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 폭로에 열광하고 왕이 된 대중에 아첨하는 시대… 왕과 아첨꾼에서 내려와 파시즘에서 민주주의 구원해야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2023년 5월11일 충남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충남도·예산군·더본코리아, 그린바이오 산업생태계 육성을 위한 벤처캠퍼스 유치 업무협약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파시즘은 ‘엘리트의 대중 혐오’와 ‘대중의 엘리트 혐오’가 만나 결합할 때 확산의 불이 댕겨진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상반된 혐오가 어떻게 서로 합쳐질까 싶지만 기묘하게도 둘은 매우 친화력이 있다.
대중을 혐오하는 일군의 엘리트 집단은 엘리트를 혐오하는 일부 대중과 야합하고, 엘리트를 혐오하는 대중은 대중을 혐오하는 엘리트 집단과 결합한다.
이 결합을 이룬 엘리트 집단은 자신이 귀족주의적 기득권에 안주하는 기성 엘리트와 다르고, 대중 또한 무질서하고 무법적인 기존 대중과 다른 존재로 자기를 드러낸다.
이 둘은 피에르 다르도 등 프랑스 학자 4명이 함께 쓴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 말하는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서 하나가 된다.
  엘리트-대중의 상호 혐오가 만날 때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이 둘이 만나는 것은 대중이 왕이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왕이 됐지만 ‘어떤 왕도 허락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불온하다.
더구나 대중은 ‘상처받은 왕’이다.
그는 귀족으로서 왕의 자리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귀족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귀족이 보기에 새로운 왕은 천박하다.
귀족적 엘리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왕’이 된 대중 혐오를 획책한다.
그의 무지와 무식, 교양과 취향 없음을 비웃으며 그저 욕망에 충실한 ‘동물’로 경멸한다.
다른 한편, 왕의 주변에는 귀족을 젠체하는 ‘속물’로 고발하며 왕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아첨꾼만 들끓는다.
왕과 귀족, 아첨꾼 모두는 서로를 ‘위선자’로 고발하며 서로의 몰락을 획책하고 환호한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더본코리아의 백종원씨 사례다.
한때 그는 무슨 일을 해도 대중의 열광과 지지를 받았다.
누군가 그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면 대중은 반발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조언에 반발하거나 하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며 망해야 정신 차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요리에 대한 견해나 조리법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면 대중의 입맛을 폄훼하며 잘난 척한다고 비판했다.
대중의 ‘성역’처럼 보이던 그에게 여기저기서 문제 제기가 터졌다.
‘빽햄’ 선물세트 논란이 시작이었다.
그가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낸 것이 “맛은 기본이고 가격은 비싸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정작 자기 상품에는 다른 원칙을 적용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원칙을 남과 자신에게 다르게 적용한 자, 즉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위선자’라는 의심이 한번 제기되자 봇물 터지듯이 폭로가 이어졌다.
농지법 위반 의혹부터 원산지 표기 오류, 얼마 전에는 2023년 충남 홍성 축제에서 있었던 ‘과거’ 일이 다시 소환됐다.
예산 전통시장에서 위생을 강조하던 그의 모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대중이 가장 싫어하는 악당, ‘위선자’로 고발되고 있다.
그의 이런 ‘위기’에 대해 가장 씁쓸해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음식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던 분들이다.
한때 요리하는 분들의 요청으로현대 사회의 문화적 특징에 대해 강의하며 요리사들과 인연을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인연이 되었던 분들은 대부분 백종원‘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가성비’라는 것은 매우 훌륭한 접근이지만 ‘싼 음식’이 ‘좋은 음식’이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음식의 근간이 되는 재료, 재료를 가공하고 요리하는 노동, 좋은 음식을 찾기 위한 요리사의 공부와 연구, 이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요리에서 ‘가성비’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대체적 견해였다.
비싸다고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맛있기 위해서는 비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백종원‘류’가 평정하는 ‘맛’과 ‘맛’의 가치 매김을 우려했다.
실제로 “백종원은 싼데도 맛있게 잘만 만들더구먼”이라며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의 음식에 ‘항의’(?)를 당했다는 괴담도 돌았다.
백종원씨가 주창하는 ‘맛’을 비판하면 사실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괜히 비싸게 받고 대중의 입맛을 폄훼하며 맛에 대해 잘난 척하는 ‘재수 없는 존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상처받은 왕’이 돼버린 대중의 탄생   이런 대중의 반응은 이해가 간다.
대중은 맛의 세계에서 늘 상처받는 존재다.
맛은 매우 섬세한 ‘미학’의 영역이다.
미적 영역에서는 ‘차이 같지도 않은 차이’를 차이로 구분하는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존재의 위상을 가른다.
그 차이가 점점 더 ‘차이 같지도 않은 차이’가 될수록 음식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겨우 이 정도 차이를 가지고 이런 가격 차이라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미학의 세계다.
이런 점에서 음식 역시 미적 대상이다.
이 미학에서 언제나 상처받는 것은 대중이었다.
그들은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로 비하됐다.
가격을 뛰어넘는 미적 ‘가치’에 대해 무지하고 음식을 가격으로만 판단하며 ‘차이 같지 않은 차이’를 폄훼하는 존재라고 멸시되는 게 맛의 세계에서 대중의 위치였다.
사실 대중은 ‘맛’의 주체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대중을 단박에 ‘맛’의 주체로 올려 대중의 훼손된 존재감을 회복시킨 사람이 백종원씨였다.
대중이 ‘맛’의 관점에서 이른바 ‘미식’을 뻐기는 ‘속물’을 비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맛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대중을 맛의 주체로 상정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판자들의 이야기는 이것이 맛의 ‘기준’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대중의 취향이 맛의 기준이 돼버리는 순간 맛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맛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들어올 수가 없다.
다른 이야기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를 강조하면서 필연적으로 귀족 취향으로 흘러가 대중은 결코 미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대중 혐오의 서사로 읽혀버리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백종원씨를 비판하던 비판자들은 맛에 대한 언어를 독점하며 대중을 무시하는 귀족주의적 엘리트, 재수 없는 대중 혐오적 속물로 낙인찍혀 혹독하게 비판받았다.
이 시대 대중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미적 영역에서의 ‘대중 혐오’ 서사다.
그래서 대중은 ‘비평’을 같잖아하고 ‘비평가’들을 경멸한다.
대체로 비평가는 대중을 ‘무식한 존재’로 취급하며 가르치려 드는 ‘재수 없는 속물’로 여겨진다.
귀족주의적 취향의 대중 혐오에 상처받은 대중이 비평가 대신에 열광하는 것이 ‘엔터테이너’다.
방송을 틀면 정치비평이니 문화비평이니 하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지만 그들의 실체는 ‘엔터테이너’다.
아첨꾼으로 둘러싸인 왕은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에 실린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삽화. 후마니타스 제공 그들은 대중이 치르는 ‘돈값’에 충실하다.
가르치려 드는 대신 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비평하는 게 아니라 대중의 기호와 취향(때로는 ‘변덕’)에 최대한 맞춰 ‘텐션’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대중은 이들에게 기꺼이 돈을 지급한다.
그리고 이들이 ‘엔터테이닝’을 멈출 때 가차 없이 버린다.
그게 누구라도 말이다.
그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엔터테이닝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맞춤이다.
‘떼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자도, 앵커도, 비평가도, 심지어 ‘혁명가’도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
  ‘위선자’ 손가락질은 파시즘의 자양분   이처럼 현대 사회의 대중은 ‘왕’이다.
그 ‘왕’의 비위를 맞춰야 살아남는다.
당연히 그 옆에는 ‘아첨꾼’과 ‘사기꾼’이 주로 득실거린다.
이들의 목적은 ‘왕’을 살살 구슬려 자기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첨꾼과 사기꾼들은 왕에게 늘 날카롭고 현명하다고 상찬하지만, 사실은 그 왕의 가장 어리석은 지점을 파고든다.
왕이 어리석을수록 아첨하기 쉽고 사기 치기도 쉽기 때문이다.
대중을 혐오하는 귀족 엘리트들을 비판하며 거기에 기생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들 역시 대중 혐오주의자들이다.
반면 왕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은 그의 ‘엔터테이닝’에 기분 좋게 취하고 있지만, 이자가 사실은 자기를 이용해먹고 있음을 말이다.
이 아첨꾼들이 자기에게 아부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어리석은 존재로 경멸한다는 것을 안다.
자기를 멸시하던 귀족처럼 말이다.
사실 이 보이지 않는 ‘귀족’이야말로 이 사회의 주인이며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왕을 경멸하고 멸시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왕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한편에서는 자기를 무시하는 귀족이 ‘속물’로 발각되어 망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가 거느리고 다니던 아첨꾼과 사기꾼이 ‘위선자’로 탄로 나서 몰락하는 이야기다.
맛/음식과 백종원씨의 사례를 들었지만 이 현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에서 나타난다.
모두가 서로를 타락한 위선자로 손가락질하며 몰락을 환호하는 이 상황이 파시즘에는 가장 좋은 양분이다.
‘위선자’는 본성이 악한 존재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악한 존재는 그냥 악한 것에 불과하지만 위선자는 기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선자는 악당이면서 동시에 사기꾼이 된다.
사기꾼은 사기당한 사람의 삶만 파탄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기만하고 신뢰에 기초한 사회 질서를 혼돈에 빠뜨리고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당보다 더 나쁜 존재다.
그렇기에 모두가 서로를 ‘위선자’로 폭로하면서 파시즘은 강력한 윤리적/미적 운동이 된다.
파시즘에 동조하며 열광하는 이들은 윤리적/미적 ‘존재감’을 향유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존재를 정화하고 사회를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2025년 4월6일 마린 르펜을 지지하는 프랑스 극우 정당 전국 집회에서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모두가 모두를 ‘위선자’로 폭로하며 열광하는 이 시대에 파시즘을 멈추고 민주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몰락에 씁쓸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누구보다 몰락당한 사람을 비판했지만 이렇게 몰락해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대중을 왕으로 여기기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기에 왕의 아첨꾼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대중을 혐오하는 귀족이 되기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대중 혐오가 되는 유혹에 철저히 맞서며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왕이 아니라 요리사와 서로 존중하며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이웃/시민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 장소를 구축하려 노력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장소에서 우리는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교양 있는 시민으로 성숙한다.
  민주주의의 보루는 이웃 시민 교류의 장   민주주의의 주체는 귀족도, 왕도, 대중도 아니다.
대중이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귀족과 아첨꾼을 물리치는 것뿐만 아니라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상처받은 왕에게 ‘왕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 나는 당신을 왕으로 대하며 아첨할 생각은 없지만, 당신이 내 단골이 되어 내 음식을 즐기고 서로 존중하며 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주체가 되자고 권유하는 이들, 음식을 ‘사연 팔이’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음식을 통해 다양한 서사가 나오도록 하는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는 장소를 구축하는 민주주의자들이 아닌가. 파시즘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보루는 광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웃 시민 교류의 장소다.
여전히 광장에서 배우되 동시에 일상으로 돌아와 이런 장소를 구축하는 이웃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광장의 열광이 일상의 냉소로 이어지며 파시즘의 자양분이 되는 상황을 멈출 수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백종원 서사’에서 발견하는 파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