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 유숙열 1세대 페미니스트의 웃자! 놀자! 뒤집자!]
10화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창간
남성중심 언론…‘여성매체 절실’ 체감
1995년부터 페미니스트들 출판 모임
‘페미니즘 대중화’ 목표 콘셉트 모색
1997년 봄 이문열 소설 ‘선택’ 출간
조선 여성 입 빌려 페미니즘 비난
이경자·공지영 등 여성작가 공격도
‘페미니스트 집단 응전’ 필요성 느껴
“때는 이때” 이프 창간 결행 논의
‘페미니스트 사냥’ 비판 출사표 집필
‘지식인 남성 성희롱’ 특집 창간호로
1997년 창간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영업을 맡았던 김영란씨, 필자, 이프 독자로 시작해 출판사 이프북스 편집장이 된 조박선영씨, 이프 3대 편집장이었던 권혁란씨. 2017년 이프북스 출판사 창립 때 함께 모였다.
필자 제공
‘페미니스트저널 if'(이하 ‘이프’)는 1997년 여름호로 창간되어 2006년 봄 완간호까지 만 9년 동안 총 36호가 발행된 계간 페미니스트 잡지다.
나는 문화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이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준비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창간 이후 완간까지 전 과정을 함께 했다.
사실 페미니스트 잡지 얘기가 처음 나온 곳은 페미니즘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였다.
페미니즘 연극 ‘자기만의 방’을 함께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나는 1995년 여성문화예술기획 안에 ‘출판분과 모임’를 만들었다.
유숙열(문화일보 기자), 이혜경(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 김혜경(출판사 푸른숲 대표), 유지나(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 박미라(여성문화예술기획 사무국장), 손자희(‘문화과학’ 창간멤버), 김재희(프리랜서 작가) 등이 참여해 매달 출판 전문가들을 초청해 워크숍, 세미나, 토론회 등을 진행하며 페미니스트 잡지 창간 준비작업을 해왔다.
당시의 나는 남성 중심 언론에서 일하면서 날이 갈수록 여성들만의 매체가 절실함을 느꼈고 또한 ‘남’의 얘기를 쓰느라 ‘나는’이 빠진 ‘객관적’ 글쓰기에 지쳐 있었다.
나는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글쓰기에 목말랐다.
문화일보에서 일하면서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 기자가 이룰 수 있는 성과 이상을 얻기도 했지만 한정된 지면을 놓고 수많은 기자들이 경쟁을 하는 신문에서 ‘페미니즘’ 기사를 관철시키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페미니스트 잡지 창간을 목표로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우리 준비모임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페미니즘의 대중화’였다.
그때까지 기존 언론사들에서 발행되던 여성잡지들은 여성을 아내와 엄마, 소비자의 역할에 국한시키는 패션, 요리, 육아, 연예인 신변잡기 등의 기사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반면 학자나 교수 등 전문 여성지식인들이 만들어 내놓는 무크지 등의 여성 관련 출판물 등은 푸코, 데리다, 라캉 등이 춤추는 현란한 담론의 장이었다.
한마디로 너무 어려워서 대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 둘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페미니스트 잡지를 만드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잡지의 모델이 될 만한 잡지가 어딘가에 있었을까? 미국의 ‘미즈’ 매거진과 독일의 ‘엠마’ 잡지가 페미니스트 잡지이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의 페미니스트 잡지인 미즈 매거진은 1970년대 미국에선 성공을 거뒀을지 몰라도 내가 미국에 머물던 1980년대엔 이미 그들만의 페미니스트 동네 소식을 전하는 커뮤니티저널 정도로 축소돼 있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꿈꾸는 우리에겐 롤모델이 될 수 없었다.
독일의 유명 페미니스트 잡지인 엠마도 창간 편집인 알리스 슈바르처가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정은 미국 미즈 매거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만의 한국적 페미니스트 잡지 콘셉트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문열 소설 ‘선택’은 계간지 연재 당시는 물론 1997년 단행본 출간, 1998년 연극 무대화 등을 거치며 여성계, 평론가들로부터 “성차별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창간을 재촉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한겨레 보도들. 한겨레 지면 갈무리
그렇게 몇년째 준비모임을 이어가던 와중에 1997년 봄 이문열의 소설 ‘선택’이 출간되었다.
‘선택’은 이문열의 13대조 할머니인 정부인 안동 장씨(1598~1680)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무남독녀였던 장씨 부인은 아버지 주선으로 “처녀의 몸으로 상처한 홀아비의 재취가 되어”, 전처 소생의 자식들과 자신이 낳은 6남2녀를 같이 키우며 현모양처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산다.
이문열은 이 책에서 자신의 직계 조상인 장씨 부인의 입을 빌려 “…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 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민음사, 1997년, 9쪽)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문열은 여성작가인 이경자, 공지영 등의 소설 제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300~400년 전 여성의 입을 빌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훈계질을 한 것이다.
나는 ‘선택’을 읽고 이문열이 보여주는 저급한 남성 우월주의에 정말로 구역질이 났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성작가들을 모욕하고 조롱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의 정신 상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문화일보에서 여성계를 취재하던 나는 주요 여성단체 인사 등에게 문제의 소설에 대한 반응을 물었다.
어떤 여성계 인사는 “말할 때마다 ‘선택’이 더 잘 팔릴까 조심스럽다”며 언급을 자제했고, 어떤 교수는 “늙은 가부장 남자의 단말마적인 외침”이라며 “들을 필요도 없다”고 일축해 버렸다.
나는 그들의 반응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느꼈고, 오히려 “때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도전이 있으면 페미니스트들이 집단적으로 응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출판분과 모임에서 같이 페미니스트 잡지 창간준비를 해왔던 박미라씨를 만나서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며 페미니스트 잡지를 창간하고 첫번째 특집을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이프의 초대 편집장이 된 박미라씨와 만나 그 얘기를 나누던 문화일보 건너편 카페의 긴장된 분위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이문열의 ‘선택’을 읽고 나는 이프 창간호에 ‘출사표’라고 들어간 다음의 글을 썼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1997년 여름 창간호.
출사표: 왜 지금 페미니즘인가? - ‘페미니스트저널 if’를 세상에 내놓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 특히 지식인 남성들의 공격과 비난이 시대 현상처럼 번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예외 없이 무지하고 악의적이다.
이 시대 페미니즘 또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더러운 꼬리표’가 되고 말았다.
온 세상이 다 페미니즘의 사고체계와 주장대로 진행되고 있는데도 이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금기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중세에 불었던 마녀사냥의 광풍처럼 21세기의 미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사냥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사람이 반드시 남성만은 아니다.
여성들조차 그것이 자신의 ‘음전한’ 여성성을 보증하는 방패라도 되는양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곤 한다.
페미니스트는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페미니즘은 같은 여성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아야 하는가? 페미니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페미니즘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여성의 인간선언일 뿐이다.
여자의 주인은 남편도 아이도 아닌 바로 여자 자신이라는 그 단순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파문을 일으켜야 하는가? (중략)
페미니즘은 단순한 이념이나 사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남녀관계의 변화를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회 이론이며 동시에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인정되는 많은 것에 도전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이러한 도전이 지금 비난과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여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욕망과 남성 쾌락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if는 페미니스트 저널이다.
(1997년, 여름 창간호, 5쪽)
그러나 이 글은 나하고 함께 갈 운명이 아니었는지 내 이름으로 나가지 못하고 박미라 초대 편집장의 이름으로 실렸다.
내가 몸담고 있던 문화일보에서 나 때문에 기자들의 대외활동 제한 규정이 만들어지고 그에 대한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막판에 인쇄소에서 필자 사진을 바꿔 끼웠다.
결국 나는 이프가 완간을 할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고료를 받고 원고를 쓰는 객원 편집위원 직함을 달아야만 했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이문열 ‘여성 훈계질’에 응전…“이프는 페미니스트 저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