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듣는 법정]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증거 불도저로 은폐한 한국군… 피해자가 외국인이면 역사 정의도 예외인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68살 응우옌티탄이 2025년 6월23일 한베평화재단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은 총 130개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오직 2개 사건만이 한국 법원에서 소송으로 다뤄지고 있다.
하나는 퐁니마을 사건으로, 피해자 쪽이 제출한 명확한 증거를 바탕으로 ‘학살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소송이다.
둘째는 하미마을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학살을 조사하라’고 요구하는 소송이다.
이번 글에서 들여다볼 ‘날짜’는 후자인 하미마을 사건의 변론일이다.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68)이 서울고등법원에 직접 출석해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호소한 2025년 6월18일이다.
그는 호소했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됐지만, 우리 하미마을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화해위 조사를 기다렸지만, 위원회 결정은 우리에게 매우 큰 실망을 안겨줬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책임져야 합니다.
하미에서 아무 죄 없는 우리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는 위원회가 고의로 하미 사건을 조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피해자에게도 위계가 있다.
증거가 남아 있는, 증거를 확보한 사건의 피해자가 앞자리다.
세상의 관심도 피해 회복도 먼저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최소 추정치는 1만여 명이다.
그 죽음들 가장 앞에 1968년 2월12일 발생한 퐁니마을 학살이 있다.
2000년부터 기적같이 증거가 모였다.
미군의 조사자료 확보, 한국 정부가 작성한 ‘파월한국군전사’에 해당 일자의 작전 부대 특정, 그 작전 부대원들의 학살 인정까지. 그렇게 퐁니마을 학살은 그 증거를 통해 가해국인 한국의 법정에서 판단을 구하는 최초 사건이 될 수 있었다.
1, 2심 승소라는 기쁨도 이어졌다.
피해자에게도 위계가 있다
베트남 중부 다낭 인근에 있는 하미마을은 퐁니마을에서 차로 15분 거리다.
퐁니마을 학살이 벌어지고 열흘이 지난 1968년 2월22일, 한국군은 하미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135명을 학살했다.
살육이 끝나고 밤이 되자 도망쳤던 이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이 주검들을 겨우 수습했다.
한국군은 이 현장을 지켜본 걸까? 증거를 남겼다고 생각한 걸까? 다음날 한국군은 다시 마을로 들어와 수습된 주검 위로 불도저를 몰았다.
남겨진 이들은 조각난 자식과 부모를 온전히 모아 묻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학살 이후 하미마을에선 피해자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 시민사회와의 교류도 퐁니마을만큼이나 활발했다.
덕분에 2001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단체의 지원을 받아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퐁니마을과 같은 기적은 없었다.
국가범죄는 권력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죄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남겼다고 해도 삭제하고 은폐하는 게 기본값이다.
학살은 구조적으로 계속된다.
일부의 예외가 ‘해결’되는 듯하지만, 절대다수의 고통은 침묵과 기다림 속에 다시 한번 불도저 밑으로 들어간다.
퐁니마을이 예외였고, 하미마을이 보편이었다.
퐁니마을이 압도적인 증거를 가해국 법정에 제출하며 소송을 시작한 것이 2020년이다.
2년 뒤인 2022년 4월 하미마을 피해자 5명은 ‘책임 있는 자가 조사해 진실을 밝히라’며 다른 문을 두드렸다.
마침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같은 과거 국가폭력 문제를 조사해 진실을 규명하는 공식 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활용한 것이다.
진실규명 신청 1년 만인 2023년 5월, 진실화해위는 외국에서 일어난 외국인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은 조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진실화해위 관련 법령 그 어디에도 피해자가 ‘외국인’인 사건을 배제한다는 내용은 없다.
1기, 2기 합쳐 10년 가까이 운용된 진실화해위 역사 중에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각하한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피해자가 일본인인 사건을 조사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한국인이 학살당한 사건은 조사하겠지만,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인 학살 사건은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조사 거부를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이 시작됐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68살 응우옌티탄(앞줄 왼쪽)이 2025년 6월18일 임재성 변호사(앞줄 오른쪽)와 손잡고 서울고등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어떤 나라든지 파병 결과에 책임져야”
2025년 6월18일 오후 4시,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311호. “안녕하세요, 재판장님. 저는 하미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입니다.
”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은 퐁니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과 동명이인이다.
둘은 2018년부터 함께 한국을 방문해 활동했지만,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은 국가배상소송의 원고가 될 수는 없었다.
진실화해위에서도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가해국 판사에게 호소하기 위해 법정에 섰다.
“재판장님, 저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저와 함께 진실규명을 요청한 제 오빠 응우옌꼬이는 올해 80살입니다.
최근 오빠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건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제 바람은 크지 않습니다.
그저 저 같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랍니다.
하미의 고통이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할 역사임을 인정해주세요. 도와주십시오.”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의 진술 이후, 피해자 쪽 대리인으로서 나의 진술이 이어졌다.
“이 사건의 쟁점은 피해를 인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원고들의 주장이 맞는지 조사라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조차 외면당해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국가폭력 문제를 청산해온 우리의 정의로운 역사가 피해자가 외국인인 경우는 제외된다는 반쪽짜리였습니까? 진실화해위의 이 결정은 이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와 과거사 청산 전체의 원칙과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부디 바로잡아주십시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반쪽짜리인가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은 학살 당시 10살이었다.
방공호에서 어머니가 그를 꼭 껴안았다.
방공호에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이 터졌고,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죽었다.
그는 어머니가 차마 껴안지 못했던 남동생의 주검 옆에서 한참을 있다가 겨우 구출됐다.
전쟁고아로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서울고등법원은 2025년 8월13일로 판결 선고일을 잡았다.
그의 가족과 삶을 파괴한 것에 대해, 그 고통에 대해 말할 기회라도 달라는 요구에 법원은 무엇이라 답할까. 응우옌티탄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시간이 없는 건 대한민국이다.
임재성 변호사
*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가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마주한 순간들, 그 법정 안팎의 이야기를 ‘열두 번의 날짜’를 통해 소개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학살 피해자가 한국인 아니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진실화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