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앤 불린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일부 확대), 16~17세기경, 패널에 유채, 54.3x41.6cm, 국립 초상화 미술관
역사편 156. 앤 불린
‘천일의 앤’,
그녀에게 달라붙은
논란과 의혹의 이야기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
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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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왕에게 편지를 쓴 ‘죄수’ 왕비
에드워드 매튜 워드, 왕비의 계단에 있는 앤 불린, 1871, 캔버스에 유채, 130.8x157.5cm, Sunderland Museum and Winter Gardens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앤 불린
은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고개를 들었다.
런던탑이 보였다.
하얗게 칠해진 빽빽한 벽, 주변을 맴도는 까마귀들.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변할 리 없었다.
그사이 달라진 건 앤, 본인 처지뿐이었다.
앤은 눈을 감았다.
옛일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근 3년 전인 1533년 6월.
앤
은 그날도 이곳에 있었다.
맑은 눈 주위로 짙은 화장을 한 채였다.
얇은 허리를 돋보이게 하는 우아한 드레스까지 입은 모습이었다.
지금
앤은 처량한 죄수지만, 그때 그녀는
막강한 힘을 쥔 왕비
였다.
당장의
앤은 탑에 감금되기 위해 끌려가고 있지만, 당시 그녀는 정식 대관식 전 이곳에서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렇다.
앤은
권력 정점에서 순식간에 추락한 것이었다.
모두가 고개 숙인 유력자에서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를
반역자
로.
앤은 현실로 돌아왔다.
한숨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속 지옥의 문, 그곳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뒤집어쓴 죄에 대해) 뭘 써야 할지,
뭘 변명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전혀 모르겠습니다.
탑 안에도 밤은 찾아왔다.
앤은 창문 틈 달빛 아래서 이런 편지도 썼다.
그녀의 남편,
헨리 8세
에게 부치는 글이었다.
헨리 8세.
그는 한때 앤에게 “그대를 아내로 삼을 수 있다면 불 속에서도 꽃을 건져오겠다”고 약속한 남자였다.
“나의 연인이자 벗. 그대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쓰라림이 너무도 크구려.” 이처럼 절절한 문장도 쓰던 사내였다.
데이빗 윌키 윈필드, 앤 불린의 체포, 1860
그랬던 그가
결혼 후부터 태도를 바꿨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살결만 닿아도 인상을 쓰고, 아예 보란 듯
앤의 시녀와 놀아나기도 했다.
앤은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바로잡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난데없이 간통죄에 내몰렸다.
무언가 손 쓰기도 전에 벌어진, 갑작스럽고도 뜬금없는 죄목이었다.
그녀는 왕을 성적으로 배신했다고 해
대역죄마저 뒤집어썼다.
귀족, 시인, 음악가,
심지어는… 혈육인 남동생.
무려
왕비 신분으로 이런 남자들과 한 이불을 덮었다는 악담에도 둘러싸이고 말았다.
헨리 8세 주도든, 그의 측근이 짠 설계든, 어딘가 흑막(黑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앤은 곧 본인 신변을 위협할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기는 했었다.
다만, 그게 이렇게 빠르고 가차 없이 벌어질 건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턱 끝까지 늪에 빠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건 모함이에요!”
절규와 호소뿐이었다.
앤은 소문을 맞닥뜨린 날부터 런던탑에 들어온 이 순간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돌아오는 건 낮은 천장이 뱉어내는 메아리밖에 없었다.
에두아르 시보, 런던 탑에 갇힌 앤 불린, 1835, 캔버스에 유채, 162.5x129.4cm, 롤랭 박물관
에두아르 시보의 <런던탑에 갇힌 앤 불린>을 보면 당시 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두 여인이 보인다.
이들은 각자 방식으로 절망한다.
둘 중에는 넋을 놓고 무릎마저 꿇은, 보다 화려한 차림새의 여성이 앤이라는 게 예술계 중론이다.
매 순간 절규를 이어가던
앤
은 지쳤다.
억울해할 힘도 없을 만큼 기운이 빠졌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꾹 다문 채 견뎌본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텨본다.
하지만 보는 이는 안다.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가다 못해 잿더미가 됐다는 걸.
톡 건드리면 쓰러져 혼절하고 말리라는 걸.
앤에게 남은 건 재판뿐이었다.
앤은 어떤 처분을 받을까. 그녀는 끝내 어떤 최후를 맞을까. 이보다 앞서, 앤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짓을 벌인
헨리 8세
는 왜 이토록 매몰차게 등을 돌렸을까.
이것은 영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지금도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재해석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캔들이기도 하다.
왕마저 반한 매력녀,
대관식의 꿈을 꾸다
대니얼 매클라이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첫 대화, 1836
내 정부(情婦)가 돼주겠소?
시간을 거슬러 1526년, 2월에서 3월 사이.
헨리 8세
는 아직 시녀였던
앤
을 끌어안듯 붙든 채 말했다.
“우리는 이미 몇 년간 봐왔소. 그대 또한 내게 호감이 있지 않소?” 헨리 8세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말을 덧붙였다.
헨리 8세는 묵직한 왕이었다.
188㎝의 키, 호남(好男)형 외모에 서른다섯 살 먹은 혈기 왕성한 몸을 가진 자였다.
이는 그가 자신 있게 대시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래. 네가 어떻게 나를 거절할…
한스 홀바인, 헨리 8세, 1540~1547, 캔버스에 유채, 239x134.5cm, 워커 미술관
중년의 헨리 8세를 그린 초상화. 언뜻 봐도 거구임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헨리 8세는 의외로(?) 미소년이라고 불릴 만큼 외모가 출중했다.
마상 시합 중 다리를 다친 뒤 살이 급격하게 불기 시작했다.
노년에는 몸무게만 180㎏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정부가 되는 건 싫습니다.
”
헨리 8세는 앤의 재빠른 응수에 당황했다.
“그렇다는 건?”
“정식으로 결혼을 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기꺼이 그대의 여자가 되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앤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제 몸도 영영 가지실 수 없을 겁니다.
”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곤 고개를 숙인 채 물러섰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도도하게 퇴장했다.
정식 결혼?
그 말은, 지금 아내와 이혼부터 하고 구애하라는 뜻인가.
남겨진 헨리 8세는 앤의 도발에 입맛을 다셨다.
거래 내지 외교로 치면 치욕스러울 만큼 완벽한 패배였다.
그는 그러고도 앤을 놓아줄 뜻이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품에 안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매력 넘치는 여성이었기에.
조지 크루익생크,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화해, 19세기경, 에칭화, 미국 의회 도서관
이렇게 왕을 완전히 홀려버린 여인,
앤 불린
은 외교관의 딸이었다.
출생 추정 연도는 1501년 또는 1507년. 태어난 곳은 영국 노퍽주였다.
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에서 살았다.
그러다 프랑스 궁정에서 예법을 익힐 기회도 얻었다.
앤은 곧 국어와 사교술은 물론 춤, 노래, 악기 연주 등 각 분야에서 실력을 쌓았다.
그렇게 일종의 영재 교육을 받은 후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녀 나이는 열다섯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앤은 패션과 문화 산실로 유명한 이웃국 왕실의 몸가짐을 품고 온 소녀였다.
신비로운 검은 머리카락, 깊은 까만색 눈동자와 가무잡잡한 피부 등 이국적 분위기를 품은 아이였으며, 새침한 인상 뒤 따라오는 활기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우아한 걸음걸이와
최신 스타일의 옷,
(…)훌륭한 노래와 춤,
악기 연주 실력에
(…)재치와 순발력도 있다.
앤은 어느덧 이런 평이 따라붙을 만큼 매력녀가 돼 있었다.
프랑스 왕실 유학파인
앤
이 잉글랜드 궁정에 들어가지 못할 리 없었다.
작자미상, 아라곤의 캐서린(추정), 18세기경, 패널에 유채, 55.9x44.5cm, 국립 초상화 미술관
앤은 곧
헨리 8세의 아내이자 국가의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시녀로 일할 수 있었다.
이때가 1522년께였다.
앤은 본인 뜻과 상관없이 끼를 흘리고 다녔다.
유력 가문과 두어 번 혼담도 오갔다.
누가 저 반짝이는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이는 초미 관심사였다.
거기에
은근슬쩍 몸을 밀어 넣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헨리 8세였다.
사실, 헨리 8세 또한 진작부터 ‘엘레강스’한 앤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情婦) 제안을 한 것이었다.
“나를 왕비로 삼을 게 아니면 싫다”는 말로 보기 좋게 거절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눈치 빠른 앤은 알고 있었다.
표현이 좋아 왕의 정부일 뿐, 이는 언제 교체될지 모를 위험한 자리라는 걸. 앤은 매력녀임과 동시에 야망녀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고민 끝에
도출한 답이 정식 결혼이었던 것이다.
수장령까지 선포하고…
결혼,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헨리 넬슨 오닐, 헨리 8세와의 이혼(결혼 무효) 소송에서 변론하는 아라곤의 캐서린, 19세기경
결과적으로
헨리 8세
와
앤
은 1533년 1월께, 부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왕비의 시녀였던 앤이, 왕비 캐서린을 내몰고 새로운 왕비로 오르는 순간이었다.
헨리 8세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캐서린
과 이혼(정확히는 결혼 무효) 절차부터 밟았다.
강하게 저항하는 캐서린을 무시한 채였다.
당시 헨리 8세는 종교 관계상 로마 교황청 승인을 받아야 캐서린과 완벽히 갈라설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를 안 헨리 8세는 곧장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허락을 청했다.
하지만 교황은 요청을 받고도 묵살했다.
억지에 가까운 사유서도 문제였지만, 교황 입장에선 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캐서린.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
였다.
이런 구도 속 그가 헨리 8세 편을 들면, 자칫하다간 캐서린에 이어 카를 5세의 심기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아무리 교황이라 한들, 그 시절 맹위를 떨친 합스부르크 가문 수장을 자극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라슬렛 존 포트, 헨리 8세와 그의 의회 앞에 비난 받는 아라곤의 캐서린, 1880
결국 판결을 둘러싼 공방은 7년간 이어졌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분노한 헨리 8세는 결과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우선 앤과 비밀 결혼식부터 올렸다.
곧장 수장령도 선포했다.
이는 교황이 아닌, 우리네 국왕(즉 본인)을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 유일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두겠다는 법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심판자가 될 테니, 로마 교황청은 더는 ‘우리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
이런 뜻이었다.
사실, 헨리 8세가 초강수를 둔 배경에는 앤과의 낭만적인 이유 아닌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헨리 8세는 앤도 앤이지만, 이제는 본인을 빼닮은 아들을 보고 싶었다.
왕위를 이어받을 정통성 있는 세자를 안고 싶었다.
헨리 8세는 어느덧 마흔 중반에 이르렀다.
그런
그에게는 아직
아들이 한 명도 없었다!
안토니스 모르, 메리 1세 초상화, 1554, 패널에 유채, 109x84cm, 프라도 미술관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 출생한 메리 1세. 훗날 ‘피의 메리’라는 살벌한 별명을 얻게 되는 그 여왕이다.
캐서린
은 그간 여섯 번의 임신을 했다.
딸 메리(훗날 메리 1세) 말고는 모두 성치 않은 최후를 맞았다.
이런 만큼, 헨리 8세는 이제
앤
에게 희망을 걸 마음이었다
. 앤은 캐서린보다 열댓 살은 어렸으니, 앞으로 출산 기회도 더 많을 게 분명해 보였다.
수장령 후 캐서린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헨리 8세는 곧장 앤의 왕비 대관식을 주최했다.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은 앤은 이날 두 손으로 자기 배를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앤은 벌써 헨리 8세의 아이를 배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아들만 나오면 이대로 ‘게임 끝’이었다.
“공주 낳았으니 곧 왕자도!”
하지만, 하지만 계속해서…
작자미상, 엘리자베스 1세, 1575, 패널에 유채, 113x78.7cm, 국립 초상화 미술관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영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군주다.
아버지 헨리 8세를 닮았는지 무척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1533년, 9월. 앤은 아이를 낳았다.
성별은…
여자.
앤과 헨리 8세, 심지어 궁정의 광대와 점성가들까지 아들이 태어날 것을 확신했지만,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앤은 볼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얼굴이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히 일그러졌던 것을.
공주를 낳았으니 곧 왕자도 낳을 거요!
앤은 헨리 8세가 웃으며 꺼낸 말 사이사이 박힌 조바심도 감지할 수 있었다.
왕자가 탄생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왕가는 미리 공식 문서까지 쓴 상황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프린스(왕자·prince)’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딸의 탄생 후 급하게 ‘s’ 한 쌍이 더해진다.
‘프린세스(공주·princess)’로. 왕가는 딸 이름을 엘리자베스(훗날 엘리자베스 1세)로 지었다.
칼 폰 필로티, 울지 추기경의 무도회에서 앤 불린에게 구애하는 헨리 8세, 1886, 패널에 유채, 44x57cm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앤
은 재차 임신했다.
하지만 유산…. 곧 다시 임신했지만, 이번에도 유산….
임신과 유산을 되풀이한 전 왕비, 캐서린과 같은 행보였다.
이쯤 되면 헨리 8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길 법도 하지만, 당시 비난 화살을 맞는 건 앤이었다.
이런 가운데, 앤은 드디어 또 한 번 임신에 성공했다.
앤은 이때부터는 오직 안정만 취했다.
그녀의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불안과 초조, 잦은 임신과 유산 탓이었다.
그런 앤 앞에 예상치도 못한 소식이 놓였다.
헨리 8세가 창 시합 중 낙마해 의식을 잃었다는 얘기였다.
앤은 이 말에 놀라 하혈했고, 결국 애지중지 모신 태아마저 또 잃었다.
한스 홀바인, 제인 시모어, 1536~1537, 오크 패널에 유채, 65.4x40.7cm, 빈 미술사 박물관.
제인 시모어는 앤 불린 이후 헨리 8세의 세 번째 아내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에드워드 6세)을 낳는다.
이 일이 아니라 앤이 그저 화를 참지 못해 유산하고 말았다는 말도 있다.
헨리 8세가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
를 무릎에 앉히고 몰래 노는 꼴에 격정을 참지 못했다는 설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앤의 뱃속에서 죽은 아이는 기록에 따르면
“약 15주가 됐으며, 아들처럼 보였다.
”
앤은 그렇게 마지막 구세주를 잃었다.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가 보오.”
헨리 8세
의 한탄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앤보다 어린
여인
제인
에게 헨리 8세가 보다 대놓고 애정을 표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앤을 위해 캐서린을 버렸던 헨리 8세는 이제 제인을 위해 앤을 버릴 모습이었다.
1536년. 마흔 중반조차 꺾인 헨리 8세에게는 광기가 깃들고 있었다.
그의 타고난 성적 욕구, 아들을 얻기 위한 맹목적 염원이 과격한 선택을 부추겼다.
앤의 정적(政敵)들 또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지금껏 앤은 남편을 등에 업고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서투른, 다소 엇나간 결정도 여럿 내렸다.
측근을 지나치게 감싸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의 정치적 적들은 이러한 앤의 행보에 불만을 품고 모인 무리였다.
윌리엄 파웰 프리스, 윈저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고 있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1903, 캔버스에 유채, 46x38cm, 개인소장
헨리 8세와 앤 불린이 사냥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앤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헨리 8세가 목표물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그녀를 위해 헨리 8세는 직접 수풀도 걷어내고 있다.
이런 때도 있었는데.
…저놈들을 단박에 제압하기 위해선 이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앤은 매일 밤 기도했다.
반전은 없었다.
승리의 여신도, 행운의 여신도 끝내 그녀 편에 서지 않았다.
헨리 8세
또한 두 여신처럼 냉정했다.
온갖 남자와 한 침대를 썼다느니 하는 괴소문에 둘러싸인 앤이 런던탑에 잡혀가든, 거기서 감금되든 상관없었다.
이제 헨리 8세 입장으로 보면 앤은 죽어야 했다.
그래야 귀찮은 무효니, 이혼이니 하는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곧장 제인과 세 번째 결혼식도 치를 수 있었다.
앤, 그 여자?
내게 유혹의 마법을
걸었던 거야.
그는 앤의 호소문 앞에서 이 따위 말이나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악녀, 괴물…
‘천일의 앤’의 마지막 모습
윌리엄 호가스, 앤 불린에게 궁정을 소개하는 헨리 8세, 18세기경
내가 임신하기 위해 남동생
조지 불린
과 근친상간했다?
간통에 대한 갖은 루머 속에서도 앤이 특히나 참을 수 없는 건 이 괴소문이었다.
앤은 런던탑에 갇힌 짧은 기간 사이 왕을 속이고 시해까지 하려고 한 악녀가 돼 있었다.
인륜이고 뭐고 상관없이 오직 음란만을 좇는 괴물이 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 왕의 궁정 음악가였던 마크 스미턴은 본인이 앤의 정부였음을 고백했다.
이는 참담한 고문 틈에서 토해낸,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자백이었다.
이 밖에도 간통과 관련한 여러 의혹은 무작정 진실의 탈을 썼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지금에 와서 앤의 결백 여부를 가릴 수는 없다.
다만 앤에게는 깊은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 앤의 빡빡한 왕비 일정 중 외간 남자와 밀회를 즐길 만큼의 틈은 많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그녀를 향한 혐의는 과장 내지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당장
앤의 남동생
조지
또한 갖은 협박에도 의혹을 끝까지 부인했으니.
그러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조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목이 잘렸다.
툭.
이는 그의 잘린 머리통이 내는 소리였다.
앤이 힘겹게 붙들고 있던, 삶의 의지가 끊어지는 소리기도 했다.
에메 브뢴 페이지(Aimée Brune-Pagès), 앤 불린의 유죄 판결, 1832, 캔버스에 유채, 100.5x82cm, 피카르디 미술관
끝내 사형 판결을 받은 앤 불린이 결과에 체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앤은 그녀에게 안겨드는 딸,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신하와 시녀는 슬픔에 좌절하는 모습이다.
1536년, 5월 19일. 런던탑에 갇힌 뒤 열일곱 일이 흐른 때이자, 조지가 죽고 겨우 이틀이 지난 날.
앤은 또 한 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이는 그녀가 볼 수 있는 마지막 푸르름이었다.
“여러분. 저는 율법을 반대하지 않겠어요.”
앤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 자비로운 군주는 없었어요. 그는 저에게 언제나 선하고, 온화한 군주였습니다.
(…)”
연설을 마친 앤은 처형장에 바짝 붙었다.
이번 사형 집행인의 실력이
아주 좋다고 들었어요.
그저 제 목이 짧을 뿐이에요.
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목에 손을 댄 채 옅게 웃었다.
그녀는 머리 장식을 풀고, 흰색 담비 망토도 벗었다.
뒤늦게 울음 터진 시녀들을 차례로 다독였다.
앤은 무릎을 꿇자 시녀가 안대를 씌웠다.
앤은, 그제야 몸을 가늘게 떨었다.
“신이시여, 제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녀는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 이 말만 되풀이해 읊었다.
숨진 당시 나이는 서른다섯 또는 스물아홉이었다.
작자미상, 왕비 앤 불린, 1626년전, 오크 패널에 유채, 56.7x42.2cm, Dulwich Picture Gallery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
이날 이후 사람들은 앤에게 이런 별명을 붙였다.
1000일은 헨리 8세와 앤 사이 결혼 기간을 따져 나온 숫자였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매년 앤의 처형 날이 되면 런던탑에서 잘린 제 목을 들고 다니는 유령 앤을 볼 수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앤을 다시 소환했다.
5세기가 흐른 지금도 앤에 대해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 연극과 뮤지컬,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앤의 삶은 끝없이 기구했다.
행적과 정치력에 대해 논란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끝까지 매력녀의 본분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수 세기 동안 그렇게 많은 이의 흥미를 끌고 매료시킨 왕비는 많지 않다.
앤 불린은 확실히 그들 중 한 명이다.
” 2021년, ARTUK는 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참고 자료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주경철, 휴머니스트
헨리 8세와 여인들, 앨리슨 위어, 루비박스
기자의 말풍선
초등학생 친구와 같은 카드 뒤집기 놀이를 했어요. 진심으로 임했는데 졌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제가 아직도 봐준 걸로 알고 계세요. 아닌데….
“저도 딸 낳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아들 집착’ 막장 남편, 눈빛 돌변했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앤 불린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