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 간 완충지대 기반 삼은 ‘균세외교’ 주장
美·中 패권다툼 속 ‘몽상’으로만 볼 수는 없어
1975년 4월29일 박정희정부는 시국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여기서 월남사태와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 문제를 거론하며 국론통일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30일 ‘월남정부’가 항복했다는 소식에 야당은 월남 패배의 중요한 원인으로 ‘월남 티우 정부’의 정적 탄압과 부패를 들었다.
정부의 발표문과 결을 달리했지만 결국 반공안보로 수렴되었다.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안보 궐기대회가 연이어 열렸다.
중등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학교 2학년생인 필자 또래들도 시국강연을 자주 접했다.
이런 가운데 ‘보트피플’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나라도 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소련’과 ‘중공’, ‘북괴’에 접하고 있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숙명에 절망하여 신에게 한반도를 미국의 캘리포니아반도 옆으로 옮겨주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소원의 황당성을 알고 있기에 내심 우리나라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국이 되기를 바랐다.
이후 이호철의 소설 ‘판문점’의 줄거리가 생경하게 다가왔지만 분단의 아픔을 간접적이나 느낄 수 있었고 신군부 휴교령 시절에 읽은 최인훈의 ‘광장’이 중립국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이러던 차에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兪吉濬)이 만 29세에 집필한 ‘중립론’(1885)은 ‘서유견문’에 못지않게 나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크게 흔들렸고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인해 정국이 혼돈에 빠져 있는 가운데 집필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지정학적 조건을 유럽의 벨기에 및 불가리아와 비교하면서 조선도 이런 조건을 오히려 열강 사이 완충지대의 기반으로 삼으면서 균세외교(均勢外交) 정책을 펼칠 것을 주문하였다.
아울러 당시 청의 막강한 영향력을 의식하여 중국과의 관계에 중심을 두면서도 청의 부당한 간섭은 비판하였다.
그의 이런 구상은 스승 어윤중의 조선영세중립국 구상과 다르지 않았다.
어윤중의 경우, 조선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고 싶어 했다면 유길준은 벨기에와 불가리아 같은 소국을 지향하였다.
또한 그의 이러한 구상은 정부의 균세외교정책과도 맥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1895), 러일전쟁과 포츠머스조약(1905)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을 대륙세력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아시아의 헌병으로 삼았던 영국과 미국 등 해양세력의 향방이 무엇보다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이런 속성을 교묘하게 활용한 일본의 외교전략이 국가 간 호혜와 협력을 강조하는 ‘선린’과 함께 국제법과 원칙에 따른 평등과 책임을 포함하는 ‘정의’를 신뢰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정부의 균세외교 정책을 국제사회에서 밀어낸 것이다.
따라서 아관파천 직후 오랜 망명길에 올랐다가 고국에 돌아온 유길준에게 남은 길은 어쩌면 순응 그 자체였다.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 역사의 문명성과 한국인의 잠재성을 믿었기에 교육·복지사업, 국문법 연구에 매진하다가 1914년 9월30일 숙환 신장염으로 영욕이 점철된 삶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미·중 패권론이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의 ‘중립론’을 한낱 몽상가의 잠꼬대로 치부할 수 없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김태웅의역사산책] 유길준의 중립론과 격동의 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