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국영 석유·가스 기업 페트로베트남(PVN)은 2026년부터 미국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를 공급받기 위해 미국의 주요 에너지 기업인 엑셀러레이트 에너지, 코노코필립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페트로베트남 홈페이지
지난 4월 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발표한 베트남에 대한 관세 46%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한국도 충격이었다.
베트남에 진출한 1만여개의 한국 기업 중 베트남을 생산기지화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곳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49%)와 라오스(48%)가 베트남보다 높은 관세율을 받았지만, 이들 국가의 무역량은 미미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베트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을 받은 것과 같다.
일각에서는 베트남이 친중으로 기울어 트럼프 미 행정부가 보복 조치를 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에 한국 주요 언론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멕시코로 이전해야 한다는 보도를 쏟아내며 큰 우려를 나타냈다.
베트남에 대한 이런 우려에는 ‘베트남이 미국과 관세 협상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미국에 대한 대응은 사전에 준비됐고, 행동은 신속했다.
발표 전부터 준비된 베트남의 대응 시나리오
미국의 관세율 발표 다음 날인 4월 3일, 베트남은 팜민찐 총리 주재로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었다.
46% 최고율 관세 폭탄이 터진 베트남 정부 긴급회의치고는 차분하게 진행됐다.
이날 회의에 대해 일본 언론 닛케이 아시아는 4월 20일자 보도를 통해 “(관세) 발표 내용은 놀랍지 않았다”는 베트남 고위 공산당원과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닛케이는 “베트남 측이 이미 예상하고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4월 4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위해 호득폭 부총리와 협상단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부총리 일행과 별도로 베트남 HD은행이 마련한 비엣젯 특별전세기를 타고 베트남 기업인 200명 역시 같은 시간 미국으로 떠났다.
기업인 중에는 금융, 은행, 항공, 에너지, 기술, 수출입 등 다양한 부문에 걸친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구매하는 입장에서 미국 기업들과 협의를 하러 간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전세 항공기를 마련하기도 어렵거니와 베트남에서 미국 비자 발급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각기 다른 베트남 기업인 200명이 한꺼번에 미국을 가려면 사전에 충분히 준비됐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날 밤 베트남 최고 권력자 또 럼 공산당 총비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베트남으로 수입되는 모든 미국 제품에 대해 0% 관세”를 제시하며 “베트남 수출 품목에 대해서도 0% 상호관세”를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 플랫폼에 또 럼 총비서의 ‘0% 관세’ 제안을 “생산적이었다” 평가하며 “조만간 회동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세 폭탄을 퍼부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베트남은 국가 최고 지도자들부터 기업인들까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순차적으로 대응했다.
베트남의 미국 관세 협상 대비는 트럼프가 당선된 직후부터였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얼마 되지 않은 2024년 11월 27일, 하노이에서 판민찐 베트남 총리와 주베트남 미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베트남·미국 경제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날 베트남 정부는 미국산 제품 구매 계획을 풀어놓았다.
도흥비엣 베트남 외무부 차관은 “미국과 조화롭고 지속 가능한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항공기, 액화천연가스(LNG), AI칩 등 미국산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조화롭고 지속 가능한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라는 표현에는 세계 3위 대미흑자국 베트남이 미국의 적자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베트남의 미국산 제품 구매는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2025년 1월 9일부터 11일까지 베트남의 저가 항공사 비엣젯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트럼프의 개인별장 마러라고에서 ‘베트남 친구들을 위한 회담(Friends of Vietnam Summit)’에 참여했다.
베트남 인민일보(Nhan Dan)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트럼프 당선인과 일론 머스크뿐만 아니라 보잉, 제너럴 일렉트릭, 프랫앤드휘트니, 하니웰 등 미국의 주요 항공 및 기술 기업들이 모였다.
이들 기업은 기존에 비엣젯과 총 500억달러(약 70조원) 규모의 전략적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 자리에서 추가 140억달러(약 20조원) 규모의 협력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엣젯은 2016년, 2019년 각각 보잉사와 체결한 보잉737 Max 200대 구매 계약 이외에 추가로 보잉787 20대 구매를 협의 중이다.
4월 10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비엣젯은 글로벌 상업항공 금융서비스 기업인 에이브이 에어파이낸스를 통해 3억달러(약 4200억원) 규모의 금융 거래를 성사시켰다.
복수의 베트남 언론에 따르면 비엣젯은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 항공기 구매 재원 마련을 위한 총 40억달러(약 5조6000억원) 금융 거래를 체결했다.
4월 9일 국영 베트남항공 역시 미국의 글로벌 금융그룹인 씨티그룹과 항공기 구매를 위한 5억6000만달러(약 7900억원) 금융 계약을 체결했다.
해당 금액은 보잉737 Max 50대 구매를 위한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알려졌다.
3월 13일 팜민찐 베트남 총리는 마크 내퍼 주베트남 미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적극 검토하고 있으며 미국산 농산물, 액화천연가스 수입을 장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총리의 발언은 그다음 날 곧바로 실현됐다.
베트남 국영 석유·가스 기업 페트로베트남(PVN)은 2026년부터 미국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를 공급받기 위해 미국의 주요 에너지 기업인 엑셀러레이트 에너지, 코노코필립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트럼프의 발언, 그리고 관세 협상의 다음 행보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별로 관세율을 발표할 때 베트남에 대해서만 남다른 멘트를 남겼다.
“베트남, 대단한 협상가들, 훌륭한 사람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좋아합니다.
나도 베트남 사람들을 좋아합니다(Vietnam, great negotiator, great people. They like me, I like them).” 베트남에 46%라는 최고 관세율을 부과하면서 트럼프가 미안해서 저런 멘트를 남겼을 리 없다.
트럼프 특유의 양면 전술 화법으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베트남과의 물밑 협상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베트남과 관세 협상을 타결 짓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갑작스러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베트남 방문 때문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의 베트남 방문에 대해 “마치 미국을 어떻게 속일지 고민하는 것 같다”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 주석이 베트남을 떠난 직후 베트남이 미국산 F-16 24대를 구매할 것이라는 미국 국방 전문 미디어 ‘19포티파이브’의 보도는 베트남이 중국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다룬다.
베트남의 관세 협상, 트럼프 당선 직후 시작됐다[가깝고도 먼 아세안](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