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놓는 것이 벽 세우는 것보다 낫다”
첫 연설서 트럼프 반이민 정책 간접비판
267대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가 5월 8일(현지시각) 바티칸 성베드로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터 연합뉴스 새 교황 레오 14세가 등장했다.
내 관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트럼프란 약탈적 황제의 등장 이후 지구 공동체의 정신적 공동화, 황폐화 상태에서 지구 정신의 회복을 위해, 트럼프에 맞설 유일한 힘(비록 정신적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을 지닌 레오14세가 구심적 열할을 해줄 만한 지도력을 발휘해줄 것인가다.
두번째는 아주 훌륭한 이상과 정신, 고통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고결한 마음을 지녔음에도 가톨릭 내 보수파들의 반대로 실질적인 개혁 전진은 미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것이냐다.
세번째는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어도 보수 극우의 반발을 딛고 민주주의와 경제 회복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할 한국에 새 교황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느냐다.
미국인이 열광하는 교황, 트럼프에겐 까다로운 상대 첫번째. 지구촌은 백 년 전 1·2차 세계대전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미국 중심으로 유엔을 창립하고, 유엔을 중심으로 침략과 약탈, 전쟁, 부정의에 대응하며 미흡하지만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지구 최강자 트럼프의 미국이 이를 정면으로 어기고 세계의 독재자로 등장함으로써, 지구는 기후변화와 인공지능(AI)시대라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변화와 인류 위기 앞에 공동대응은커녕 각자도생을 위해 날 선 대치로 치닫고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지구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지도력이 필요한 때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이가 레오14세다.
트럼프가 ‘교황이 되고 싶다’며 교황의 복장을 한 사진을 올려 세계 최고의 종교적 권위에 흠집을 내고 지구촌에서 자신과 버금갈 쌍두마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내비친 가운데, 예상을 뒤엎고, 이탈리아도 프랑스 출신이 아닌 미국 출신을 새 교황으로 선택한 것은 절묘한 신의 한 수다.
트럼프를 교황에 합성한 사진. 엑스(X·옛 트위터) 갈무리 만약 프랑스나 이탈리아 출신이라면 미국과 그들 나라의 국력 차이만큼이나 오만함을 가지고 쉽게 무시하려들 수가 있지만, 고국에서부터 인기를 불러일으킬 미국 출신의 레오14세는 트럼프가 아주 쉽게 대하기 어려운 배경을 가진 셈이다.
페루 빈민가 20년 돌본 해방신학 실천가 두번째는 교회 개혁이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에 의한 바티칸 2차 공의회가 지구촌 전쟁의 주요 원인인 종교분쟁의 원인인 종교 간 화해의 시금석을 놓고, 열린 교회로 나아가 세계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뤘듯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적 단일조직인 가톨릭의 변화와 개혁은 가톨릭 한 조직만이 아닌 지구의 미래와도 직결돼있다.
레오14세가 된 로버트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처럼 페루에서 20년간 활동하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라는 해방신학의 방향을 실천했으며, 중도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레오14세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개혁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온건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민자 권리, 사회 정의, 환경 보호 등 진보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첫 연설에서 “다리를 놓는 것이 벽을 세우는 것보다 낫다”며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난민 추방 및 DACA(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 폐지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공감과 총기 규제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며 미국 내 사회 정의 이슈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미국 내 보수적 가톨릭계와는 다른 입장을 보여온 셈이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교회의 접근 방식에서 전통적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포용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에 대해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2012년에는 동성 가족 구조와 젠더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는 낙태, 피임, 사형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낙태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하는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신임 교황 레오 14세(왼쪽)가 8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AP 연합뉴스 여성사제 서품에 대해서도 전통적 교회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여성의 서품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교회 내에서 여성의 리더십과 봉사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다.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으나 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독신제 유지에 무게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교회 내 권위주의를 경계하며, 주교는 “작은 왕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검소하게 지낸 프란치스코의 시노달리티(공동체 중심의 교회 운영)와 개혁 노선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
가톨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유산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말이 신중한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삶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페루에서 사목 활동을 하며, 해방신학의 중심지 중 하나인 트루히요에서 활동했다.
그는 가난한 지역 사회에서 사목자로서 봉사하며, 해방신학이 강조하는 사회 정의와 공동체 중심의 신앙 실천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는 페루의 가난한 지역 사회에서 교육과 문화 발전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며, 해방신학이 강조하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의 비전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이는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가치인 사회 정의와 연대에 대한 그의 지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닮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추문에 연루되어 물러난, 전세계 가톨릭 주교 임명권을 가진 교황청 주교성 장관에 그를 발탁하고 직접 추기경에 서임해 미래의 교황감으로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노조 첫 인정’ 사회교리 기초 세운 레오 13세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움의 상징인 프란치스코를 교황 명으로 선택해 가난한 자들과 연대를 표명했듯, 새 교황이 레오란 이름을 선택한 것에서 그의 사목 방향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가톨릭 역사에서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은 총 13명이 있다.
레오1세부터 12세까지 워낙 구시대 인물들이다.
따라서 레오14세가 영감을 받은 인물은 레오13세(1878~1903)일 가능성이 크다.
레오13세는 가톨릭 신자라면,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현대적으로 적용해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려는 양심적 신앙인일수록 중시하는 사회교리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레오13세는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 새로운 것들) 회칙을 1891년 발표해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노동문제와 사회질서 변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갈등이 심화하고,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하면서 무신론, 반교회 정서도 함께 커지던 때다.
가톨릭 교회는 오랜 봉건적 체계와 귀족 중심 질서의 후원자로 비치며 신뢰를 잃는 중이었다.
이에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을 통해 인간은 노동의 열매를 소유할 권리가 있으며, 사유재산은 정당함을 강조해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재산 공유를 주장하는 데 대해 대항했다.
대신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강화했다.
정당한 임금은 인간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하고, 노동자 착취는 죄이며,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노동시간, 여성·아동 보호, 휴식 권리 등을 보장하도록 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노동조합을 경계했지만, 이 회칙에서는 노동조합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또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권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할 권리가 있다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조합을 장려했다.
특히 그는 국가는 단순히 중립적 기관이 아니라 공익과 약자의 보호자임을 강조했다.
사회정의 실현과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과도한 국가 개입은 개인과 가정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음을 경계하기도 했다.
레오13세의 회칙은 1931년 비오11세 교황에 의해 사회교리로 확립되고, 1991년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회교리는 교회가 단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구조적 문제 해결에도 관심을 가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땅에서도 이루도록 관점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가져왔다.
레오13세는 지성적이면서도 실천적인 교황으로, 사회정의를 가톨릭 교리로 통합시켜 오늘날 가톨릭 사회운동, 노동인권, 기독교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의 등장이라는 변화 못지 않게, AI 등장 이후 노동 뿐 아니라 지식의 영역까지 인간을 AI가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것들’에 대한 정립이 절실한 시대에, 레오14세가 그 중대한 사명을 자각하고 있다고 보인다.
한국 새 정부 개혁 과제에 희망 세번째, 레오14세 교황이 새 정부의 개혁과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세월호 침몰의 대충격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극우들의 행태가 슬픔을 분노로 만들던 시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그가 중립이라는 외피에 숨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의 손을 잡아줄 것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방한 기간 내내 매일 네다섯개 신문 지면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사를 쓰느라 한동안 오십견으로 고생했다.
그래도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며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준 프란치스코의 한가지 행동만으로도 오십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만큼 아직도 독재와 반인권, 극우, 전쟁에 신음하는 세계인들에게 종교 지도자의 한마디는 절망과 구원을 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적으로는 욕먹을 걸 감수하면서 사회적 약자들과 인권,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나선 정의구현사제단이 요한 바오로2세나 베네딕토16세 같은 보수적 교황 재위 때 움츠려야 했으나 요한23세, 바오로6세, 프란치스코 등 진보적 교황의 등장 때 힘을 얻을 수 있었듯이 전세계의 독재에 신음하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도 레오14세의 등장에 희망을 가질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개혁을 열망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조현 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새교황 레오14세의 등장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 그리고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