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영 변호사
“○○학회에 오셨어요?” 서울의 한 대학 작은 강의실에서 오랫동안 소통이 없던 지인의 문자를 받았다.
그는 몇 년 전 유학길에 오른 터라 한국에서 그를 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차에 몇 년 후 박사학위를 따게 되면 아마도 참여하게 될 학회 행사에 답사차 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전혀 무관한 두 학회의 세미나가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일 관계로 서로를 알 뿐이었으나, 우연이 겹치자 친근한 마음이 절로 생겨 커피를 마주 두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다.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발생하는 일들은 선택할 수 없지만, 서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관심 분야가 분명하고 공익적 지향이 뚜렷한 사람으로, 꽤 전도유망한 경력을 쌓기도 했으나, 어느 날 변호사로서의 일을 내던지고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또다시 유학이라는 예상치 못한 경로로 접어들었다.
내가 아는 또래의 사람 중 가장 서슴없이 궤도를 이탈하고, 그러면서도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당당한 외연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혈혈단신으로 산전수전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고생 끝에 낙이 올 것이 분명한 미래도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좋아하세요? 오케스트라로 치면, 제 전공이 ‘하프’거든요. 하프는 단 한 대인데, 그나마도 없기도 하니까….” 달변가인 그는 절묘한 비유를 들어가며, 모든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응원의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오래전 영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를 단단하고 견고한 갑판에 올라앉아 자신의 운명을 지휘하는 선장이라고 착각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사실 그 배는 1인용 조각배일 뿐이고, 우리 각자는 그 배에 홀로 몸을 싣고 불확실성과 우연 사이를 항해하는 초보 여행자에 불과하다.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수를 두드려보아도 예상치 못한 일은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순간에도 엎드려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마지막 장면에 코가 시큰해진 것은 그들의 포부와 희망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한 그들이 아름다워서였을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다.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발생하는 일들은 선택할 수 없지만, 서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더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다.
나만의 이야기를 가졌는가[오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