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부추긴 조희대 대법원장의 선택과 국힘 지도부의 ‘단일화’ 꼼수… 삼권분립 원칙과 대의제 신뢰 부수는 해로운 선택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가 2025년 5월6일 후보 단일화 압박에 반발하며 후보 일정을 중단하고 상경한 김문수 대선 후보를 만나기 위해 서울 관악구 김 후보의 자택 앞에서 기다리다 김 후보가 오지 않자 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했을 때 이를 ‘해킹’에 비유하는 비판이 많이 나왔다.
제도의 빈틈을 이용해 제도 그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용도로 ‘해킹’은 그럴듯한 표현이었다.
‘해킹’에 비유할 만한 일은 선거제도에 한해서만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법원과 검찰이 전직 대통령인 윤석열의 구속을 취소한 일이 그렇다.
구속 기간을 ‘날’이 아닌 ‘시간’으로 치는 새로운 계산법을 고안한 재판부와, 향후 실무적 부담이 예상되는데도 인권을 내세우며 항고하지 않은 검찰의 태도를 보며 사람들은 ‘해킹’을 본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서울고법, 이재명 후보 쪽 공판 연기 수용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직권으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은 예감했다.
사법부가 또 한 번의 ‘해킹’을 시도할 수 있다! 실제로 대법원이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선고하자 이러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경각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재명 후보 지지층을 중심으로 ‘해킹’ 수법과 대법원의 의도에 대한 분석이 즉시 시작됐다.
형사소송법의 빈틈에 대한 온갖 분석과 향후 사법부 행보에 대한 예상, 이의 부당함을 막을 수 있는 대응 방식 등이 지지층 사이에서 ‘장군-멍군’식으로 논의됐다.
이재명 후보 지지층과 민주당이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정서를 공유하며 일종의 ‘역해킹’을 준비한 것이다.
치열한 수싸움 시뮬레이션 끝에 이들이 이른 결론은 파기환송심의 결론을 대선 이후로 미루는 것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재명 후보 쪽은 공판 연기를 요청했는데,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는 2025년 5월7일 전격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이로써 거의 1주일 동안 진행된 ‘해킹’ 경쟁은 일단 마무리됐다.
앞서도 썼지만, 이 모든 논란과 의심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직권으로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는 부자연스러운 일을 감행하면서 시작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진의에 대해서는 온갖 ‘썰’이 나돌지만 이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법원 내부망에 판사들이 올린 글에 나오는 표현처럼, 조희대 대법원장이 일이 이렇게 될 줄 과연 몰랐을지는 궁금하다.
대선을 앞두고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법부가 앞장서서 논란을 키우고 혼란을 가중시킨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불법적 계엄 선포와 온갖 후폭풍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 입장에선 무엇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 불법적 계엄 선포 또한 전직 대통령과 구 여권 사람들은 ‘해킹’의 방식으로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가? 불법 계엄 선포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상대를 가리켜 ‘독재’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를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이게 지금까지 겪은 끔찍한 일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의힘에서 대선 대응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혼란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진다.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외치며 ‘김덕수’ ‘을지문덕’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면 김문수 후보는 국민의힘의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민의힘 당원 및 지지층 대다수가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원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힘 ‘이중 바지사장 전략’의 모순과 한계
그러나 정작 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김문수 후보는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에 부정적 태도로 돌아섰다.
김문수 후보로선 급할 이유가 없다.
한덕수 후보가 스스로 포기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셈법을 뻔히 아는 당 주류도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거여서 결국 양쪽은 충돌했다.
단일화를 강권하는 지도부에 반발해 일정을 전면 중단하고 사라져버린 김문수 후보 설득을 위해 ‘쌍권’(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이 나서 동분서주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김문수 후보가 한덕수 후보와 독대하고서도 단일화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당 주류는 다수 당원 여론을 근거로 ‘강제 단일화’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들이 3차에 걸친 경선을 통해 뽑은 후보를 단 며칠 만에 사실상 주저앉히기로 한 것인데, 이로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집권 세력을 자처했던 정당의 대선 대응은 코미디로 전락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됐을까? 불법적 계엄 선포와 탄핵 여파를 보수정당이 거듭나는 계기로 삼는 게 아니라 기득권 유지를 위한 꼼수로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 것부터가 문제다.
애초에, 당 주류에 당 밖에 있는 한덕수 후보가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선 후보를 지낸 이를 중심으로 당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은 여의도 정치의 상식이다.
‘한덕수 대망론’은 이를 원하지 않는 당 주류가 ‘바지사장’을 데려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당 주류는 김문수 후보를 꽤 얕봤다고 할 수 있다.
한덕수 전 총리를 데려오기 위해선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또 다른 ‘바지사장’이 필요했는데, 경선 과정에서는 그 역할을 김문수 후보가 해줄 수 있으리라 당 주류는 기대했다.
그러나 김문수 후보를 징검다리가 아니라 또 다른 숙주로 여기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됐다.
즉, 단일화를 둘러싼 갈등은 ‘이중 바지사장 전략’의 모순과 한계가 노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과연 대선 전략이라 할 수 있을까? 대선을 치르는 외양을 갖추지만 그 실제 목적이 기득권 유지와 당내 주도권 경쟁에 있다면, 이는 대선 전략이라는 정치에 대한 ‘해킹’ 시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힘은 대선이 아니라 ‘해킹 대회’를 치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윤석열의 당선 자체가 선거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해킹’이나 다름없었다.
민주 시민으로서의 소양이 없는 사람이 오직 상대를 ‘독재’로 몰아붙일 수 있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됐고, 이 덕분에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불법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게 됐기 때문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025년 5월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에 참석해 입술을 다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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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 재정의·재발명해야
윤석열 시대를 거치면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누구나 ‘해킹’을 염려하고 ‘역해킹’부터 모색하는 정치가 일상화됐다.
대법원을 둘러싼 논란과 국민의힘의 파국은 바로 이를 보여주는 징후다.
앞으로도 이런 정치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상한 담론을 논하는 이들은 엘리트가 자제와 포용의 정치를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 번 열려버린 문은 닫기가 매우 어렵다.
누구나 ‘해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모두가 자제와 포용을 실천하는 것은 아마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 그 자체를 재정의·재발명하는 것으로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깨닫게 된다.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 ‘해킹’의 시대를 살아내야 한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국민의힘도 대법원도, 민주주의 ‘해킹’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