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의 생명체인 ‘씨알’이 자라나는 자연의 순환 원리에 입각해서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입니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천(章川) 김성태 작가의 ‘나랏말글씨’ 전시회에 가보면 한알의 씨앗에서 꿈틀거리며 한글이 탄생하고 자라난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김 작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대왕의 밝힌 한글 창제의 철학과 원리를 자연도감에서 식물이 탄생하고 자라는 그림을 보는 듯한 작품으로 표현해냈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했나봅니다.
정통 서예가 출신으로 국내 1세대 캘리그라피 작가인 김 작가는 영화 ‘서울의 봄’을 비롯해 KBS ‘태종 이방원’, ‘전설의 고향’, ‘한국인의 밥상’, ‘명견만리’, ‘진품명품’ 등 수많은 드라마, 영화, 교양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써온 작가입니다.
한글과 한문을 넘나들며 기운생동하는 서체 예술을 선보였던 김 작가의 이번 전시회는 그야말로 파격적입니다.
‘문장의 시냇물(글내)’이라는 뜻의 ‘장천(章川)’이라는 호처럼 아름다운 글귀를 써온 그의 작품에서 문장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글씨 하나하나가 문자조형 예술작품이 됐습니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지만,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서체의 힘에 한없이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가 훈민정음해례본을 깊이 연구한 끝에 ‘문자조형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한글의 탄생과정을 그의 해설과 함께 따라가보았습니다.
태초에 한알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만물의 씨알(Seed Core)은 남녀, 암수, 즉 ‘음양(陰陽)의 조화’ 속에 탄생합니다.
씨알을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오른쪽 두 번의 둥근 획으로 돼 있습니다.
음양을 표현했네요. 문자로 만들어지기전, 태초의 씨알이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입니다.
씨알에서 수많은 점들이 알처럼 깨어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씨알에서 태어난 생명체는 만물이 됩니다.
우리나라 한글에는 ‘씨’라는 말이 참 많습니다.
말씨, 글씨, 마음씨, 솜씨, 맵씨, 새아씨… 말씨에서는 말이 자라고, 글씨에서는 글이 자랍니다.
마음씨에서는 예쁜 마음이 자라고, 솜씨에서는 손재주가 자라납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작은 씨알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수없이 태어난 씨알들은 서서히 공간이 확장되면서 천지인으로 구분이 됩니다.
천(天)은 하늘이면서 양(陽)이고, 지(地)는 땅이면서 음(陰)이고, 인(人)은 하늘과 땅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자, 만물입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이러한 ‘천지인(·, ㅡ, ㅣ)’의 원리에 따라 모음(母音)을 만들었습니다.
‘·’는 하늘(天)의 둥근 모양을 상징하고, ‘ㅡ’는 땅(地)의 평평한 모양을 상징하고, ‘ㅣ’는 꼿꼿이 서 있는 사람(人)의 모양을 상징한 것이죠. 이러한 천지인 원리는 삼성 갤럭시 휴대폰의 글자입력 시스템으로도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천지자연의 소리(聲)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채(文)가 있는 법이니, 옛사람이 소리를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만물의 뜻을 통하며 그것으로 천지인 삼재(三才)의 이치를 실었다.
(…) 간단하고도 요령이 있으며, 정밀하고도 잘 통한다.
그러므로 슬기 있는 이는 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넉넉히 배울 것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이제 씨알이 땅 속에서 비집고 올라와 가지가 돋아납니다.
씨앗이 땅 위로 가지가 되어 올라와 세로획이 되고, 땅 속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며 가로획이 됩니다.
씨알에서 시작된 한글은 가로획과 세로획이 생겨나면서 모음의 형태를 갖추려하고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옆으로 위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음과 자음의 형태로 자라날 것입니다.
나뭇가지 위로는 하늘도 펼쳐집니다.
천지인의 원리는 ‘초성(하늘)’, ‘중성(사람)’, ‘종성(땅)’으로도 확장됩니다.
땅과 하늘이 함께 어우러져 순환을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천체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닮았습니다.
혼천의도 음양오행, 천지인의 원리를 통해서 만들어졌지요. 하늘(·)과 아래 땅(ㅡ)이 만나서 땅 위에 하늘이 있으니 양(陽)이고 음은 ‘오’가 됩니다.
위에 땅(ㅡ)과 아래에 선천(先天) 하늘(·)이 만나서 땅 아래에 하늘이 있으니 음(陰)이고 음은 ‘우’가 됩니다.
발음을 해보면 ‘오’는 밝은 느낌이 나고 ‘우’는 어두운 느낌이 납니다.
문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기호처럼 그린 작품입니다.
가운데 있는 둥그런 호는 씨알입니다.
아랫쪽에 있는 두껍고 짙은 획은 땅이고, 위에 있는 얇고 밝은 획은 하늘입니다.
씨알을 중심으로 사람(人)과 만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늘과 땅, 사람이 순환하면서 자음들이 하나둘씩 태어나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하는 소리와 함께 모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글자는 사람의 입을 통해 터져나오는 말씨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를 기록하는 글씨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와 깊은 교류를 맺고 있는 배일동 명창(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이수자)의 깊은 울림통에서 터져나오는 ‘아~’ 소리를 듣는 듯하네요. 왼쪽에 사람(l)과 오른쪽에 하늘(·)이 만나니 오른쪽에 하늘이 있어 양(陽)이고 음은 ‘아’가 됩니다.
‘어~!’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왼쪽에 하늘(·)과 오른쪽에 사람(l)이 만나니 왼쪽에 하늘이 있어 음(陰)이고 음은 ‘어’가 됩니다.
발음을 해보면 ‘아’는 밝은 느낌이 나고 ‘어’는 어두운 느낌이 납니다.
이처럼 음양의 철학적 이치와 모음 발음 소리의 음양이 똑같습니다.
​ “글씨를 쓸 때 붓글씨와 볼펜글씨가 다릅니다.
볼펜 글씨는 일차적인 선묘만 긋고 가지만, 붓글씨는는 3차원의 공간미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붓글씨 서예가 어려운 것입니다.
판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가요와 민요는 일차원적인 선형적인 말씨라고 한다면, 판소리는 ‘아~~~~’하는 소리의 강약과 깊이가 엄청나게 변화무쌍해 공간미가 있습니다.
판소리에서는 성음 놀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붓글씨하고 판소리는 한글의 말씨와 글씨를 표현하는 미학에 있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죠.” (배일동 명창) ​ ㅏ, ㅓ 모음은 ㅑ, ㅕ 등의 형태를 갖추면서 더욱 발전합니다.
이처럼 천지인이 가로와 세로로 만나고, 모음 속에서 자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을 하면서 계속해서 언어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 세월이 흐르면서 세개의 자음(ᅙ,ᅀ,ᅌ)이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글 자음 창제의 원리를 한 눈에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인데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한글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세로획은 천지인의 사람입니다.
목청소리 글자인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목구멍 쪽에서 ‘ㅇ’이 써 있죠. 어금닛소리 글자인 ‘ㄱ’은 혀의 안쪽이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혓소리 글자인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잇소리 글자인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입술소리 글자인 ‘ㅁ’은 입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ㄱ’에서 ‘ㅋ’이 나오고, ‘ㄴ’에서 ‘ㅌ’이 생성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한글 자음의 기본형인 ㄱㄴㅁㅅㅇ의 형태는 ‘천지인 원(O)·방(□)·각(△)’의 형태에서 나왔습니다.
ㄱㄴㅁ은 방(□)에서, ㅅ은 각(△)에서, ㅇ은 원(O)에서 온 형태입니다.
ㄱ에서 ㅋ, ㄲ이 나왔고 ㄴ에서 ㄷ과 ㄹ, ㄸ이 나오고 ㅁ에서 ㅂ, ㅍ, ㅃ,이 나오고 ㅅ에서 ㅈ과 ㅊ, ㅉ이 나오고 ㅇ에서 ㅎ이 나와서 모든 자음이 원방각 천지인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방각의 ‘O △ □’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습니까? 동그라미, 세모, 네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경비병들의 얼굴 가면 위에 쓰여진 표시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한글의 창제원리 중 하나인 ‘천지인 원방각’의 표시가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네요. ‘옴’과 ‘움’은 천지인 원방각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한글 창제원리가 가장 잘 보여지는 글자입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는 “움은 씨를 감싸고 있는 자궁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말했습니다.
땅의 아래로 음(陰)의 세상에 있는 네모난 상자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자궁입니다.
하늘은 둥글고(ㅇ), 땅은 모가(ㅁ) 났습니다.
하늘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땅(ㅁ)으로 내려오는 형상을 모음 ‘ㅜ’자가 양팔을 벌려 ‘ㅁ’자를 품에 안은 듯한 글의 형상이 ‘움’입니다.
반면 ‘옴’은 땅(ㅡ)의 생명들이 마치 움을 틔우고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펴는 형상입니다.
옴은 ‘피어나오다’는 뜻으로 양(陽)의 기운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움의 ‘이응’자는 검게 닫혀 있고, 옴의 ‘이응’ 자는 가운데가 열려 있습니다.
김 작가는 “표음문자로 알려진 한글이 사실은 한자처럼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도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글씨입니다.
김 작가가 쓴 ‘여유’라는 글씨는 넓은 탁자 위에 동그라미와 가로획, 세로획만으로 안정적인 건물을 세워놓은 듯한 느낌이네요. ‘나랏말글씨’ 전시회에서 또하나의 감상할 만한 부분은 바로 먹색입니다.
탁한 먹색이 없습니다.
‘먹=검정색’이라고 알고 있는 고정관념을 깹니다.
맑은 담묵(淡墨), 짙은 농묵(濃墨), 갈아서 하룻밤을 묵힌 ‘숙묵(宿墨)’까지…. 다양한 발묵(潑墨)을 보여줍니다.
김 작가는 “진정한 검정은 검정 속에 있는 하얀색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먹은 검정이라는 단색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검정색이 스펙트럼을 넓혀 최대한 담백한 먹색을 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필력이 제대로 살아났을 때, 진한 검정새보다 맑은 검정색이 훨씬 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맑은 검정색이야말로 가슴에 빨리 스며드는 찐 검정이라 생각합니다.
” 한글로 된 서예작품은 글로벌 미술시장으로의 진출에 언어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장에 담긴 내용까지 이해해야 비로소 완전한 작품 감상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랏말글씨’에서 전시된 작품은 서예작품이라기 보다는 문자를 소재로 한 조형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씨알과 새싹, 나무와 태양, 하늘과 땅과 같은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담은 철학적, 추상적 현대미술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연숙 무우수갤러리 관장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원리가 밝혀진 한글에 담긴 심오한 철학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낸 작품”이라며 “한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득음을 위해 한글 서예를 연구해 온 소리꾼 배일동 명창 “우리의 소리는 형체가 없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글씨는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기하학적 공간이 있습니다.
말씨가 가지고 있는 음운을 그대로 기호로 보여주기 때문이죠. 장천 작가의 붓글씨가 아름다운 것은 기하학적 공간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요.” 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린 장천 김성태 작가의 ‘나랏말글씨’ 전시회에서는 배일동 명창(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의 축하공연으로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배 명창은 저서인 ‘득음’에서 우리 소리의 원리와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했는데요. 그는 “어릴적부터 붓글씨에 태생적인 끌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판소리의 원리를 깨닫기 위해서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평생 공부해왔다”고 합니다.
“말을 길게 하는 것이 소리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엄마 자궁과 같은 움에서 극성이 다른 음양 두 씨가 만나서 합을 이루어야만 새 씨가 탄생합니다.
한 음절의 말씨와 글씨가 만들어지려면 극성이 다른 초성(初聲)과 종성(終聲)의 두 자음씨가 엄마 자궁과 같은 모음에서 만나 합을 이루어야 한 음절에 말씨와 글씨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상하, 좌우, 강유, 경중의 씨를 품은 ‘하늘소리’ 초성과 ‘땅의 소리’ 종성이 중성(中聲) 모음에서 합을 이루어 한 글씨가 생겨나게 되지요.” 배 명창은 “말씨를 어떻게 펼쳐내고, 갈막음하고, 열매를 맺느냐하는 것이 소리와 붓글씨 예술의 핵심”이라며 “판소리와 붓글씨의 미학은 정확히 일치하는 한가지 맛(一味)”이라고 말합니다.
배일동 명창(왼쪽)과 장천 김성태 작가. “종이에 쓰는 글씨는 평면상의 단순한 선면같지만, 거기에는 재량할 수 없는 다방 다면의 입체적인 기하학적 시공이 무수히 펼쳐집니다.
이를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붓 봉에 딸란 수만 개의 붓털을 단호하게 장악하는 용필과 필력이 필요한데요. 장천 작가의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필세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요. 오랫동안 정통 서예가로서 공력을 쌓아오신 분이라 한 획을 그어도 달라요. 오랫동안 수련한 득음의 소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한글 창제의 원리를 담은 ‘나랏말글씨’[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