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땡큐!]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화제의 드라마를 이제야 봤다.
부모라면 보이는 게 더 많을 거라고,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폭싹 속았수다’ 말고 ‘소년의 시간’ 얘기다.
열세 살 소년 제이미의 살인 혐의를 소재로 한 범죄 드라마로 세간의 평이 대체로 맞았다.
생각이 많아졌고, 앉은자리에서 4부작을 전부 봤다.
다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부모들, 특히 아들 키우는 집에서는 꼭 봐야 한다는 조언에는 반발감이 든다.
극 중 소년이 폭주한 원인을 하나로 특정할 수 없고 다양한 요인을 검토해야 한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지만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대개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가족 내 소통을 복원하고 공교육을 강화하자는 식이다.
집과 학교로 환원할 수 없는 ‘소년의 시간’
(부모) 시청자가 경악하고 두려워한 것은 십 대들에게 공기처럼 퍼진 여성혐오 문화다.
제이미가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이 자신을 조롱한 여자아이와 또래 소녀들, 그리고 여성 심리학자라는 점에서 여성혐오가 이 파국의 발단임은 부인할 수 없다.
정도의 심각성을 몰랐던 어른들은 그저 어리둥절하다.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미성년 교육의 주체인 가정과 학교가 일차적인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이상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학교는 가정교육 문제라 하고, 개별 가정은 공교육이 책무를 저버렸다고 한다.
바라보는 이들도 말을 보탠다.
미디어나 형법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해법을 외집단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모호해지고, 해결의 주체는 불분명해지며, 소년은 대상화된다.
돌아보면 아무도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성교육이 중요하다면서도 섹스는 즐겁고 행복하며 편안한 사랑의 대화여야 한다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소년·소녀들은 섹스를 인터넷과 미디어로 배운다.
그래서 동의 없는 성관계가 문제이며,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모른다.
가해자를 집단에서 분리하고 악마화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썩은 사과 한 알을 상자에서 골라낸다고 남은 사과들이 온전할 것이라 믿을 수 없다.
사과가 썩는 환경, 여성혐오가 보편이 된 상황 자체가 개선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제이미는 계속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의 재건을 이야기한다.
가정에서 자녀와 대화를 많이 나누며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면 여성혐오 같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과연 사춘기 아이가 이제라도 부모와 진솔한 대화를 할는지도 의문이거니와 별 효용이 없는 대책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건강한 이성상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프로이트식 접근은 가정이라는 작은 연극무대 위에 사건을 가둬버림으로써 현실의 복잡한 맥락과 원인을 일소한다.
배우가 아무리 노력한들 결국은 유튜브와 소셜미디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초현실적인 힘으로 긴박한 국면을 해결하는 장치)가 될 것이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여성의 외모권력이 얼마나 전능한지, 20%의 남성이 80%의 여성을 차지한다는 말이 왜 사실인지 반박 불가능하게 입증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연애와 사랑을 학습한다.
모두가 책임을 다해 ‘여성혐오’ 멈춰야
된장녀와 김치녀, 인스타녀로 이어지는 여성혐오의 역사는 또 얼마나 유구한가. 아이들은 사회에서 합의한 룰에 따라 어떤 여성은 혐오해도 된다고 배워왔다.
소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제구실하지 않았으니 이제 모두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부모든 부모가 아니든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성혐오를 멈추는 데서 시작한다.
십 대들의 여성혐오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
그 소년의 범죄를 둘러싼 불편한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