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
<편집자주> MBC 뉴스데스크 캡처 2004년 11월 6일. 대구와 경산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연쇄 방화사건의 범인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범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와 아들로 다섯 달 동안 대구 전역을 돌며 빈집을 털고 옷가지에 불을 붙인 범죄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119죠? 또 불이 났어요”…의문의 화재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대구 시내와 인근 경산 곳곳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가 잇따랐다.
불은 대부분 오전, 주인이 집을 비운 시간대에 발생했다.
불길이 번진 집은 하나같이 노인이나 독거인이 사는 낡은 단독주택이었다.
안방과 거실에는 태워진 옷더미가 남아 있었고, 식용유와 간장, 식초, 밀가루 등 조리용품이 불쏘시개처럼 뿌려져 있었다.
일부 현장에서는 용변을 본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처음엔 전기 합선이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피해 주택마다 문이 부서져 있고 귀금속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경찰은 연쇄 방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화재는 6월부터 10월까지 24차례 발생했고, 피해액은 6억 원에 달했다.
피해자 다수는 부동산 벽보를 내거나 집을 내놓은 적이 있었고, ‘방을 보겠다’는 전화를 받은 직후 화재를 당했다.
범인은 집 구조와 가족 구성원을 확인한 뒤, 주택이 비어 있을 때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MBC 뉴스데스크 캡처 ◇ “엄마, 도망쳐!” 추격 끝에 드러난 모자의 얼굴 = 11월 6일 새벽 2시쯤, 경산시 하양읍의 한 여관 앞에서 경찰이 수상한 남성을 검문했다.
젊은 남성의 여행가방에서는 라이터, 식용유통, 귀금속, 생활용품이 함께 발견됐다.
남성은 24세 박모 씨로,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신분 확인이 즉시 이뤄지지 않았다.
조사 결과, 그의 68세 어머니 김모 씨 역시 함께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절도를 저지른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검거 과정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검문 중이던 대구 남부경찰서 봉천지구대 김상래 경장(36)이 범인 박씨의 흉기에 찔려 순직한 것이다.
김 경장은 범인에게 중상을 입고도 끝까지 추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동료들의 지원으로 모자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김 경장은 세 자녀를 둔 아버지로, 대구 시민들의 애도 속에 영결식이 치러졌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들킬까 무서워 불을 질렀다.
” =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가족의 배경은 사건의 충격을 더했다.
모자는 모두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로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무적자'였다.
김씨는 1970년대에 주민등록이 말소됐고, 박씨는 출생신고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이 방화 현장에서 확보한 지문이 데이터베이스와 일치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경찰이 이들의 집을 수색하자 박씨의 두 동생이 훔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세 아들의 친부는 전직 경찰로 확인됐다.
그는 혼외 관계로 태어난 자녀들을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결국 세 아들은 교육과 의료, 취업 등 사회 제도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된 채 살아왔다.
김씨는 과거 간호사로 근무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집을 떠난 이후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가족은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며, 호적이 없어 아르바이트나 공장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모자의 방화를 단순히 ‘증거 인멸을 위한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반복된 방화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 존재를 증명하려는 심리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들이 훔친 물건에는 금품 외에도 주민등록증, 도장, 대학 졸업 메달, 수첩 등 ‘사회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포함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훔치고 싶었던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에게 없던 평범한 삶의 흔적이었을 수 있다”고 했다.
◇ “감옥에서야 이름을 얻었다”…무적자 가족의 역설 = 재판부는 아들 박씨에게 무기징역을, 어머니 김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범행이 이뤄졌다는 점은 참작할 수 있으나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를 불안에 빠뜨린 중대한 범죄”라며 “방화의 고의성과 범행 횟수를 고려하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판 과정에서 모자와 가족은 호적을 회복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감옥에서야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이후 김씨는 출소 후 두 아들과 함께 경산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비우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현재까지 가족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불붙은 집에는 노인들이 살고 있었다"…대구 불바다 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