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기] ‘빵과 장미’의 권리
폐암 수술 후 병원 회복실에서. 퇴원 후 몸을 추스르는 동안, 내 폐의 모습에 고스란히 담긴 노동 현장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석면 노출, 권장량을 초과하는 세제 사용, 밀폐된 공간에서 유해가스 흡입, 과도한 노동과 관리자의 갑질 스트레스... (출처-이애경)     처음에는 이 일이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라 여겼다.
사실 나는 십수 년째 새벽에 출근해 건물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내고 쓸고 닦으면서도, 나 자신이 청소노동자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렇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전문 직종으로 인정받고 미래가 보장되거나 자아실현에 이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선호되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청소노동자의 일이 비록 사회에서 ‘하급 노동’으로 여겨질지라도, 나는 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가족을 부양해온 떳떳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소 노동 환경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폐 사진   그런데, 몇 해 전에 폐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몸이 보내는 이상 신호를 무심히 넘겨왔던 나는, 의사가 보여주는 폐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폐는 내가 지나온 청소 노동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폐 한쪽과 기관지, 림프절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여러 달 극심한 통증과 무력감을 느꼈다.
지켜보는 가족들도 많이 자책하며 함께 아파했다.
퇴원하고 몸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노동 현장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지급하는 청소용품과 권장된 세제 사용량만으로는 낡고 오염된 공간을 닦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권장 사용량을 훨씬 초과해 사용하게 되었고, 그것도 부족하면 개인적으로 세정력이 더 강하고 그만큼 인체에 더 유해한 세제를 구입해 사용하기도 했다.
  석면이 철거되는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치명적인 염소 기체를 과량 흡입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순간들도 떠올랐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대학교이다.
교수들의 퇴직 시기나 학생들의 개강이 시작되면, 감당하기 힘든 양의 책과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몸에 무리가 가는 날들이 쌓였다.
근골격계 통증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라서 무리한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 무지한 동료들의 개입에 의해서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을’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경쟁시키며 관리한다.
중간 관리자들은 우리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갑질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관리자들을 미워하면서도, 나쁜 것을 보고 배워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헐뜯고 이용하며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서열 싸움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싸우기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당장 그만두고 싶어도 더이상 갈 곳이 없는 노동 현장을 떠나지 못한다.
불면의 밤을 지새운 뒤, 동이 트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새벽 출근을 했다.
직장 내 스트레스로 한밤중에 위경련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대학 비정규직 간접고용 노동자’의 투쟁가   입사 초기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를 주저했다.
붉은 투쟁 조끼를 입고 주변의 소음을 뚫고도 남을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조합원들의 모습은, 그동안 내가 순응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31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프레스센터분회 투쟁(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근속연수와 임금협약, 단체협약이 사라져버리는 부당함에 문제 제기하며, 청소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승리를 위한 집중집회에서 발언하는 필자(이애경) 모습. [출처-이애경 제공]     그러나 결국 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일하면서 경험한 여러 부조리한 상황들 때문이었다.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을 겪어야 했고, 관리자의 갑질, 동료가 동료에게 부당한 압력과 강요를 하는 상황도 보았다.
노동자 간의 크고 작은 불평등과 갈등으로 인해 직장 내에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경험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노동자의 입장을 사측을 상대로 전달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조직, 동시에 노동자들 간의 문제를 논의하고 중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평생의 노동 이력을 펼쳤을 때, 한 회사에서 2년을 버티기 힘들었던 내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십수 년 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의논할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했다.
  작년부터 나는 노동조합에서 학내 비정규직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부지부장)을 맡고 있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한 저항심은 있었지만,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나도 모르는 사이 ‘노조’ 그리고 ‘투쟁’이라는 단어들이 불온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숨죽이며 살아가도록 길들여졌다는 것을.   이제 나는 동료 조합원들과 함께 붉은 조끼를 입고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목소리 높여 부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우리 청소 노동자들에겐 대부분 개인적인 명예도, 유명한 이름도 없다.
누구처럼 땅바닥에 내팽개쳐질 명예도 없고, 전 국민이 다 아는 치욕스러운 이름도 없다.
뇌물로 받은 명품백도, 특검이 들이닥칠 고급 아파트도 없다.
  빵과 장미   작년에 조합원들과 함께, 한 달에 식대 2만 원을 올리자고 몇 달을 투쟁했다.
학내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했고,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얻었다.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도 하였고, 14개 대학 이상이 연대하여 서울 시내로 나가 방송차를 타고 공개 발언도 했다.
  어떤 사람은 “가성비 떨어지는 소모전”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사람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작년에 그토록 어렵게 투쟁해서 한 달 식대 2만 원 인상을 얻어냈지만, 우리의 살림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도 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단지 얼마의 수치로 평가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에 대한 외침이라는 것을!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내 아이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젊은 노동자들을 자주 떠올린다.
나는 그들이 나처럼 노동의 상처를 새기며 살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빵만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보다, 장미를 누릴 권리를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노동이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고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존엄하게 빛내는 과정일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폐에 새겨진 검은 얼룩은 지나온 시대의 흔적이지만, 다음 세대의 삶은 보다 맑은 색채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대학 청소노동자의 폐에 새겨진 검은 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