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공습에 속수무책…‘12일 전쟁’ 이후 생존의 갈림길
지난 6월 26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휴전을 수용한 이후 처음 모습을 드러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이란이 이스라엘과 미국에 승리했다”고 자신감 있게 선언했다.
하지만 지난달 12일 시작돼 ‘12일 전쟁’으로 끝난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에서 명백한 패자는 하메네이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으로 주요 핵시설이 파괴된 데다, 장기간 지속한 경제제재로 내부 사정은 악화일로에 놓이면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허약함 드러낸 이란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이란 포르도 핵 시설 입구에 굴착기가 놓여 있는 것을 찍은 위성사진 / AP연합뉴스 이스라엘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테헤란의 모습은 이란이 그 어느 때보다 안보적으로 취약한 상태임을 드러냈다.
이란의 핵심 인프라와 전력은 집중적인 공습으로 상당 부분 파괴됐다.
지난달 27일 이스라엘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란 핵과학자 11명과 이란군 고위 간부 30명이 숨졌다.
분쟁의 가장 비극적인 피해자는 공습으로 숨진 민간인들이다.
아스가르 자한기르 이란 사법부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이스라엘과 분쟁 중 935명이 숨졌으며, 이중 132명이 여성, 38명이 어린이라고 밝혔다.
이란이 중동 지역에 구축한 이른바 ‘저항의 축’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이라크·시리아 친이란 민병대는 “이란은 스스로 맞설 수 있는 강력하고 주권적인 국가”라며 분쟁 개입에 거리를 뒀다.
예멘 후티 반군만이 이란을 돕겠다고 했으나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 이란과 긴밀하게 공조해왔던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공습에 대한 비판 입장만 냈을 뿐 실질적인 군사∙외교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전략 자원들도 이번 분쟁으로 상당 부분 소실됐다.
지난달 21일 미국의 공습으로 이란 핵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나, 유례없는 공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전문가들은 농축 우라늄을 금속화하는 인프라가 파괴돼 이란이 핵을 무기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대응으로 탄도미사일이 소진돼 현재 미사일 발사대 400개 중 절반도 남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메네이 정권의 수명은 다했는가? 지난 6월 22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의 공습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사진(가운데)을 들어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36년간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하메네이는 이번 분쟁으로 벼랑 끝에 몰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직접적으로 ‘하메네이 정권 교체’를 입에 올렸다.
이에 휴전 이후 이란의 ‘내부 단속’은 더 철저해졌다.
이란 정부는 휴전 이후 이스라엘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는 이들을 대규모 체포하고 처형하며 공포 정치를 강화하고 있다.
분쟁으로 상처 입은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란 내부는 오랜 시간 곪아 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한 ‘신정 일치’ 체제인 이란은 보수강경파 중심의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는 기득권에 대해 불만과 저항을 키워왔다.
2022년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가 사망한 사건 이후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서 300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최근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운 대표적인 계기가 됐다.
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서방의 제재는 인구 9200만명을 가진 대국인 이란을 고립시켜왔고, 그 결과 이란의 경제는 붕괴 직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하메네이 정권은 단시간 내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 중심의 시위대가 조직되는 등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감지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공습을 가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으로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는 분위기다.
즉각적인 정권 붕괴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체제 내부에서 방향성을 둘러싼 고민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개혁 성향 정치인 모하마드 사데그 자바디 헤사르는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현 정치체제의 존속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이번 분쟁 이후 이란은 전쟁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했다.
고립과 외교라는 선택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휴전을 발표하며 “이란의 핵무기 제조 능력을 파괴해 세계가 안전해졌다”고 주장했다.
그의 목표는 2015년 체결됐던 이란 핵합의(JCPOA)보다 더 높은 수준의 협상을 도출하는 것이다.
JCPOA는 이란이 자체적으로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농축 수준을 3.67%로 제한했다.
네타냐후 총리 등 이스라엘 강경파는 이란 핵 프로그램과 시설·장비를 모두 해체하는 ‘리비아식 합의’를 주장해왔으며, 트럼프 행정부도 이런 방향을 제안해왔다.
하지만 이란은 분쟁 이후 핵 개발 의지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란 의회의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미르 사이드 이라바니 주유엔 이란대사는 “농축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며 핵농축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란이 농축 우라늄 400㎏을 어디에 보유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력을 중단하는 법안을 의결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교장관은 지난 7월 1일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협상이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란이 우라늄 농축 활동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IAEA와 협력을 전면 중단하고 향후 핵확산금지조약(NPT)까지 탈퇴하게 되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국제사회의 감시 없이 계속 진전될 가능성이 있다.
이제 이란의 목표는 생존이다.
지난달 23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갑작스레 제안한 휴전을 받아들인 것도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과 전면전으로 무기 등이 소진됐으며, 안팎으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해 위태로운 상황인 이란이 장기전에 뛰어들기에는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이란이 NPT를 탈퇴하고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까지 나서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혹은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할 것인가. 사남 바킬 런던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중동·북아프리카 책임자는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금의 휴전은 일시적인 정지일 뿐 적절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언제든 갈등은 고조될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말했다.
이란 생존 전략, 고립이냐 핵 협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