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이었는데…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가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로부터 자율주행 칩을 잇따라 수주하면서 부활 신호탄을 쏠 수 있을지 산업계 이목이 쏠린다.
삼성 파운드리는 지난 7월 테슬라와 차세대 ‘AI6’ 칩 생산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최근 ‘AI5’까지 추가 수주에 성공했다.
‘아픈 손가락’으로 평가되던 삼성 파운드리 입장에서는 ‘가뭄 속 단비’다.
앞서 삼성 파운드리사업부는 4~5㎚(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공정에서 불거진 수율(생산품 중 양품 비율) 문제로 그룹 차원에서 징벌적 성격이 강한 경영 진단까지 받았다.
다만, 산업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차세대 격전지 2나노 선단공정 양산에서 파운드리 세계 1위 대만 TSMC 대비 유의미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신중한 시선도 던진다.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부활 기지개를 켠다.
사진은 삼성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삼성전자 제공)
테슬라와 밀월 형성
TSMC 가격 인상 등 반사이익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최근 테슬라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칩 AI5를 추가 수주했다.
지난 7월 테슬라와 165억달러(약 23조6900억원) 규모 차세대 AI6 칩 생산 계약을 맺은 데 이은 추가 수주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22일(현지 시각) 3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이번 기회에 명확히 하고 싶다”며 “AI5 칩은 TSMC와 삼성전자 모두 제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반도체 업계에서는 테슬라가 현재 시판 중인 모델에 탑재된 AI4 칩을 삼성 파운드리에 맡겼다가 AI5를 TSMC에 맡기고 AI6에서는 다시 삼성을 택한 것으로 봤다.
하지만, 머스크가 AI5 제조 공급망을 삼성전자와 TSMC로 이원화한다고 밝힌 것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AI6에 이어 A15까지 추가 수주를 한 것으로 산업계는 해석한다.
테슬라 자율주행 칩 개발 로드맵은 ‘AI4(HW4)-AI5(HW5)-AI6(HW6)’로 이어진다.
현재 양산 차량에 적용된 AI4(HW4) 칩은 기존 칩 대비 연산능력이 8배 향상됐다.
2026년 이후 양산 투입이 예상되는 차세대 AI5 칩은 성능이 최대 40배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AI5는 기존 칩보다 전력 효율을 높이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온패키지’로 통합해 실시간 영상 인식과 추론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온패키지 방식은 CPU 같은 연산칩 바로 옆에 메모리(HBM·고대역폭메모리 등)를 얇은 적층 구조로 붙인다.
이를 통해 데이터를 극도로 짧은 거리에서 고속으로 주고받는다.
AI6 칩은 완전 자율주행뿐 아니라 로보택시,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등 테슬라 AI 생태계 전반에 적용된다.
미세공정 고도화로 소비전력·열관리 효율도 개선됐다는 평가다.
삼성이 테슬라 AI 칩 개발 로드맵의 핵심 파트너로 기술 평판을 인정받았다는 게 반도체 업계 평가다.
삼성 파운드리가 테슬라로부터 잇단 수주에 성공한 것에는 크게 3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반도체 업계는 해석한다.
첫째, 삼성 파운드리의 선단공정 기술력이다.
삼성과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2㎚ 선단공정에서 피말리는 기술 경쟁을 벌인다.
3㎚ 이하 초미세 공정은 파운드리 산업 차세대 격전지다.
초미세 공정을 향한 기술 경쟁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나노’의 속뜻부터 정확히 짚어야 한다.
반도체 칩 속에는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간다.
이 트랜지스터는 크게 전류의 흐름이 시작되는 ‘소스’, 전류가 지나가는 ‘게이트’와 ‘채널’, 전류가 도달하는 목적지인 ‘드레인’ 등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나노는 게이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채널의 길이’를 뜻한다.
쉽게 말해, ‘소스’에서 시작된 전류의 흐름이 목적지인 ‘드레인’으로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채널)을 의미한다.
5㎚, 4㎚, 3㎚ 등으로 숫자가 줄어드는 건 전류가 드나드는 길이 짧아진다는 의미다.
전류가 드나드는 통로가 단축되면 총 저항이 감소하므로 전력 효율이 개선되고 발열도 줄어든다.
대부분 반도체 회사가 ‘나노 경쟁’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정된 에너지원으로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발열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자신감을 갖는 배경 중 하나가 3㎚ 공정에 세계 최초로 적용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이다.
미세 공정 난제 중 하나가 ‘터널링’이다.
전류가 지나다니는 트랜지스터 채널 길이가 너무 짧아지다 보니 의도치 않게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도 누설 전류가 발생한다.
GAA는 몇 세대 발전을 거쳐 초미세 공정의 신기술이 집약됐다.
GAA는 전류가 지나다니는 게이트가 채널 4면을 둘러싼다.
4면에서 전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전력 효율이 더욱 개선됐다.
삼성전자는 TSMC보다 앞서 3㎚ 공정부터 GAA를 적용했다.
삼성이 3㎚ 공정부터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2㎚부터 GAA를 적용하는 TSMC와 겨뤄볼 만하다는 평가다.
둘째, 테슬라 기술 전략 변화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테슬라가 AI 칩 설계 역량 내재화를 목적으로 삼성과 밀월관계 강화에 나섰다고 본다.
지난 수년간 공급망 불안으로 반도체 수급에 차질을 빚었던 테슬라가 칩 설계 역량 강화로 전기차 시장 ‘헤게모니’를 장악하겠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한국이 아닌, 미국 테일러 기지를 테슬라가 점찍은 것도 기술 자립 전략을 염두에 둔 조치로 분석된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테슬라는 최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본사에서 근무할 ‘실리콘 공정통합(PI)’ 엔지니어를 물색한 데 이어 경기도 화성시에 근무할 인력도 채용 중이다.
경기도 화성은 삼성 파운드리 라인과 차량용 반도체 밸리가 밀집한 지역이다.
모집 분야는 IC(집적회로) 설계 기술자와 SoC(시스템온칩) 회로 설계·검증 책임자 등이다.
IC(집적회로) 설계는 반도체 ‘두뇌 구조’를 그리는 과정이다.
SoC(System on Chip)는 CPU, GPU, 메모리, 통신 모듈 등 여러 기능을 하나의 칩 안에 통합한 집적회로를 말한다.
테슬라가 이런 역량을 갖춘 기술진을 직접 뽑겠다는 것은 ‘AI 반도체 설계 기업’으로 새 정체성을 다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테슬라는 그동안 자율주행용 칩을 엔비디아 등 외부에 의존하다가 2019년 ‘HW3’부터 자체 설계로 전환했다.
현재 개발 중인 AI5·AI6 칩은 삼성전자와 TSMC가 각각 생산을 맡고 있지만, 설계·최적화 단계는 테슬라 내부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칩 설계 역량은 파운드리 기업에는 경쟁사에 내줄 수 없는 핵심 역량이다.
TSMC는 테슬라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미국 테일러 팹 가동이 임박해 협상력이 뒤진 삼성 입장에서는 테슬라 요구를 전향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
실행력이 뛰어난 머스크 CEO가 설계 과정에도 적극 관여한다면 양산 수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봤다.
셋째, TSMC 가격 인상이다.
TSMC는 최근 차세대 2㎚ 공정 웨이퍼 가격을 이전 세대(3㎚)보다 약 10~20% 인상할 것으로 알려진다.
파운드리 가격은 웨이퍼 단위로 책정된다.
파운드리 업체는 고객이 설계한 회로(SoC·CPU 등)를 받아 생산하는데, 이때 12인치 웨이퍼 한 장을 제조 단위로 삼는다.
이를 기반으로 ▲공정 노드(7㎚·5㎚·3㎚·2㎚ 등) ▲수율 ▲공정 난이도 ▲패키징 포함 여부 등에 따라 웨이퍼당 가격을 매긴다.
한때 시장 일각에서는 50% 인상에 나섰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반도체 업계에서는 TSMC의 2㎚ 웨이퍼 가격이 기존 3㎚ 대비 약 10~20% 안팎 인상될 것으로 바라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가 미국 생산을 늘리면서 해외 생산기지를 포함한 통합 이익률이 일부 하락할 수 있다.
이를 상쇄하려 선단공정을 중심으로 가격 인상이 순차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TSMC 가격 인상은 고객사 입장에서는 칩 한 개당 실질 원가가 15~20% 높아진다는 의미다.
특히, 자율주행 AI 칩처럼 크기가 크고 복잡도가 높은 SoC 기반 칩은 웨이퍼당 수율이 낮아 단가 상승에 따른 원가 부담이 더 크다.
이 틈을 노려 삼성전자는 TSMC 대비 가격 등 여러 조건에서 유연한 수주 전략을 폈다.
테슬라를 포함 주요 빅테크에 칩 설계 단계부터 공동개발 형태를 제안하고 HBM 적층 등 후공정까지 통합 제공하는 ‘턴키(Turn Key·일괄 제공)’ 모델을 앞세워 TSMC 대비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테슬라 입장에서도 TSMC 고가 정책은 장기적으로 비용 부담 요인이다.
AI5 칩은 TSMC, 후속 AI6 칩은 삼성전자로 공급망 이원화 전략을 펴 협상력 제고를 노렸다는 분석이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파운드리 팹. 2026년 가동 예정이다.
이 팹에서는 테슬라 AI 칩을 생산한다.
(삼성전자 제공)
신중한 시선도 여전
저가 수주·취약한 생태계 복병
다만, 삼성 파운드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엇갈린다.
첫 번째 불안 요인은 역시 수율이다.
테슬라 AI6 칩은 삼성의 2㎚ 공정을 이용해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한다.
반도체 업계에서 추정하는 삼성전자의 2㎚ 수율은 40~50% 수준이다.
올 초 30%대에 머무르던 수율을 크게 끌어올린 것이지만,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진 TSMC와 격차는 상당하다.
삼성 파운드리를 두고 테슬라 등 저가 수주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삼성은 경쟁사 대비 수율이 안정되기 전 단계에서 턴키 전략을 앞세워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편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 파운드리가 테슬라와 맺은 165억달러(약 23조원) 규모 칩 공급 계약(9년간 공급)을 연매출로 단순 환산하면 2조원 중후반대다.
파운드리 단일 계약으로는 유의미한 수주이지만, 선단공정 특성상 초기 투자비, 불안정한 수율 등으로 손익변동성 관리가 숙제로 지목된다.
TSMC 대비 상대적으로 취약한 파운드리 생태계도 아쉬운 대목이다.
TSMC는 대만 내에 EDA(전자설계자동화)·IP(반도체 설계 블록)·OSAT(후공정)를 아우르는 탄탄한 파운드리 생태계를 구축했다.
반면, 삼성은 설계 자회사와 후공정 네트워크가 크게 뒤처진다.
AI 칩 설계부터 패키징까지 파운드리 전 과정에서 취약한 생태계는 개발 효율·수율·납기에 복병으로 작용할 수 있다.
테슬라 신규 수주를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전량 생산하는 것도 손익관리 측면에서 난제로 지적된다.
현지 숙련 엔지니어 확보도 쉽지 않다.
미국 고객사와 근접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 원가 구조상 자칫 수익성 낮은 ‘비싼 공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2㎚에서 유의미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거래선 다변화에 방점을 두고 설계자산(IP), 디자인하우스 등 생태계 강화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소정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칩이 아닌 웨이퍼 단위로 계약하는 파운드리 특성상 낮은 수율은 고객사 입장에서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기에, 삼성 파운드리는 고객사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라며 “TSMC의 2㎚ 대비 삼성 파운드리가 약 30% 이상 저렴하기에 신규 장비 도입과 공정 전환 등을 통해 지속적인 수율 개선이 이뤄진다면 추가적인 고객 유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3호 (2025.11.05~1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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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 업은 삼성 파운드리 진짜 부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