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들]-인천 계양 편
노린재 탓에 망한 작물 보며 든 생각… 그래도 예쁘게 맺힌 오이에 큰 기쁨
정글이 돼버린 텃밭에 오이가 예쁘게 맺혔다.
경기도 양평에서 ‘종합재미농장’을 일구는 정화와 신범 부부는 해마다 특별한 사진전을 연다.
매년 지난해 농사에 대한 기록을 담은 사진전을 열었던 그들은 2024년을 마지막으로 사진전을 그만둬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준비 과정이 너무 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소중한 손님을 초대해 농사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놓칠 수 없는 일. 정화와 신범은 묘안을 냈다.
기획과 준비에 들이는 힘은 덜어내되 그들의 농사와 삶의 핵심인 재미를 중심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전은 농장에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이벤트로 바뀌었다.
사진전 방문객에게 역할이 주어졌는데, 농장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 전시 한편을 장식하는 것과 즉석 시 ‘어이쿠’를 지어 사진과 함께 거는 것이다.
어이쿠는 글자 수 5/7/5의 17음이 형식인 일본의 짧은 시 ‘하이쿠’를 본떠 신범이 지은 말로, 그는 밭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어이쿠로 담아낸다.
신범은 정화와 함께 펴낸 두 번째 책 ‘농사가 재미있어서’에도 절기마다 지은 어이쿠를 담았다.
하지를 주제로 한 그의 어이쿠는 이렇다.
“무더운 여름/ 새벽에 일을 하고/ 낮잠을 자자” 그 전까지는 신범 혼자만의 유희였다면 이제는 손님도 함께 어이쿠를 지어 전시회를 한다.
때마침 대만과 중국에서 온 연구자 친구들이 우리 집에 머물고 있어 그들과 함께 방문했는데, 중국 한자로 쓰인 어이쿠가 한글 어이쿠 전시에 합쳐져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
쓰는 언어는 달라도 계절감을 담은 어이쿠를 지어달라고 하니 모두 러브버그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인천에는 지금 어디든 러브버그가 잔뜩 붙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러브버그는/ 노린재에 비하면/ 암것도 아녀”라고 적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가해하는 식물이 없는 러브버그는 나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니까. 이미 밭에 다양한 종류의 노린재가 등장해 올해는 완두콩부터 해치기 시작한 것이 훨씬 큰 공포다.
완두는 줄만 잘 매주고 열심히 따 먹기만 하면 되는 작물인데, 올해는 노린재 때문에 제대로 영글지 못한 꼬투리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완두는 텃밭을 하고 난 뒤부터 돈 주고 사 먹는 작물이 아닌데도 3㎏을 주문해 먹었고, 주문한 농장에서도 노린재 피해를 이야기하며 완두콩을 보내줬다.
완두콩을 갈무리하며 여기저기 까만 구멍이 뚫린 채 모양이 일그러진 꼬투리를 보니 농가에서도 마음고생이 심했겠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러브버그는 개체수가 너무 많아 꽃을 수확할 때 집에 딸려 온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작물을 해치지는 않으니 오히려 감사한 곤충이다.
남들은 러브버그가 많아도 너무 많다고 원성이지만 나는 텃밭의 노린재가 모두 러브버그로 바뀐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럼 아침마다 땡볕 아래에서 노린재를 잡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테니까. 해가 길고 날씨가 더워지니 벌레도 창궐하지만 식물도 물이 오른다.
임시로 얇은 대나무를 꽂아뒀던 고추와 가지에도 제대로 된 지지대로 바꿔줘야 하고, 풀도 빨리 베어줘야 하지만 습기와 더위에 지쳐 당장 할 일이나 계획 같은 건 내일의 나에게 미룬 채 도망치기 바쁘다.
그래도 예쁘게 맺힌 오이 몇 개 따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즐겁다.
방망이로 탕탕 때려 중국식 오이탕탕이를 해 먹을까, 소금에 절여 꼬들꼬들하게 무쳐 먹어볼까. 올해는 몇 라운드가 될지 모르는 노린재와의 싸움이 2라운드로 접어드는 시기이지만 일단 오이는 나의 승리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여름 농사, 러브버그는 암것도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