 비례대표다.
하지만 시민단체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면 당신의 역할은 ‘시민사회의 요구를 설득해서 당을 움직이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당조차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정당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역할은 ‘샌드위치’ 같아요. 시민단체의 기대와 정당의 기대 사이에 끼여버리는 거죠. 압박도 커요.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신뢰예요. 시민단체는 ‘전부 다’ 얻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통과되는 법안은 60~70% 정도예요. 그런데 시민단체는 남은 30~40%를 보면서 “왜 이것밖에 못 했냐”고 비판하고, 정당은 반대로 “40%에서 60%로 끌어올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하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양쪽 관계가 긴장되고, 결국 협력이 끊기고 대립으로 가요. 이럴 때 정치인의 역할은 ‘다리(bridge)’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시민단체에서도 “저 사람이 배신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 정치인이 무언가 조율하고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해요. 결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여전히 같은 편’으로 여기고 신뢰를 유지해야 해요.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건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관계를 해치지 않는 것’이에요. 물론 굉장히 어렵죠. 그럼에도 시민단체와의 신뢰를 유지해야 하고, 비판이 나와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해요. 그건 당신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그 사안’에 대한 비판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공격이라고 받아들이지 말고, 그걸 ‘정책적 토론’으로 바꿔야 해요. 그게 현명한 정치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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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동성혼 법안을 추진할 때 민법 개정의 방법을 선택하셨어요. 해외에선 동반자법(Civil Union)이나 조례 등을 만들고 혼인평등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왜 민법 개정이었나요?
‘시민결합’(동반자법)과 ‘혼인법’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파트너 관계에서는 배우자 간의 충실 의무(즉, 제3자를 두지 않을 의무)가 없어요. 또한 상속, 의료 동의, 보험, 세금 등 혼인 관계에서만 가능한 여러 법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요. 우린 이미 동성혼을 추진하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별도의 ‘파트너법’을 만드는데 힘을 써야 할까? 그냥 처음부터 ‘혼인평등’으로 가자는 결정을 했죠.
다만 행정 차원에서 병원 수술 동의서나 복지 혜택 같은 부분을 정책적으로 조금씩 개선하도록 요구했어요. 예를 들어, 동성 파트너가 행정상 ‘배우자’로 등록할 수 있게 해서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식이었죠. 법이 완전히 통과되기 전에도, 행정 절차를 통해 현실적 변화를 만들어 왔어요.
무엇보다 ‘혼인평등’은 단지 법률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가 사회에서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 상징이라고 봤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민법 개정’으로 직접 나아간 이유입니다.
유메이뉘 전 의원의 〈국제 혼인평등 컨퍼런스 - 변화하는 가족, 성숙하는 민주주의: 동성혼 법제화〉 발표 자료 중 「사법원 석자 제 748호 해석」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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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개정안이 발의된 이후, 2017년 5월 24일 헌법재판소(사법원)가 「사법원 석자 제 748호 해석」을 냈습니다.
동성 커플의 혼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였고, 2년 내 입법을 하라고 했죠. 하지만 그게 이뤄지지 않았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반대 세력의 저항이었어요. 그들은 ‘결혼은 신성한 제도이며, 남녀가 결합해 다음 세대를 낳는 것’이라고 주장했죠. 물론 헌법재판소의 748호 해석에서 이미 그 논리를 뒤집었죠. 재판소는 “이성 간 부부라도 자녀가 없다고 해서 그 결혼이 무효가 되거나 파기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거든요. ‘출산을 이유로 한 혼인 제한’은 정당하지 않다고요. 하지만 반대 세력의 저항이 거셌고, 결국 2년의 기한을 넘기고 국민투표가 열렸지만 국민투표에서 (우리가) 졌습니다.
그 결과를 법적으로 존중해야 했어요. 그래서 결국 ‘민법 개정’ 대신 ‘특별법’을 만드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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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에서 졌지만, 결국 별도의 ‘특별법’(사법원 해석 제748호 시행법)이 제정되었잖아요. 그것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정말 여러 요소가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였어요. 우선, 가장 큰 이유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당선되어 민진당이 정권을 되찾았기 때문이에요.(관련 기사: 동성혼 합법화에 비혼 여성 대통령의 기여 컸다?! https://ildaro.com/9984) 왜냐하면 민진당의 핵심 가치는 “자유, 민주, 법치, 인권”이거든요. 반면 국민당의 중심 가치는 ‘경제발전’이니까 완전히 다르죠.
또, 차이잉원 정부가 새로 임명한 7명의 대법관이 비교적 진보적 인사들이었다는 거예요. 그 덕분에 「사법원 석자 제 748호 해석」이 가능했죠. 그 해석문 안엔 이런 문장이 있어요. “2년 내에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동성인 두 사람은 민법 친족편의 규정에 따라 관할 행정기관에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
”고요. 그 네 글자가 정말 결정적이었어요. 결국 행정기관은 그 조항을 근거로 ‘혼인신고’를 인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죠.
그리고 중요한 건, 각 기관마다 핵심 인물이 있었어요. 입법원(국회)엔 뤄즈정(羅致政) 의원 등이 있었고, 행정원(내각)에는 쑤전창(蘇貞昌) 원장이, 총통부에는 차이잉원이 있었어요. 그리고 시민사회엔 치쟈웨이(祁家威) 같은 활동가가 있었고, 여성단체를 비롯한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고 있었어요. 우린 흔히 이런 걸 ‘만루 홈런’에 비유해요. 1루부터 3루까지 선수가 나가있었고, 홈런을 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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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반대 세력의 저항 또한 격렬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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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007’ 영화가 따로 없었죠.(웃음) 반대 세력이 아주 거셌어요. 특히 장로교회 같은 보수 종교 단체가 중심이었죠. 문제는 민진당의 핵심 지지층이 바로 남부 지역의 장로교 신자들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당 내부에서도 굉장히 복잡했어요. 차이잉원 총통조차도 당 중앙위원회의 상당수가 보수적인 교회 기반이라서 내부 압박을 크게 받았고요.
2019년 5월 16일, 대만의 혼인평등 운동가들은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정부 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충샤오시로의 육교와 입법원(국회) 앞에서 ‘성소수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라고 쓰인 하얀 천을 들고 플래시몹을 벌였다.
[출처: 책 『비 온 뒤 맑음』 중 p.147 사진]
결국, 직접 장로교회 지도자들과 대화하러 가기로 했죠. 저와 찬성 측 그리고 반대 측 목사 한 명씩 참석해 공개 대담을 하기로요. 근데 이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유메이뉘가 우리 교회에 발도 들이게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퍼졌어요. 입법원 경호팀도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의 안전을 위해 몇 시간 시뮬레이션 회의를 했죠. “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난 “아니요, 가야 합니다.
도망치면 안 돼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007 같은 진입 작전을 짠 거죠. 오전 10시 대담이었는데 새벽에 가서 창고에 숨어 있다가 무대로 가기, 끝나고 나선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성 경찰관을 대리로 세우기 등의 작전이요. 근데 막상 당일엔 반대 세력이 별로 집결하지 않아서 토론을 잘 끝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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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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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정말 중요해요. 난 법을 배운 사람이니까, 논리와 사실로 차분히 말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언성을 높이거나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이성적으로요. 도발적인 질문에도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대화하자”는 태도를 유지했죠.
또 중요한 건, 성소수자 실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에요. 그 어떤 논리보다 실제로 살고 있는 이야기가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논리끼리 맞붙으면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뿐 교차할 수 있는 지점이 없고, 그럼 설득을 해낼 수 없죠. 하지만 진짜 삶의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고, 그러면 어떤 여지가 생기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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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성소수자 삶의 이야기를 언급하셨는데요. 법안을 추진하던 시기에 성소수자 단체들도 ‘커밍아웃 캠페인’을 하고, 서명운동, 다양한 플랫폼을 이용해 홍보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이런 게 입법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에요, 엄청나게 도움이 됐죠. 사실 혼인평등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건, 시민단체의 역할이 정말 컸어요.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세대 간 정보 단절이었어요. 대부분 찬성층은 젊은 세대, 반대층은 연령대가 높은 분들(노년층)이었죠. 그 때 노년층은 주로 라인(LINE)을 썼는데, 거기서 가짜뉴스가 엄청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젊은 층이 쓰는 플랫폼은 달라서, 사실상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어요. 서로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삶의 이야기가 담긴 짧은 영상들을 만들어서 라인에서 공유될 수 있게 했어요. 동성혼에 반대하는 사람 혹은 잘 몰라서 불안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이요. 그게 효과가 있었다고 봐요.
한 번은 기독교 신자인 기업인과 대화를 했는데, “난 동성혼 반대다.
의원님은 성소수자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이 법안을 추진하시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차분히 “이건 인권의 문제”라며 실제 사례를 몇 가지 이야기했어요. 그 분이 이야길 듣더니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며, “그런 이유라면 나도 설득이 된다.
”고 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모든 반대자가 ‘혐오자’는 아니라는 걸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잘못된 정보만을 받아왔던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당시 청년들이 ‘작은 벌(小蜜蜂, Marriage Equality Bees)’ 운동을 벌였던 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젊은 자원활동가들이 재래시장이나 거리로 나가서 할머니, 아주머니들과 직접 이야기했어요. 그게 바로 논쟁이 아니라 이야기로 설득하는 방식이었고, 정말 힘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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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만에서 혼인평등법이 마련된 지 6년입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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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변화는 성소수자들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정당성’을 얻었다는 것이에요.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이 통과되면 가정이 무너질 거야”, “남편이 첩을 데리고 들어올 거야.” 등의 터무니없는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고, 가정도 무너지지 않았죠. 결국 사람들의 공포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세상은 평온했죠.
책 『비 온 뒤 맑음』(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감수, 사계절, 2022)은 대만의 동성혼 법제화 여정 이야기가 다양한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책 중 ‘특별법’이 통과된 후의 모습의 사진들 ©일다
법 통과 전에는 혼인평등 지지율이 50%도 안 됐지만, 지금은 약 70%입니다.
이건 사회가 실제로 변했다는 증거죠. 법이란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사람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정당한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요. 그리고 2023년, 외국인과의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과 공동 입양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땐 놀랍게도 큰 반대 없이 진행되었어요.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포용적인 사회가 된 거죠. 세상일은 한 번에 완벽해지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그건 불가능에 가깝죠. 그러니까 “일단 존재하게” 하고, 그다음에 “더 좋게 만들어가자”고 하는 거죠.
물론 여전히 극단적인 반대 세력은 존재해요. 그들은 지금도 ‘가족단체’, ‘학부모 연합’ 같은 이름으로 위장해서 정부의 국가보고서 심의 때마다 나타나요. 그들은 항상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을 없애라.” 같은 주장을 하죠. 그러니까 우린 항상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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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성소수자’라는 말만 등장하면 회피하려고 하거나 오히려 혐오 발언을 하기도 합니다.
입법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국회의원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는 이들이기 때문에 유권자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고, 본인의 입장을 내보이기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대만의 경우에도 당시 (가장 다수당이었던) 민진당 의원들이 (특별법-정부 입법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지기 어렵다, 기권하겠다”고 했어요. 그 때 쑤전창 행정원장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연석회의에서 자신의 민주화 운동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죠.
“민진당이 창당할 때, 아직 계엄 시기(1949년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987년까지 약 38년 간 계속됐다.
많은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 투옥, 처형되어 이를 백색테러의 시기라고 부른다)에 창당(1986년 9월 비합법 상태로 창당)을 주도하면 잡혀가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용기낸 사람들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어요. ‘미려도사건’(美麗島事件, 1979년 12월 10일, 대만 남부 가오슝에서 일어난 민주화 요구 대규모 시위로 다수의 부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한 사건) 때도 체포자들을 변호하려는 변호사가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누군가 역사적 순간에 나서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민진당이 있는 겁니다.
이 (혼인평등)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다고 해서 잡혀가거나 목숨을 잃지 않아요. 그저 표를 조금 잃을 뿐입니다.
우리는 민진당인데, 국민당의 가치를 추구할 건가요? 지금은 역사적인 시기입니다.
십년 뒤 당신의 손자가 물을 거에요. ‘혼인평등 법안이 통과될 때 어디에 있었어요?’라고. 그 때 ‘난 거기서 찬성표를 던졌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건가요? ‘거기 없었어.’라고 부끄럽게 말할 건가요? 우리 임기 중에 몇 천개의 법안이 통과되지만 대부분은 기억되지 않아요. 하지만 이 법안만큼은 기억되고,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
더불어 다른 의원이 “우린 민진당이다.
「사법원 석자 제 748호 해석」은 법이고, 우린 헌법에 따라야 한다.
”고 이야기를 덧붙였죠. 당시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정말 닭살이 돋았어요.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정치인에겐 그렇게 ‘나서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정치도 혼인평등 위해 ‘나서는 사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