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소문나면 곤란한데
지난달 26일 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해평저수지 둘레길엔 나무 숲 사이로 봄 기운이 살랑거렸다.
정대하 기자
느린 기차에 올랐다.
무궁화호는 경전선을 오가는 유일한 완행열차다.
광주 송정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는 평일 단 한차례만 경상도 부전역까지 277.7㎞ 구간을 운행한다.
나머지 3편은 순천까지만 간다.
지난달 26일 오전 10시48분 광주 효천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도심을 빠져나갔다.
1호 객실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텅 빈 객실을 상상했는데, 신기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해평저수지 둘레길. 그래픽 이상호 기자 silver3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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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 풍경이 시시각각 변했다.
평소 승용차로 달릴 때 만났던 산과 들도 달리 보였다.
긴 겨울을 이겨낸 산하의 봄이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귀띔하는 것 같았다.
기차가 화순 능주를 지날 땐 멀리 파크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느린 기차의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지 않았다.
구불구불 달리던 기차는 보성 명봉역을 지났고, 이윽고 득량역에 도착했다.
광주 효천역에서 1시간20분 정도 걸렸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완행 열차인 무궁화호. 지난달 24일 득량역에 승객들이 하차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득량역에 도착한 뒤, 역 앞 추억의 거리를 둘러봤다.
역전 이발관, 행운다방, 백조의상실, 은빛전파사, 새마을 석유 등의 간판을 단 가게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중식기반 음식점 ‘그’에 들렀다.
탁자 옆엔 밥값을 계산하는 순서를 정해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초대한 자, 부자, 선배·상사, 현직·고위층 순으로 계산해야 하지만, 0순위는 “말 많은 놈”이었다.
돼지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채소를 활용한 탕수육에 우리 밀 짜장면을 맛보았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해평저수지 주변 풍경. 정대하 기자
조 대표의 차를 타고 해평저수지로 함께 갔다.
해평저수지 둑 아래 주차장을 지나쳤다.
이곳에서 초루라는 흑초 체험관까지 가는 길은 사유지다.
초루는 187만㎡(57만평)의 청정지역에 있는 천연발효 흑초 체험공간이다.
초루로 가늘 길 양쪽에 심어진 메타세쿼이아들이 가을엔 단풍이 들어 장관을 이룬다.
옛 개흥사 터에 놓인 2500여개의 장독이 보였다.
지하 암반수를 끌어올린 물과 현미, 누룩을 넣은 옹기들이다.
보성 미력의 장인이 만든 옹기에서 5년 이상 햇빛을 받으며 발효해야 흑초가 탄생한다.
숲 속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체험 공간은 주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들어 앉았다.
초루에서 흑초 디저트를 맛보며 휴식을 갖기 위해선 예약해야 한다.
흑초로 만든 음료의 맛이 청량했다.
해평저수지 인근에 있는 초루는 187만㎡(57만평)의 청정지역에 있는 천연발효 흑초 체험공간이다.
정대하 기자
초루에서 나와 해평저수지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용추폭포와 개흥사 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인 저수지다.
그런데 저수지라고 하기엔 규모가 컸다.
2.32㎢(70만평) 규모의 저수지를 사람들은 해평호로도 부른다.
오봉산과 작은오봉산 사이에 잇는 해평저수지는 걷기에 편했다.
호수 수면 10여m 위에 조성된 둘레길은 오르막과 내르막이 차이가 없었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산벚나무와 삼나무, 편백,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만났다.
대나무 숲 사이로 호수의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고요함과 침묵속으로 빠져든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하다.
해평저수지 둘레길은 느릿느릿 걷다가 저수지 둑 끝에 다다르면 끝나게 된다.
3.9㎞ 둘레길 한바퀴를 돌아 원점 회귀하면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참 편안한 길이다.
옛 개흥사 터 노지에 놓인 2500여개의 옹기에서 발효 식초가 만들어진다.
정대하 기자
해평저수지 둘레길이 지루하면 오봉산을 걸어도 좋다.
예리한 칼에 베여나간 것처럼 생긴 기묘한 형상의 칼바위로 유명한 명소다.
해평저수지 위쪽 칼바위 주차장에 차를 대는 게 편하다.
이곳에서 300여m 내외의 나지막한 산인 오봉산 산행길을 찾아가면 된다.
서너시간짜리 능선 산행코스가 인기다.
오봉산에서 내려다보면 득량평야의 젖줄인 해평저수지를 볼 수 있다.
칼바위 주차장에서 해평저수지 둘레길까지는 1㎞ 정도 떨어져 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역 인근에 있는 추억의 거리. 정대하 기자
오봉산은 구들장 천지다.
지금도 산 곳곳에서 얇은 쇄석더미가 많다.
1940년부터 1980년까지 산꼭대기까지 올라 소달구지로 실어 나른 구들장은 전국 곳곳의 한옥 온돌에 쓰였다.
응회암으로 된 오봉산 구들장은 열 확산 능력이나 압축력, 휨 응력 등이 뛰어났다.
당시 국내 온돌의 70% 이상에 오봉산 구들장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오봉산 구들장은 아파트 문화와 침대 생활이 확산하면서 잊히고 있다.
기차를 이용하려면 광주 효천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득량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해평저수지로 이동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곧바로 해평저수지 둑 아래 주차장이나 칼바위 주차장으로 가면 된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역 앞 중국음식기반 식당 `그\'엔 음식값을 계산하는 순서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다.
정대하 기자
시간이 멈춘 듯, 느림의 미학 배우는 보성 해평저수지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