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기획]1984~1991년 뉴욕 여성 운동 현장 기록한 책 펴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완간, 이프북스로 이어가
2025년 6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의 저자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가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91년 미국 뉴욕에서 급진주의 여성 그룹 ‘레드스타킹’을 취재하던 유숙열 기자는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인터뷰가 가능하느냐고 물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안타깝게도 파이어스톤이 정신병원에 있어 인터뷰에 응할 수 없을 거’라고 답했다.
유숙열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선구적 페미니즘 이론서를 쓴 여성인 파이어스톤은 ‘생물학적 가족의 압제’에서 벗어나 인공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뒤 공동체가 함께 평등하게 기르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하지만 돌연 자취를 감췄고, 역사에서도 사라졌다.
  ‘성의 변증법’ 들고 눈물짓다 2025년 6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던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자신이 공역한 ‘성의 변증법’을 오랜만에 펼쳐 들고 눈물지었다.
그는 파이어스톤 못지않게 열렬한 페미니스트로, 겁 없고 맹렬한 여성 기자로 유명했다.
퇴직 뒤엔 누적된 긴장과 투쟁 탓인지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고 만성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렇게 인정받고 세상에서 나름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거지만, 이 사람은 그게 안 된 거다.
” 유숙열의 두 눈이 벌게졌다.
파이어스톤은 2012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있던 아파트에서 건물주에 의해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향년 67. 그로부터 4년 뒤 젊은 페미니스트 작가 요하나 헤드바는 ‘아픈 여자 이론’을 쓴다.
장애인, 아픈 여자, 불안장애 등을 지닌 이들의 정치성을 사유하고 세상을 심문하는 글이었다.
몸과 마음의 만성질환으로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당사자는 죽을 수도 있지만, 헤드바의 주장처럼 살아남아 정치적 꿈을 꿀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 혁명을 주장하는 ‘레드스타킹 선언’을 발표한 1960~1970년대 래디컬(급진적) 여성운동의 전위그룹 ‘레드스타킹’의 캐시 새러차일드와 유숙열. 유숙열 제공 홀로 거침없이 바람을 가르던 ‘한국 페미니스트 기자의 시조새’로 불리지만, 유숙열은 최근에야 비로소 자신의 활동을 정리한 책 한 권을 냈다.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이프북스 펴냄)는 그의 유일한 단독 저서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공저와 번역서를 냈고 2005년 시집 ‘외로워서’(이프북스 펴냄)를 썼지만, 유숙열이라는 ‘인간 책’의 외전에 가까웠다.
이번 책에서 유숙열은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여성운동의 현장,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와의 인연, 언론운동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숙열은 반골 기자였다.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던 1980년, 당시 한국기자협회장이던 선배 김태홍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수감됐다.
감옥에서 해직당한 뒤 남편과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를 낳고 엄마로, 미주조선일보 기자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았다.
한국에 돌아와 막 창간한 문화일보 기자로 합류했지만 ‘노조 배후’로 지목돼 오랜 기간 압력을 받았다.
방송위원이 된 뒤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았다며 더 큰 모함에 시달렸다.
결국 오십의 나이에 기자 일을 그만두게 된다.
내지 메인사진) 2025년 6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의 저자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가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어려서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나. “집이 한의원이어서 신문이 많았다.
당시엔 지금보다 신문이 더 다양했다.
소년한국일보, 약업신문 등도 있고. 신문을 보는데 한자가 많으니까 어려서부터 책벌레가 되었다.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외삼촌인가 누군가가 ‘신문기자는 남자들이나 하는 거지, 여자가 무슨 기자가 되느냐’고 했다.
” ―엄마는 딸의 꿈을 지지했나. “나는 유복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도 안 돼서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내가 불쌍했나보다.
물까지 떠다 바치면서 키웠다고 했다.
나를 공주 대접하면서 키워주셨고, 욕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재혼하셨고, (길러준 아버지도)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이 최고의 고민이었다.
‘심아무개 한의원의 유숙열’이었다.
심청이 부러웠다.
심씨 성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내 이름이 나한테는 주홍글씨였다.
”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표 고승우(왼쪽부터), 정남기 전 언론재단 이사장, 이문승 전 연합뉴스 논설위원, 유숙열. 유숙열 제공 나는 죽어도 페미니스트를 해야겠다 1979년 독재자인 박정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유숙열은 역사의식과 광주에 대한 부채감으로 괴로워했다.
친구 화실에 선배 기자를 숨겨줬던 유숙열도 결국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고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물고문을 받았다.
그를 담당했던 검사는 “여자가 언론 자유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라고 말했다.
대공분실 고문대 ‘칠성판’ 위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가 해직당한 그는, 정말 결혼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결혼하고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해 미국으로 떠났다.
  ―결혼하고 가족과 남편의 성취 속에 여성의 지위가 결정되는 중산층으로 좀더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어릴 때 여자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99%가 ‘현모양처’였다.
나는 그걸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들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장래 희망을 갖지 않는다.
여자들은 왜 꿈이 ‘현모양처’ 하나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나 기자를 꿈꿨다.
우리 엄마가 나에겐 너무 천사 같고 좋은 사람인데, 일부종사 못한 죄인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제도에 의해 엄마를 죄인으로 만든 세상에 칼을 갈았다.
” ―페미니즘은 어떻게 접했나. “남자친구이던 남편이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 책을 넣어줬다.
사회과학 서적이 유행할 때였다.
창비에서 나온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라는 책을 보고 처음 페미니즘을 접한 뒤 열혈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뉴욕에서 미주조선일보에서 일하며 헌터칼리지 여성학 학부 과목을 듣고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미국에서 제2물결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았다.
“1985년쯤인데 친구들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마이 스텝파더’(stepfather·의붓아버지), ‘마이 스텝브러더’(stepbrother·의붓형제)라는 표현을 하더라. 나는 평생 (아버지가 둘인) 그것 때문에 한이 있었는데, 그 얘기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게 잊히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주는 해방을 깨달았고, 나는 죽어도 페미니스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자유와 해방감을 잊을 수 없다.
” 유숙열은 여성학 교수가 되기보다는 여성 전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학부 과정부터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매일 부흥회 하는 것 같은” 나날을 보냈다.
1984년 10월 여성학의 개척지이다시피 한 헌터칼리지에서 첫 여성학 수업을 들었는데, 중간고사 기간 당시 수업에 초빙된 이가 시인 오드리 로드였다.
영어 발표에 짓눌리면서 힘들게 한국 여성 이민의 이야기를 쓴 ‘황인종 여성이 쓴 시’(Poem By A Yellow Woman)를 발표했다.
이 시로 유숙열은 로드의 눈에 띄었고 그의 시는 페미니스트 사회에 작은 파란을 일으키며 여러 지면과 행사에서 발표됐다.
로드의 워크숍에 참여한 유숙열은 혁명가 파울루 프레이리의 ‘민중교육론’ 등을 배웠고 시를 썼다.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 왼쪽 둘째가 오드리 로드, 셋째가 유숙열이다.
유숙열 제공 오드리 로드와 시를 쓴 시간 ―오드리 로드의 제자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 픽업된 것이다.
내 시를 들은 로드가 자기 시 수업을 들으라고 권했다.
로드는 제3세계 여성들과 그 외 소수자들에게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다며 1985년 가을 학기에 따로 학생 10명가량을 위한 시 워크숍을 열었다.
그 수업에는 로드의 딸도 포함돼 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3학기 연속 로드의 수업을 들었다.
로드는 자기 이름을 딴 센터가 생겼을 때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내 시를 낭송하라고 했다.
겁에 질려 있던 나에게 그는 ‘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며 ‘(너는) 들려져야 할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 ―글쓰기 방법이 있다면. “나는 나에게 절실한 걸 쓰는 거다.
나의 진실에 맞는 어법이랄까, 문법이랄까 그런 것을. 기자도 육하원칙에 따라 쓰긴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고, 옛날 기사 작법이 더는 현실에 맞지 않는 것도 많다.
나는 미국에서 뉴욕타임스, 유에스에이투데이 등을 보며 글쓰기를 더 확실하게 익혔다.
뉴욕타임스는 기자들의 글쓰기가 독특했다.
단순한 사회부성 기사와 달라 많이 배웠다.
”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도 내가 쓴 글을 보면 저게 다 역사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글을 쓴다는 건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역사 속 존재임을 느끼면서 글을 썼으면 한다.
억지로 느끼지 않더라도 자신은 역사 속에 저절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 1997년 창간해 2006년 완간호를 낸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발랄하면서도 전투적이었다.
이프라는 매체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이를 꼽으라면 단연 유숙열이다.
그는 매체 창간 아이디어와 자금을 쏟아부었다.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인 2010년 중반부터는 ‘이프북스’ 대표를 맡아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근본 없는 페미니즘’ 같은 책을 펴냈다.
당시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지지하면서 2018년 이른바 ‘혜화역 시위’(불법촬영에 대한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한 그는 얼굴을 드러내고 대문짝만하게 밝히는 글을 쓰던 ‘이프 시절’을 떠올렸다.
젊은이들은 얼굴을 가리고, 구호를 제창했다.
너무도 앳된 목소리였다.
“딸보다 더 젊은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우리의 페미니즘과 이들의 페미니즘은 다르구나 느꼈다”고 했다.
2025년 6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의 저자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가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정말 드라마틱하게 살아왔는데,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우스웠다, 행복 같은 건. 지나고 보니 계속 거의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구태여 고른다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를 만들었던 때. ‘웃자! 뒤집자! 놀자!’고 하면서 온갖 실험을 다 했다.
단행본을 만들고, 안티미스코리아 대회를 열고, 각종 후원회 파티도 하면서 재밌게 살았던 것 같다.
내 꿈을 실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미국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미즈보다 더 목적성이 분명했다.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을 창간호 특집으로 잡고 내가 직접 쓰기도 했다.
당시 문화일보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거의 다 쏟아붓다시피 했다.
억대 돈을 넣었는데 계간지니까 한 네 번 정도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면 말지(돈이 떨어지면 접어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첫 호를 내고 나서 온갖 데서 독자 편지가 쏟아졌다.
눈물이 났다.
내가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다고 멋대로 만들고 거두고 할 게 아니고 계속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독자 모임을 하면 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서울 와서 자고 가기도 했다.
” ―당시 뜨거운 주제를 피하지 않았다.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 군가산점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도 군대에 가라는 글을 써서 후배들에게 비판도 많이 받았다.
군가산점 문제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지금도 같다.
나의 글쓰기나 주장이 남성적이라는 욕도 많이 먹었다.
남성 조직에서 일하면서 그렇다는 평가였다.
그런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 2003년 10월 임수경(1989년 평양 방문, 앞줄 맨 왼쪽 둘째)과 유숙열(앞줄 맨 오른쪽). 유숙열은 1989년 7월11일 미주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뉴욕일기’에 임수경 이야기를 썼지만 임수경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기사는 실리지 못했다.
유숙열 제공 나의 페미니즘은 욕망의 페미니즘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다고 말했는데, 유숙열의 페미니즘이란 어떤 것인가. “나의 페미니즘은 욕망의 페미니즘. 여성의 인간 선언.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다.
요즘 아이를 키우면서 힘겨워하는 여성도 자아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의 인간 선언, 여성에게 자아를 잃지 않게 해주는 사상이라고 본다.
똑똑한 여성을 그냥 두지 않는 것, 여성에게 특정한 삶을 강요하는 건 가부장제 탓이다.
여성의 욕망이란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욕망이지 도덕심이 아니다.
여성의 욕망이 아름답게 발현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 한구석에서 그나마 여성의 욕망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다 신기루 같다.
하지만 경험으로 남아 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창간호. 한겨레 자료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완간호. 쿠바 여성작가 아나 멘디에타의 작품 ‘몸 위의 꽃들’을 표지로 했다.
멘디에타는 서른여섯 나이에 34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생을 마감했다.
한겨레 자료  
맹렬하게 뒤집었지, 유숙열의 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