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가 필요해]진보정치가 필요해①-비동의 강간죄
민주당 비동의강간죄 도입 철회 앞 절망...“들어주는 후보 있어 죽지 않고 두드리기로”
이지연(25·가명)씨가 2025년 6월2일 서울 강남역에서 권영국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류석우 기자   “정치는 아픈 곳에 말을 건네고 아픔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일한 진보 후보이던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표가 한 말이다.
권 대표는 대선 과정에서 ‘아픈 곳’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선은 끝났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겨레21은 이 현장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독자에게 길어 올린다.
_편집자    2025년 1월의 어느 날, 이지연(25·가명)씨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울 동작대교 위에 섰다.
그 자리에서 유서도 썼다.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순간, 뒤에서 불이 환하게 켜졌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왜 죽으려 했는지를 물었다.
지연씨가 그간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 현행법이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용기를 내서 다시 7년 전으로 돌아갔다.
  신고하지 못한 성폭행 피해 2018년 봄, 지연씨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동아리 선배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추행이 이뤄지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겁이 났다.
술에 취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학교 선배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때 할 수 있던 건 말로 거부 의사를 계속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배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강간까지 이어졌다.
그때 지연씨는 만 18살, 미성년자였다.
사건 이후 지연씨는 신고하지 못했다.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다.
혼자 법과 판례를 찾아보면서 절망감은 깊어졌다.
찾아볼수록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한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그 와중에 선배는 먼저 연락해 ‘사건에 관해 얘기를 해야겠다.
안 그러면 이걸 강간이라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남자 집에 쉽게 따라오는 것이 잘못이라며 가스라이팅도 했다.
지연씨는 염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부모를 생각했다.
학교생활을 생각했다.
찾아본 법과 판례를 생각했다.
입학하자마자 겪은 사건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탓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해, 그리고 이듬해 학교와 기숙사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학교생활도, 친구관계도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 해리 증상에 시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위해 싸우는 단체들의 존재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비동의강간죄를 향한 입법 노력이 계속 이어져왔음을 알았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어요. 저와 비슷한 사례에서 가해자가 처벌받는 세상이 온다면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했거든요.” 2025년 6월23일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난 지연씨가 말했다.
  7년 만에 낸 용기에 돌아온 것은 지연씨에게 2024년은 다시 절망으로 들어간 해였다.
더불어민주당이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10대 공약에서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철회한 것이다.
지연씨는 ‘내가 죽는 게 빠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해 가해자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절망과 무력감은 극에 달했다.
2024년 12월 고민 끝에 가해자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지연씨는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한겨울 지연씨가 동작대교에 오른 이유다.
2025년 1월의 그날, 경찰은 지연씨 이야기를 사건으로 접수하지 않았다.
사건이 되기 어려울뿐더러 무고죄와 명예훼손의 위험이 크다고 했다.
변호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치 않은 관계를 당했고 저는 저항할 수 없었는데, 모두가 무고죄와 명예훼손 이야기를 하니까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그랬던 그가 희망을 본 건 지난겨울 광장에서였다.
광장에선 비동의강간죄를 포함해 정치권이 듣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지연씨는 적극적으로 정치인들에게도 연락했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10여 차례 트위트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고, 김재연 진보당 대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에서 비동의강간죄를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답장만 보내왔다.
다시 무력감에 빠져들 때 권영국 당시 민주노동당 대통령 선거 후보가 지연씨가 보낸 편지에 답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권 후보는 영상에서 지연씨 편지를 언급하며 “당선되면 여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비동의강간죄를 반드시 제정하겠다고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이지연(25·가명)씨가 2025년 6월2일 권영국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의 서울 강남역 유세 현장에서 ‘비동의강간죄\'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류석우 기자 “어쩌면 내가 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대선 후보에게 응답을 받은 거잖아요. 이렇게 목소리를 들어주는 후보가 있다는 생각에 죽지 말고 계속 문을 두드려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지연씨가 말했다.
강간죄의 판단 기준을 ‘상대방 동의 여부’로 변경하자는 취지의 비동의강간죄는 제20대 국회에서도 제21대 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제22대 국회에선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정혜경 진보당 의원이 2025년 3월 발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아직 법안 발의에 필요한 의원 10명을 구하지 못했다.
정 의원은 한겨레21에 “발의는 당연히 할 계획이지만 (공동발의에 이름을 올릴) 의원들을 찾아야 한다”며 “어려운 상황이지만 더 노력해보겠다”고 말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도 시민 5만 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비동의강간죄가 파격적인 것도 개혁적인 것도 아닌, 상식적인 것이라며 입법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허 조사관은 “현행법은 (강간이 성립하려면) ‘얼마나 저항했어’를 계속 증명하도록 한다”며 “폭행과 협박이라는 것은 대단히 남성 중심적인 판단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현행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구성 요건으로 하는데, 여성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강간은 폭행과 협박을 동원하지 않는다.
실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2024년 강간 피해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218명 중 153명(70.2%)의 사건은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충분히 저항하라고 하는 건 여성에게 너무 위험한 얘기예요. 강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방을 무력화하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많은 가해자가 있거든요. 그런데도 피해자에게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지만 피해자임을 인정해주겠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거죠. 이런 의미에서 (현행법이) 폐기되는 것이 맞아요.”(허 조사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인권이사회에서도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허 조사관은 “국회 법사위가 특정 성별과 특정 경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보니 그 앞에서 여성과 관련된 법들이 다 주저앉거나 지체되는 것”이라며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반대하는 건) 국가의 어떤 책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유일하게 비동의강간죄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민주노동당의 문정은 부대표는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와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때 법 제정 입장을 촉구하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사회적 공론화 차원에서 관련 토론회나 피해 당사자 간담회 등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25년 6월2일, 지연씨는 서울 강남역에서 마지막 유세에 나선 권영국 후보를 찾았다.
정치인 유세 현장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유세 내내 눈물을 흘린 지연씨에게 권 후보는 “다시는 그러지 말고 살아보자”고 말했다.
대선 이후에도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계속 이야기하겠다며 다시 만나자고 했다.
지연씨는 그때 ‘자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연씨에게 처음 가닿은 정치인의 말이었지만,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강간을 겪었는데 강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를 제가 겪은 7년이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만취 상태를 이용한, 위계 관계를 이용한, 의사에 반한 성관계를 당한 제 경험이 왜 강간이 아닌가요. 제가 일상을 다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이제 정치가 답할 차례다.
 
강간을 강간이라 인정하지 않는 정치, 다리 난간 내몰린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