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기획전 ‘형상회로’
사실주의 화법 ‘구상미술’과 달리 자유로운 변형 구사하는 ‘형상미술’
동아미술제 수상 작가 중심으로
독일 거장 바젤리츠 등 17명 참가
볼 수 없는 광경을 그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다 독일 출신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다’(2021년·위쪽 사진)와 한국 작가 정강자의 ‘울지 마’(2015년·아래쪽 사진). 두 작품은 ‘형상 회로’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1층에 나란히 걸렸다.
타데우스로팍·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위아래가 거꾸로 뒤집힌 여성의 커다란 초상화. 그 옆에 나란히 놓인 그림에는 샤워를 하고 있는 여성이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뒤집힌 초상화는 독일 작가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회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거울이 있는 그림은 한국 작가 정강자의 ‘울지 마’다.
두 작가는 위아래가 바뀐 형상, 거울 속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짓 등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을 표현해 자신이 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
이처럼 ‘현실에 충격을 주는’ 형상을 담은 예술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 ‘형상 회로’가 최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미술관의 2025년 하반기 기획전인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형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논한다.
전시는 1970년대 단색화를 중심으로 조명된 추상회화와 민중미술 등 주요 사조에 속하지 않았던 회화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그 출발점이 되는 건 1978년 시작한 ‘동아미술제’다.
당시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형상성’을 화두로 개막했다.
동아미술제가 제시한 ‘형상’이란 용어를 일민미술관은 사실주의적 화법을 지칭하던 ‘구상’과 다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기계 장치 같은 구조물에 기이한 오브제를 결합한 이승택의 대형 설치 작품은 산업사회의 잔해 위에 인간의 흔적이 화석처럼 얽힌 인상을 준다고 해석했다.
또 변종곤의 회화 작품은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이나 신체 일부를 생략하는데, 이런 표현들이 현실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고 봤다.
이렇게 전시엔 변종곤, 이승택, 박장년, 한운성, 곽정명 등 동아미술제 수상 작가를 중심으로 바젤리츠와 마르쿠스 뤼페르츠 등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 공성훈, 정석희, 이제, 박광수, 호상근, 김세은, 심현빈, 나디와 지와, 김현진 등 17명이 참가해 작품 98점을 선보인다.
동아미술제의 유산과 해외 작가, 그리고 최근 활동하는 작가들의 실험 정신이 맞닿는 지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전시가 조명하는 2000년대 이후 한국 미술에선 사진을 재구성하거나 내면의 심리, 동시대의 풍경을 결합하는 회화적 양식이 나타난다.
공성훈 작가의 ‘버드나무’, 이제의 ‘청계천 모뉴먼트’처럼 사진을 토대로 한 그림 작품부터 여러 형상이 복잡하게 얽힌 모습을 담은 박광수의 ‘집 유령 거미’ 등을 볼 수 있다.
전시 제목인 ‘형상 회로’는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현실에 빠르게 불을 밝히는 예술 작품의 모습, 각자가 지닌 저마다의 회로 내부에서 다른 빛을 발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포괄한다.
동아미술제는 1970년대 미술계 인사를 중심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성격과 명칭을 정한 뒤 1978년 출범했다.
신진 작가가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통로가 부족했던 실정에 맞춰, 장르 구분을 최소화하고 작품 규격 제한을 없앴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이르면 대안 공간, 비엔날레, 상업 갤러리들이 등장해 작가들의 활동 무대가 증가했다.
이에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동아미술제는 전시기획 공모로 전환해 운영됐다.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권위 의식에 도전해 미답의 가치를 발굴한 동아미술제의 창설 정신과 시대 변화를 읽고 혁신에 매진한 진지함은 오늘날 일민미술관과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시는 다음 달 26일까지 열린다.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엔 현장 신청자를 대상으로 도슨트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볼 수 없는 광경을 그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