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무서운 진화’] <10>
‘피싱 범죄와의 전쟁’ 대만 르포
지난달 22일 대만 타이베이시의 사기 방지 165 콜센터 사무실에서 상담사들이 사기 피해 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 류재민 특파원
지난 11일 대만 수도 타이베이시 형사수사국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로·세로 80㎝, 높이 30㎝ 컴퓨터 본체 형태의 장비가 보였다.
전원 장치를 눌렀더니 ‘윙’ 하는 작동음이 사무실에 크게 울렸다.
이 기계는 반경 100m 안 통신사들의 정상 기지국 신호를 차단하고, 주변 휴대폰들이 진짜 기지국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가짜 기지국’ 장비였다.
대만 범죄 조직은 이런 장비를 여러 차량에 싣고 도심을 돌아다니면서 계좌·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다거나 전기·수도, 고속도로 통행료가 미납됐다는 피싱(phishing·낚아채기) 문자 600만건을 무작위로 날렸다.
피해자들은 문자에 담긴 인터넷 주소로 들어가 신용카드 번호 등을 입력했다.
개인 정보를 입수한 조직원들은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상품을 대량 결제해 500만대만달러(약 2억3000만원)를 가로챘다가 지난달 25일 검거됐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중국 범죄 조직의 지시를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최근 경기 광명, 서울 금천구에서 시작돼 피해액이 1억7000만원으로 집계된 ‘KT 소액 결제 해킹 사건’과 수법이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박상훈
대만은 보이스피싱 범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주요 국가 중 한 곳이다.
IT가 빠르게 발전한 데다 경기 불황·청년 실업까지 겹친 199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해 2000년대 초반엔 대만 전역으로 퍼졌다.
2003년 대만 정부가 대대적 소탕을 벌이자 대만 조직들은 중국 등으로 떠나면서 범죄 타깃도 주변 국가들로 옮겼다.
그렇게 보이스피싱이 2004년 일본, 2006년 한국으로 확산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관련 범죄가 급증하자 대만 정부가 또 한번 ‘피싱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천신랑(陳信郞) 타이중 지방검찰청 주임검사는 본지 인터뷰에서 “AI(인공지능)로 영상 등을 합성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로 피해자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신종 피싱 범죄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수사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대만 경찰에 따르면 양국의 보이스피싱, 스미싱(문자 피싱) 등을 포함한 연간 피싱 피해액은 대만이 502억대만달러(약 2조3000억원)로 한국(1조6870억원)보다 많다.
대만 인구가 2350만명으로 한국(약 5100만명)의 절반도 안 되는 점을 고려하면 1인당 피해액은 대만이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추산됐다.
디지털 문화가 덜 발달한 일본과 비교하면 1인당 피해액이 20배 가까이 많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보이스피싱 국가’ ‘스캠 아일랜드(사기의 섬)’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만 피싱 범죄 조직이 피싱 문자를 무작위로 보내는 데 사용한 ‘허위 기지국’ 장비(왼쪽 사진)를 타이베이 경찰이 압수했다.
지난달 경기 광명 등에서 시작된 ‘KT 소액 결제 해킹 사건’과 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베이 형사수사국
지난 4일 오후 타이베이에서 차로 2시간 30분 떨어진 중부 상업도시 타이중 시내 ‘국가무역센터(NTC)’ 건물을 찾았다.
이 지역 최고가 건물인 NTC는 봄철 죽순을 본뜬 독특한 디자인으로, 타이중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34층 규모 빌딩 중 24층 전체를 사들인 기업은 ‘선숴(神說) 국제유한공사’라는 투자 기업이다.
그러나 이날 24층으로 올라갔더니 사무실 8개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기업 간판이 달린 사무실 불도 모두 꺼져 있었다.
최고가 건물에 입주해 번듯한 투자 회사라고 홍보해 왔지만, 실제로는 사기 범죄 조직이었다.
이들이 수사 기관에 검거되면서 한 층 전체가 압류된 것이다.
이 조직은 2021년부터 최근까지 대만 내 피해자 3000명에게서 45억대만달러(약 2000억원)를 뜯어낸 것으로 조사됐다.
대만엔 ‘표회(標會)’라고 불리는 계 모임이 발달해 있다.
이 조직은 계 모임원들을 타깃으로 무작위 전화(보이스피싱)를 건 뒤 “AI와 빅데이터 기술을 결합해 만든 새 투자 기법”이라며 최대 188%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속였다.
경찰은 이 조직의 총책에게서 50억원 상당의 타이중 고급 아파트 2채, 벤틀리·포르셰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5대 등을 압류했다.
사무실에선 2억대만달러(약 92억원)어치의 현금 다발도 발견됐다.
대만 범죄 전문가들은 대만이 중국에서 급속도로 규모를 불리고 있는 국제 사기 범죄 조직의 ‘테스트베드(실험장)’가 되면서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2000년대 초반 대만 정부의 대대적 소탕 작전으로 조직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갔는데, 20년 뒤 이 중국 조직들이 같은 언어를 쓰는 대만 국민을 각종 신종 사기의 검증 무대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대만 사기 방지 앱 회사 ‘고고룩’의 주만우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대만은 한국처럼 디지털 문화가 발달돼 있어 ‘범죄 실험’을 하기 쉽다”며 “신종 사기 수법을 대만에서 시험해 보고, 성공하면 아시아 전역으로, 나아가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구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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