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에서 바라본 풍경.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계곡을 끼고 걷는 월정사 선재길은 힐링 그 자체다.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이 눈 부셔서” 권총을 들지만, 실은 “뜨거워서”가 아니었을까. 손에 총이 있었다면, 태양을 향해 쏘고 싶을 정도. 태양이 화살처럼 작열해 내리꽂힌다는 게 이런 걸지도. 이런 날씨는 중간에 차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가장 싫어하는 상사와 단둘이 여름휴가를 떠난 느낌이랄까. 그렇게 짜증 반, 화 반으로 도착한 강원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주지 퇴우 정념 스님) 선재길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상사가 갑자기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짜증과 화, 폭염을 모두 데리고. 일주문부터 상원사까지 약 9km의 월정사 선재길은 순례길이자, 각종 문화재와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힐링 코스. 기승을 부리는 폭염과 열대야도 이곳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맥을 못춘다.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지난달 30일 찾은 오대산 선재길은 월정사 일주문 전나무숲길부터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까지 계곡을 끼고 걷는 약 9㎞의 순례길이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울창한 산림 속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계곡물에 취해 걷다 보면 폭염, 무더위, 열대야는 딴 나라 이야기가 되버린다.
이런 인기가 더해져 ‘오대산 천년 숲 선재길 걷기 행사’는 2004년부터 매년 여름 열리고 있다.
한눈팔지 않고 걷기만 하면 보통 약 4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월정사 선재길의 시작인 일주문. 그 뒤로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숲을 이루는 황토길이 펼쳐진다.
현판 ‘월정대가람’은 탄허 스님(1913~1983) 친필이다.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일주문에 서니 장대한 전나무숲이 펼쳐진다.
약 1㎞에 걸쳐 1700여 그루가 있다는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 황토로 길을 조성해 일주문 앞에서 신발을 벗는 이가 많은데, 짙은 피톤치드 향과 함께 걷는 내내 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먹이만 보여주면 쪼르르 다가오는 다람쥐와 함께 걷는 즐거움은 덤. 울창한 산림 속을 걷는 선재길.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전나무숲이 빽빽하게 어우러진 선재길.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선재길의 또 다른 장점은 순례길을 걸으며 중간중간 볼거리가 풍부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에는 팔각구층석탑(국보)과 석조보살좌상(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현존하는 한국 종 중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국보) 등 안 보면 후회할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적광전 앞 팔각구층석탑 앞에 서니 탑에 달린 수십 개의 풍경(風磬)이 바람에 흔들려 청아한 ‘화음’을 낸다.
폭염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고… 극락이 따로 없다.
금강연(金剛淵), 월정사 부도군, 반야연(般若淵)을 지나 상원사로 오른다.
금강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열목어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 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온다”라고 묘사됐던 장소. 반야연의 물이 내려와 모이는 곳이다.
상원사 입구.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새파란 나뭇잎과 대조를 이뤄 장관을 자아낸다.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코스에선 다소 떨어져 있지만, 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를 들러보는 것도 좋다.
한 번 가보면, 왜 이곳에 실록을 보관했는지 느낌이 확 온다.
왜군, 청군, 북한군조차 알고 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 있다.
상원사는 세조가 이곳에 와 피부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상원사 동종이 있는 그곳이다.
그런데 사찰이 계단 꼭대기에 입구가 있다.
너무 가팔라 하늘을 쳐다볼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문이 보인다.
곳곳에 놓여있는 작은 돌탑. 어떤 소원을 빌며 돌을 올렸을까. 평창=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계단 양쪽은 군데군데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다.
벌써 이곳은 가을이 시작된 것일까. 왜 폭염이 여기서는 맥을 못 추는지 실감이 난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는 또 다른 맛. ‘걸어야 한다, 봐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를 때는 안 보였던 게 눈에 들어온다.
“들꽃이 저렇게 많았나?” 아쉽지만 모든 것은 끝이 있다.
일주문 앞, 세워둔 차에 올랐는데 사라졌던 상사가 나타났다.
폭염도 다시 시작됐다.
폭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곳…오대산 월정사 선재길 걸어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