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듣는 법정]응우옌티탄이 기억하는 1968년 2월12일… 한국군에 가족·이웃 무차별 학살당한 날
2001년 3월 베트남 퐁니 마을 자신의 집에서 1968년 2월12일 한국군의 총격 사실을 증언하는 응우옌티탄. 한겨레 고경태 기자
1964년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이 정점에 달했던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다낭시에서 20㎞ 떨어진 ‘퐁니 마을’에서 민간인 수십 명이 몰살당했다.
법정에서 원·피고 쌍방이 수년간 제출한 주장과 증거 모두 이 하루를 입증하거나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송에 제출된 진술과 증거를 바탕으로 원고 응우옌티탄의 시점에서 이날을 재구성한다.
내 창자가 쏟아졌다, 풀은 바람에 누웠다
안녕하세요, 이 소송의 원고이자 퐁니 학살 사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입니다.
‘응우옌’은 성씨이고, ‘티’는 베트남 여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중간 이름입니다.
‘탄’이 이름입니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은 ‘탄 아주머니’ ‘탄 선생님’이라고 절 부릅니다.
제 가족과 동네 사람들도 저를 ‘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가족과 이웃 대부분이 1968년 2월12일에 죽었습니다.
57년 전 저는 만 7살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총알이 박힌 배에서 쏟아지던 창자를 손으로 다시 넣어가며 도망쳤습니다.
‘오래전 일이고 어린 나이였는데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엄마를 찾아 헤매면서 봤던 풀이 바람에 눕던 모습조차 기억합니다.
제 아빠는 한 해 전 소식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장사를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시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날도 엄마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언제나처럼 이모가 우리 집에 와 저와 언니, 오빠, 동생을 돌봐주었습니다.
돌도 지나지 않은 사촌 동생은 이모의 포대기 안에 있었고, 옆집 이웃 오빠도 놀러 왔습니다.
어른 하나, 아이 여섯 명. 마당에서부터 집 안 구석구석까지 뛰어다니며 떠들던 아침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콩 튀기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모는 밖의 상황을 확인한 뒤 서둘러 우리를 마당에 파놓은 방공호로 들여보냈습니다.
마을은 곧 총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15살 오빠는 평소 마을 주변을 지나다니던 한국군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의 얼룩무늬 군복을 ‘밀리터리 옷’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그들의 모습을 잘 알았습니다.
이윽고 군인 네댓 명이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빠는 나지막이 “따이한”(대한)이라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총질… 방화 말리는 이모에겐 칼부림
당시 베트남 집집이 만들어두었던 방공호는 1m 깊이의 구덩이에 모래 포대를 쌓고 천장을 덮은 형태였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기에 앞뒤는 넓게 뚫려 있습니다.
우리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따이한을 잘 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따이한에게도 우리가 얼마나 어린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는지 잘 보였을 것입니다.
따이한은 방공호로 접근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손에 수류탄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나오지 않으면 수류탄을 던지겠다는 뜻으로 보였습니다.
아이를 업은 이모는 우리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습니다.
설마 아이들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빠부터 방공호에서 나왔는데 따이한은 곧바로 총을 쐈습니다.
저도 배에 총을 맞고 그대로 엎어졌습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따이한은 집 지붕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모는 불을 붙이지 말라고 애원하듯 한 손을 뻗어 군인의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따이한은 칼로 이모를 찔렀습니다.
집에 불이 붙자 따이한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쓰러져 있던 오빠가 조용히 절 불렀습니다.
오빠 쪽으로 가며 언니와 동생을 봤습니다.
언니는 움직이지 않았고, 동생은 살아 있었지만, 입에 총을 맞아 숨을 쉴 때마다 울컥울컥 피를 토했습니다.
저에게는 동생을 도와줄 힘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불은 번져갔습니다.
오빠가 말했습니다.
“동생을 살리려면 엄마를 찾아야 해.”
엉덩이에 총을 맞은 오빠는 기어서, 저는 배를 잡고 겨우 걸어서 불타지 않은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방공호에 숨어 있던 이웃 사람들은 “너희 엄마 아직 다낭에 안 갔다”고 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오빠를 두고 엄마를 찾기 위해 이웃 사람들이 알려준 장소로 갔습니다.
가면서 근처 논에 총을 맞고 죽은 10여 명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속에 엄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너무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는데 나중에 ‘만약 거기 갔다면 엄마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저는 길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깨어보니 다낭의 병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1968년 2월12일입니다.
마을에세 세 명만 미군에 구조돼
대한민국 법원에 증거로 제출된 응우옌티탄의 가족관계 관련 서류. 임재성 제공
‘1968년 2월12일 15시께 퐁니 마을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부상자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고,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가를 받았다.
두 명의 여자와 어린 소년 한 명만이 생존해 있었고, 그들은 헬기로 후송되었다.
’ 증거로 제출된, 퐁니 마을 바로 옆에 주둔하던 미 해병 중위 실비아가 남긴 진술서 내용이다.
이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탄이고, 어린 소년이 탄의 오빠다.
그때 기적처럼 미군이 마을에 진입했기에, 미군 헬기가 마침 기동했기에 응우옌티탄은 살았다.
생존자 탄은 2022년 8월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453호에 출석해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했다.
탄의 가족관계 관련 서류를 법정 프로젝터에 띄워두고 이뤄진 당시 문답이다.
“원고 엄마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판티찌입니다.
” “엄마의 사망일이 서류 기재와 같이 1968년 2월12일이 맞나요?” “맞습니다.
” “누가 살해했나요?” “한국 군인입니다.
” “원고의 엄마, 언니, 이모, 동생의 제사를 같은 날 지낼 텐데, 그 이름이 있나요?” “‘따이한 제사’입니다.
”
탄은 동생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크다고 말했다.
탄은 법정에서 “왜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총을 쏜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대한(따이한)은 왜 그랬나?’ 이는 대한민국에도 중요한 질문이다.
왜 그랬는지 알아야 진정한 사과를 할 수도, 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탄의 질문에 따이한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다.
법정에 증인으로 선 참전군인 ‘류진성’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다음 회에서 그의 증언으로 구성한 1968년 2월12일을, ‘왜 죽였는지’에 대한 답을 담고자 한다.
임재성 변호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가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마주한 순간들, 그 법정 안팎의 이야기를 ‘열두 번의 날짜’를 통해 소개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한날한시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