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63스퀘어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심 아파트의 모습 / 연합뉴스
얼마 전 정부가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한 뒤 모두의 시선이 부동산시장으로 쏠리고 있다.
작년 말에 시작된 정치의 시간이 점차 마무리되고, 이제 다시 경제의 시간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제 상황과 정치권력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번 정부에서도 경제정책의 성패가 지지율을 결정할 핵심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간단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경제정책의 성패’ 자체가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경제성장률이 상승했지만, 부동산가격을 잡지 못했다면 경제정책은 성공한 것인가 실패한 것인가? 주가지수는 올랐지만, 자산 불평등이 심해졌다면 이건 또 어떠한가? 개인이 처한 상황은 모두 제각각이고, 그에 따라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달라진다.
더구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와 지지율은 또 다른 문제다.
한국 유권자의 경제 상황과 정치 지향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투표 ‘가난한 자와 부자의 투표 성향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흔한 질문을 던져보자. 지난 몇 번의 대선에서 이른바 ‘저소득층의 계급 배반 투표’를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난한 유권자가 오히려 극우보수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걸 과연 ‘배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이런 발상 자체에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적 감정이 개입된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어쨌든 저소득층의 투표 성향은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지난 두 번의 ‘서울 강남 3구’ 결과를 보면, 윤석열과 김문수의 득표율이 가장 높다.
물론 이곳에 부자만 사는 건 아니므로, 이를 두고 ‘강남 부자들은 극우보수 정당을 지지한다’라고 결론 낼 수는 없다.
그래도 가난한 자가 극우보수를 지지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부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국민의힘 정권은 두 차례 탄핵당했고, 그때마다 나라 경제가 휘청거렸다.
윤석열의 내란 시도 후 주가는 폭락했고, 증시에선 시가총액 140조원이 날아갔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폭등한 것은 오히려 문재인 정부 때였다.
극우보수 세력은 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역량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을 지지하는 부자가 있을 수 있는가? ‘저소득층의 계급 배반 투표’를 말할 수 있다면, ‘고소득층의 계급 배반 투표’도 당연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부자 되기’의 명령이 지배하는 곳이다.
주식을 보유한 개인투자자가 1400만명이 넘고, 가상자산 투자가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내란 시도, 탄핵,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흥미로운 것은 ‘개미 투자자가 단결해 내란 세력을 심판하자!’라는 식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주가 하락이 투자자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끼친 경우는 많겠지만, ‘개미 투자자’가 정치적 정체성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경제와 정치가 접합되는 방식은 단일하지 않고, 경제정책의 결과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조건의 정치적 효과를 설명하는 보편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가 정치적 집단 의지를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않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또한 해당 정세와 시기, 문화적 환경 등이 경제와 정치 사이에 개입한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증세를 통해 사회정책을 강화하자’라는 정치적 의지를 만들 수도, ‘일자리를 빼앗는 이주민을 쫓아내자’라는 의지를 만들 수도 있다.
하위 계급의 정치적 부재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경제적 차이는 한국의 정치 지형을 규정하는 거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그런 조건으로 작동한 것은 오로지 세 가지 차이, 즉 지역·성별·세대였다.
이번 대선에서도 지도의 왼쪽은 파란색, 오른쪽은 빨간색으로 물들었지만 이제는 여기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별로 없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모두가 세대 간 차이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여기에 성별 차이가 추가됐다.
그래서 선거만 끝나면 20·30대는 누구를 지지했는지, 이 세대의 여성과 남성은 어떤 차이를 보였는지에 관한 논평이 쏟아져 나온다.
유럽과 북미의 극우 포퓰리즘에 관한 흔한 평가 중 하나는 ‘주변부로 배제된 백인 서민 계급(underclass)이 엘리트 계급에 대한 집단적 분노와 이주민에 대한 집단적 증오를 표출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이는 전통적 계급 정치의 전복이지만 계급이라는 차이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
계급 차이는 세대, 성별, 인종, 지역 등의 차이와 결합하며, 여전히 정치 지형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 노동자와 부르주아,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서민 계급과 엘리트 계급 등의 차이가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한국 정치의 독특성 중 하나다.
노동운동은 오래전부터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지만, 진보 정당 운동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지역, 성별, 세대, 인종, 계급 등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들이 정치적 차이로 전환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호남’과 ‘TK’, ‘청년’과 ‘노인’은 정치적 기호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이미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이 됐지만, 정치적 집단 의지를 형성하는 기호는 아니다.
한국의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서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지만 정작 ‘서민’은 정치적 집단 정체성을 구성하지 않는다.
서민을 위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의 정치적 대결 구도가 등장한 적도 없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경제적 차이가 정치적 차이로 전환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육체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가난한 자, 집 없는 자, 임대 주택 거주자, 빌라 거주자 등을 지칭하는 차별과 멸시의 언어는 넘쳐나지만,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격렬한 반발에 부딪힌다.
근대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평등을 접합하기 위해 탄생한 체제였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정치 공간에 하위 계급의 목소리가 없는데 이를 과연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있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의 시간, 경제의 시간[박이대승의 소수관점](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