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작은책’ 30주년 기념 단행본
20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전주페이퍼 사망노동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진상규명과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한빛, 김용균, 강태완…. 일하다 사망한 청년들의 이름이 여전히 무거운데, 일하다 사망한 또 다른 청년들의 이름이 그 위에 겹겹이 쌓인다.
2024년 6월16일 전주 팔복동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19살 노동자 ㄱ씨의 생전 메모장. 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19살 박정현씨는 전남 순천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전주페이퍼에 입사했다.
입사한 지 6개월째인 2024년 6월16일 홀로 배관점검 업무를 하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
‘남에 대한 얘기 함부로 하지 말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기’, ‘예체능 계열 손 대보기(브이로그, 미술, 사진, 다이어리꾸미기 등)’ 등 2024년의 목표를 한자한자 힘주어 쓴 수첩만이 남았다.
‘개인의 문제일 수 있다’는 대표이사의 말에 엄마는 울부짖었다.
“업무지시를 받고 일하다 쓰러져 한 시간 가까이 방치되어 숨지면 산재사고도 아니고 회사 책임이 아닙니까?” 정현씨 유족의 지인 김현주씨가 정현씨 사망을 둘러싼 투쟁기를 쓴 글은 제4회 작은책 생활글 공모전에서 ‘작은책상’을 받았다.
31살 김동호씨는 2023년 6월20일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카트를 정리하다 사망했다.
사망 전 사흘간 낮 최고기온은 32.1도, 33.3도, 35.2도였고, 고인은 야외 아스팔트 위에서 20㎏이 넘는 카트 더미를 밀면서 4만3712보(26.42㎞), 3만6658보(22.01㎞), 2만9107보(17.36㎞)를 이동했다.
처음엔 폐색전증으로 발급된 사망진단서가 ‘직접사인: 폐색전증’의 원인으로 과도한 탈수와 온열이 추가 기재된 사망진단서로 변경되면서 업무상재해 인정을 받았다.
김동호씨의 업무상재해를 이끌어낸 ‘일과 사람’ 권동희 노무사는 그 과정을 모두 기록해 작은책에 글을 보냈다.
27살 장덕준씨의 일터는 쿠팡 칠곡물류센터였다.
1년4개월 동안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연장근무가 있을 때는 새벽 5시30분까지 하루 8~9.5시간 심야노동을 거르지 않고 지속했다.
고인의 어머니는 “물류 ‘혁신’을 하느라 법적인 제약 없이 야간 노동이 부활했다”며 “야간 노동할 때 회사가 특수건강검진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해서 쿠팡이 받은 과태료가 10만원”이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투쟁 현장에서 외친 발언도 글로 옮겨졌다.
일터는 여전히 참사의 현장이다.
1995년 5월1일 창간해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담아온 잡지 ‘작은책’이 30주년을 맞아 5년간 책에 실은 글을 묶어 펴냈다.
‘만국의 노동자여 글을 쓰자’(‘작은책’ 엮음, 플레이아데스 펴냄)에는 일터의 기쁨과 슬픔이 어떤 글보다 날것으로 담겨 있다.
글쓰기를 하는 노동자들은 ‘냉혹한 일터’에 순응하지 않는다.
“일용직노동자를 일회용품 취급”하는 쿠팡에서 ‘계약해지’된 최효씨는 “계약해지가 아닌 노조 활동으로 부당하게 해고된 해고 노동자이며, 원직 복직을 원한다고, 현장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권동희 노무사는 “누구나 죽을 수 있는 이 ‘산재공화국’에서 운 좋게 남겨진 우리가 다시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304쪽, 1만8천원.
이토록 평범한 내가 광장의 빛을 만들 때까지
이유정 등 지음, 롤링다이스 펴냄, 1만7800원
오래 덕질해온 가수의 콘서트가 있던 날, 그 가수의 응원봉을 들고 여의도로 간 이유정에게 광장은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미투 운동, 불법 촬영, ‘낙태죄’ 폐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 현장이었다.
9명의 여성이 쓴 ‘광장에 대한 경험 저장소’는 흥겹고 벅찬 연대의 경험, 시민성을 인정받는 경험으로 가득하다.
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어크로스 펴냄, 1만8800원
12·3 계엄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무얼까.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는 소모적 정치 예측보다 ‘한국의 정체성’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쓴다.
계엄 이후 드러난 한국은 민주주의의 실패, 헌정의 실패, 법치의 실패, 사회의 실패, 마음의 실패, 무엇보다도 한국을 이해해온 언어의 실패이기 때문에. 실패에 그치지 않고자 질문하고 사유하는 책.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
한스 페터 그라베르 지음, 정연순 옮김, 진실의힘 펴냄, 2만7천원
법치주의 전문가인 저자는 판사들이 독재자들의 가장 악랄한 정책을 어떻게 그렇게 자주, 쉽게 따랐는지 역사와 법철학을 통해 들여다봤다.
판사들은 권위주의 정권이 만든 법을 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적 창의성’을 발휘해 억압에 앞장서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공격받을 때 판사들은 어떤 자세로 재판에 임해야 하는지를 다뤘다.
자유의 길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강국 옮김, 아르테 펴냄, 3만4천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저자는 자유 담론이 어떻게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게 됐는지 다뤘다.
우파가 자유라는 개념을 독점하고 왜곡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시장 근본주의의 폭거가 시작됐다.
소수 특권층의 자유만 비대해졌고, 사회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정은 전례 없이 깊어졌다.
어떻게 경제 시스템이 시민 다수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지 살폈다.
‘산재공화국’에 운 좋게 남겨진 우리가 싸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