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연극 <늙은 소년들의 왕국>·<괴벨스 극장>·<국산군인>·<꽃의 비밀>
서울역광장 노숙자들의 세계를 다룬 연극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두 노인 리어와 돈키가 그들이 지켜줘야 하는 ‘백성’인 소년을 위해 다양한 로망을 실천하는 풍자극이다.
극단 걸판 제공
광개토대왕, 이순신 장군, 리어왕, 돈키호테, 괴벨스.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과거의 인물(혹은 캐릭터)들이 요즘 대학로를 휩쓸고 있다.
불황이 깊어지는 시국인데도 200석 미만의 소극장이 관객으로 가득하다.
떡볶이 장인 고춘자와 올리브오일 장인 소피아 역시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힐링 캐릭터로 관객몰이 중이다.
이들은 모두 중년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삶의 파편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이끈다.
시대의 문제적 상황과 ‘노욕’(老慾·나이 들어서도 내려놓지 못한 욕심)을 돌아보고 초심을 일깨우게 한다는 점에서 닿아 있는 작품들이다.
현실 해부하는 예술적 시도들
<국산군인>(전웅 작·연출, 박성원 드라마터그, 프로젝트W)에는 폭소와 실소가 공존한다.
에너지 넘치는 혼령들의 액션극이라는 점에서 공포물로 볼 수도 있으나 산 자와 죽은 자의 고뇌가 겹쳐지면서 제례와 애도가 동반돼 사유하게 이끈다.
12·3 비상계엄에 동원된 특전사 병욱(장우영 분)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시민에게 총구를 들이대지만 주저하다 오발탄에 맞아 사망했다.
천당의 문을 두드리며 따지다 독립운동가 금녀(박미르 분)가 구해 ‘탈옥단’이 된다.
지옥과 천당 사이를 떠도는 탈옥단은 국민을 지켰음에도 지옥행인 것에 반발하는 혼령들이다.
광개토대왕 담덕(하민욱 분)과 장군 순신(이강호 분), 선덕여왕 덕만(김보경 분) 등 역사적인 구국 영웅들도 탈옥단이라는게 놀랍다.
고통스러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도피하던 중 천당 문지기 천선녀(이명열 분)에 의해 검거되자 막내인 병욱을 지켜내기 위해 모두 지옥에 떨어지고 병욱은 거세게 항의한다.
제문(祭文) 같은 캘리그라피 망토를 두르고 강렬한 노래와 웅장한 12인의 군무로 막을 여는 <늙은 소년들의 왕국>(오세혁 작·연출, 박기태 작·편곡, 극단 걸판)은 서울역 광장 노숙자들 세계를 다룬다.
안위와 명예를 위해 딸들에게 의존하다가 모든 것을 잃은 리어(도창선 분)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어왕>의 오마주다.
리어를 무조건 따르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돈키(김태현 분) 역시 미겔 데 세르반테스 원작의 <돈키호테>에서 비롯됐다.
비극과 희극을 상징하는 두 노인은 친우가 되고, 기존의 부랑자들에게 공격당하는 소년(류동휘 분)을 발견한다.
그들이 돌보고 지켜야 할 유일한 백성이다.
소년을 위해 노인들은 버스킹으로 노래하며 먹거리를 모으고 보호하며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어간다.
채무자 같은 자식들이 찾아와 리어와 돈키의 왕국은 부서지고 다시 쇠락한 노인으로 돌아간 그들은 백성인 소년도 잊고 만다.
혼돈의 시국에는 필히 <괴벨스 극장>(오세혁 작·이은준 연출·극단 파수꾼)이 열린다.
히틀러가 건설한 폭력과 살육의 유럽은 사실상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 의해 치밀하게 짜인 선동극이다.
한때 문학 소년이었던 괴벨스는 불편한 다리로 인해 내쳐지다가 히틀러에게 인정받으면서 거듭 괴물이 된다.
양극화를 야기하고 분노와 증오를 에너지원 삼아 반대파를 절멸시킨 결과가 홀로코스트다.
성실한 우등생 괴벨스(박완규·김대곤 분)가 나치 선동가로 급성장하는 과정은 아카이빙 영상과 상징적인 대사로 각인된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의 40여 년을 빠른 액션캠처럼 잡아내기 위해 무대에는 드럼통과 양은 냄비, 대형 고무통 등 소도구 몇개만 놓여 있다.
요란한 선동 사운드와 고문실을 시각화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통로를 여닫는 행위다.
동시대의 여러 군상을 나치에 빗대 풍자하는 장면들 또한 그러하다.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언제든 과거의 폭력과 선동이 세상을 잠식한다는 경고다.
노망? 노욕? 이제는 ‘로망’!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극단 오징어)는 70세 생일을 맞은 춘자(서나영·김소리 분)에게 찾아온 치매를 설득력 있고, 공감되는 에피소드로 시각화한다.
욕심과 증오가 공존하는 시국 풍자 작품들에 비하면 무대예술도 화사하다.
동네의 평범한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춘자가 헤매는 판타지 세계로 향한다.
기억력과 조절력 상실로 가족을 잃고 거리에서 소변을 흘리는 춘자의 모습은 충격적인 현실이다.
기억과 인식을 상징하는 영혼의 물고기(엄현수·양나은 분)가 소변을 통해 함께 빠져나가 치매가 가속화된다는 설정 또한 기발한 은유다.
칼같이 정확하고 활기찼던 춘자의 머릿속 초침과 분침이 낡아 와이퍼로 쓰이면서 새로운 기억은 지워진다는 넘버 역시 그러하다.
사랑하는 자식들 진수(성열석·김준현 분)와 성찬(김대웅·김선제 분), 다정(강나리·하미미 분)을 위해 더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치매에서 빠져나오는 춘자씨의 자각이 눈물겹다.
넘버 ‘영혼의 물고기’의 “아이는 가볍고 노인은 가엽지/ 아이는 예쁘고 노인은 안 예쁘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노인은 보기만 해도 맘 아프지.” 등의 가사는 세대공감을 이끄는 관찰의 결과다.
노년은 외롭고 애잔한 것이지만 나보다는 남을 위해 손발을 더 뻗을 수 있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치매로 향하는 춘자씨의 인생 여행을 재치 있는 판타지와 공감 가득한 온기로 담아낸 가족극이다.
극단 오징어 제공
코미디극의 교과서 같은 <꽃의 비밀>(장진 작·연출, 문화창작집단 수다)은 ‘늙은 젊음’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우정과 연대를 꼽는다.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에 사는 올리브오일 장인이자 남편과는 절대 전화할 일이 없다고 믿는 소피아(박선옥·황정민·정영주 분), 술을 좋아하고 남편과 이혼할 꿈을 꾸는 자스민(장영남·이엘·조연진 분), 뛰어난 미모만큼 털털한 청년 세대 모니카(이연희·안소희·공승연 분)와 씩씩한 4차원 공대 출신 지나(김슬기·박지예 분)는 단체로 바람피우다 교통사고로 전복한 남편들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합심한다.
잘 꿰어 맞춰진 폭소 속에서 끝까지 빛나는 것은 남자로서 살아간 몇 시간 동안 원수 같은 남편들의 어려움과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수함이 로망으로 읽히는 따뜻한 작품이다.
<국산군인>은 고래로 모든 군인이 지옥행인 이유는 군인의 본분은 국민을 지키는 것인데 잠시라도 국민에게 총구를 들이대거나 살생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리어와 돈키가 소년과 함께 부랑자들을 밀어버리고 만든 서울역광장의 인공 꽃밭을 해체하고 새로운 왕국의 초석을 만들며 노년의 로망을 후대를 위한 봉사로 일군다.
<괴벨스 극장>은 땀 범벅인 괴벨스가 “언론은 정부 손안의 피아노다”라며 주술을 걸듯이 강조함에도 결국 그가 비참하게 생을 마치는 과정을 수미쌍관으로 담아냈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인생의 비상사태 ‘치매’에도 굴하지 않고 손맛이 살아 있는 떡볶이 밀키트 사업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정성을 전하는 영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꽃의 비밀>은 네 여성이 합심한 ‘작전’을 통해 되찾은 자존감과 본질이 오래 품었던 비밀임을 깨닫게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한 문구로 흔히 인용된다.
연속되는 불운이나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말라는 의미다.
<꽃의 비밀>과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서울에서는 상연이 끝났고, 이후 지방 투어가 있다.
<괴벨스 극장>과 <국산군인>은 끝났고,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6월 1일까지 상연한다.
‘늙은 젊음’과 ‘젊은 늙음’ 사이에서[이주영의 연뮤덕질기](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