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11명 오간 경내 5만5천여 그루 살아… 수종에서도 읽히는 심은 이의 생애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옛 본관 터에 있는 740살 주목. 이종근 선임기자
서울 북악산 끝자락에 완만한 비탈이 있다.
등마루와 골짜기가 있고 두 갈래 계곡물이 흐른다.
그 숲속에 청와대 본관(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집)가 좌우 대칭으로 들어서 있다.
본관 아래 대정원과 정문이, 관저 아래 상춘재와 녹지원이 있다.
남쪽 가장자리 담장을 따라 동서로 영빈관, 경비단, 경호실과 비서들이 일하는 여민1~3관, 헬기장과 춘추관이 일렬로 배열됐다.
그 사이사이 5만5천여 그루나 되는 나무가 산다.
최고 권력자들은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 이상 사는 나무를 청와대 경내에 심었다.
2025년 8월1일로 관람 중단이 예정돼 더는 시민에게 공개되기 어려운 청와대 나무들의 삶과 역사를 한겨레21이 두 차례(2025년 6월25일, 7월1일) 걸쳐 살펴봤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옛 본관 터에 있는 740살 주목. 이종근 선임기자 연병장 닮은 ‘대정원’에 도열한 소나무들 1991년 9월4일 새 본관 준공식 때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전통·문화가 농축된 우리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집무실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리의 집을 짓게 되었다”고 말했다.
옛 본관은 다섯 명의 대통령(이승만·윤보선·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 40여 년간 사용했다는 의미를 갖는 공간이지만, 1939년 일제 때 조선 총독이 세운 것 또한 극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었다.
‘드높아진 나라의 위상에 어울리는 청와대’(본관 앞 표지석 중)를 짓겠다는 바람을 담아 1989년 7월부터 2년2개월에 걸쳐 5m 깊이 골짜기를 메우고 등성이를 깎는 등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현재 청와대 공간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좌우 대칭 구조의 동·서관 정면에 무시무종(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함)을 뜻하는 팔각 문양을 새겼다.
본관 바로 앞에는 불멸·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10그루씩 동서 두 줄로 모두 20그루 서 있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오르는 길엔 반송(盤松)이 좌우 27그루씩 도열해 있다.
이 소나무들 사이에 잔디밭(1480평)이 앉아 있다.
학교 운동장이나 군대 연병장과 똑 닮은 공간임에도 ‘대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본관 앞 소나무. 깊이 5m의 마른 우물이 만들어져 있다.
1989~1991년 청와대 본관 신축 과정에서 계곡부를 성토할 때 주변에 있던 소나무를 살리고 주변에 석축을 쌓았다.
이종근 선임기자 청와대를 함께 찾은 박정기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 대표활동가가 대정원 남단에 식재된 소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며 “우리 전통 공간에서 집의 남쪽에 있거나 나무를 심어 조성하는 것을 안산(案山)이라 한다.
풍수지리를 믿냐 안 믿냐를 떠나 우리나라 대표 공간이다.
두 그루 식재는 ‘삼점식재’(세 그루를 한 곳에 심는 것) 내지 홀수 식재 같은 정통 양식에 맞지 않아 어색하다”고 말했다.
관저·춘추관·영빈관 앞엔 모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식재돼 ‘삼점식재’ 양식이 지켜졌다.
박 활동가는 30여 년째 조경 일을 한다.
청와대 터 정중앙에 있는 옛 관저는 1993년 11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 의해 철거됐다.
“문민시대를 맞아 민족자존과 민족정기를 되찾고자” 하는 뜻이라고 했다.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다.
철거된 터에 지하철 동대문운동장역을 공사하면서 나온 약 3천㎥ 흙을 쌓아 올렸다.
조선총독부가 잘라낸 산등성이를 되살린다는 취지였다.
700평 남짓 동산이 뚝딱 만들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이 심은 산딸나무·복자기나무와 박근혜 대통령이 기념식수를 한 정이품송 후계목이 키 작은 산철쭉들과 함께 자란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녹지원 실개천 옆에 있는 230살 회화나무. 2022년 10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종근 선임기자 740살 터줏대감 주목, 천연기념물 못 된 사연 그 한복판에 740여 살(국가유산청 추정)로 청와대 경내 최고령 나무인 주목이 ‘지팡이’(지지대) 하나 짚고 서 있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흔하지만, 주목은 해발고도 1200m 이상 높은 산이 고향(자생지)이다.
그 먼 옛날 고려왕조 별궁이던 북악산 자락까지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됐을까 궁금한 까닭이다.
밑동부터 살아 있는 붉은 줄기와 고사해 하얗게 변한 줄기, 여기에 이끼가 덮인 초록빛 줄기가 어우러져 용틀임하듯 하나의 몸통을 이뤘다.
키 6.5m에 가슴 높이 둘레 3m다.
촘촘하게 뻗은 바늘잎들이 짙푸른 색으로 선명했다.
청와대 터의 긴 역사를 이어주는 이 터줏대감은 1993년 옛 본관 터를 성토하면서 이식됐는지가 논란이 됐다.
2022년 10월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이 청와대 노거수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다.
당시 녹지원의 반송 1그루(170살), 회화나무 3그루(각 230살), 말채나무 1그루(150살)와 버들광장의 용버들 1그루(100살) 등 6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전영우 당시 문화재위원장은 언론 설명회에서 “조사에 의하면 주목은 옮겨심은 나무라는 것이 밝혀져 애초부터 천연기념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꼭 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식된 나무는 가치가 없다는 얘긴데, 함께 주목을 찾은 박상진(85) 경북대 명예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93년 당시 청와대 조경을 했던 분들을 인터뷰해보니, 이 주목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며 “성토하면서 약간 위로 옮겨졌을 수는 있지만 다른 데서 옮겨온 것도 아니고 청와대 경내에 계속 있던 것은 분명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무를 보는 눈이 이렇게도 주관적인 것 아니겠어요.” 노교수가 덧붙였다.
박 명예교수는 2019년 10월 경호처 의뢰로 1년2개월에 걸쳐 처음으로 청와대 수목 조사를 진행했고, 2022년 5월부터 2년 넘게 청와대에 상주하며 ‘청와대재단’에 수목 관리 조언을 하고 있다.
1948년부터 2022년까지 74년간 대통령 11명이 거의 매년 청와대 경내에 기념식수를 했다.
권력의 무상함이랄까. 푯말이 남아 있는 것은 26건. 박 명예교수가 사진 자료 등으로 확인한 6건을 포함해 32건만 ‘대통령 기념식수’로 공식 확인된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대통령 나무’가 더 많다는 의미다.
정권이 바뀌면 전임자가 한 일은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없어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녹지원의 170살 반송. 이종근 선임기자 왜색 향나무 심고 10개월 뒤 죽은 박정희 16년간 청와대에 살았던 박정희 대통령이지만, 표석이 남은 나무는 1978년 12월23일 영빈관 준공 기념으로 심은 가이즈카향나무가 유일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박정희 군부독재’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다.
같은 해 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체육관 선거’로 99.9% 찬성(2578표 중 무효표 1표)으로 당선됐고, 임기 6년 제9대 대통령 취임을 나흘 앞두고 있었다.
1천 년 이상 사는 향나무를 통해 영원한 권력을 바랐을까. 그는 기념식수 10개월 뒤 사망했다.
평생 ‘친일’ 꼬리표를 떼고 싶어 했지만, 일본을 연상시키는 가이즈카향나무 한 그루만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밤나무·감나무 같은 유실수나 무궁화·모감주나무 등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물을 특정하긴 어렵다고 한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영빈관 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8년 12월23일 기념식수한 가이즈카향나무 . 이종근 선임기자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식목일을 맞아 상춘재 앞에 백송을 심었다.
백송을 좋아해 다른 곳에도 심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살아남은 것은 이 나무 하나다.
심을 당시 나무의 나이는 38살. 2025년에는 80살이 됐다.
백송은 보통 60살만 돼도 고고하게 하얀 껍질을 내는데, 여전히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어떤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생긴 일이겠지만 ‘전두환 백송’이라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깨끗함과 고결함을 상징하는 백송을, 광주 학살을 비롯해 무수한 악행을 저지른 전두환이 좋아했다는 것 자체가 비웃음의 소재다.
“백송을 좋아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묻자, “‘민주’나 ‘정의’는 (전두환과) 어울립디까?”라고 박상진 명예교수가 답했다.
1981년 전두환 등 신군부가 만들어 10년이나 존속했던 정당이 ‘민주정의당’이다.
청와대에는 자연스러운 서식처는 드물고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녹지원 남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서양에서 온 루브라참나무가 있고, 그 아래 우리나라 눈주목이 있다.
맞은편 건너에 일본 출신 계수나무와 중국에서 온 메타세쿼이아가 자라는 식이다.
“청와대 조경, 기념식수에 일관된 기조나 철학이 있지 않고 경향도 읽히지 않아요. 그때그때 대통령이 좋아하거나 조경 담당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무를 심는 식이죠. 우리 나무를 심는다는 개념도 없었던 거 같아요.” 박상진 명예교수가 말했다.
  ‘전두환 백송’은 왜 하얀 껍질 못 낼까 그래도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고 후원으로 다시 활용되기 전부터 청와대 터를 지켰던 노거수들이 있다.
대표적인 나무가 녹지원 주변의 230살 회화나무 세 그루와 170살 반송이다.
특히 반송은 밑동부터 아름드리 몸통 줄기가 세 갈래 올라와서 다시 8개의 굵은 줄기로 갈라지고, 다시 사선으로 줄기 수십 개와 가지 수백 개를 뻗어냈다.
키 7.4m 수관(잎과 가지) 넓이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17.2m에 이른다.
보통 소나무처럼 곧게 자라지 않고 자그마한 밥상(盤)처럼 낮고 둥글게 자라는 것이 특징인 반송이 이런 거목으로 우람해졌다.
경북 상주 상현리 반송(500살, 키 15m), 전북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600살, 22.8m) 등 다른 천연기념물 반송보다 키는 못 미쳐도 수관 넓이는 뒤지지 않고 균형 잡힌 형태도 견줄 만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정기 대표활동가는 “다른 청와대 천연기념물은 청와대라는 특별한 공간의 특성 때문에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반송 앞에서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경호실과 여민2관 사이 버들마당에 있는 천연기념물 용버들은 100살에 키 15m, 수관폭 18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용버들이다.
버드나무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잎이 한올 한올 말렸고, 축축 처진 가지도 하나같이 배배 꼬여 용이 승천하는 모양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파마버들, 곱슬버들이라고 한다.
강풍 피해를 막고, 밀식된 환경에서 광합성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중국이 고향인 용버들은 다른 버드나무류와 마찬가지로 원래 물가에 산다.
지금은 건물과 찻길로 인해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청와대 경내에는 본관 쪽에서 시작해 경회루로 흐르는 대은암천과 관저에서 발원해 향원정으로 흐르는 ‘이름 붙지 않은’ 실개천 두 갈래의 물길이 나 있다.
이 실개천이 옛 본관 터와 상춘재 사이를 흘러 버들마당까지 이른다.
박상진 명예교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즈음에 조선총독부가 이 용버들을 심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이 용버들이 2022년 10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음에도 청와대재단 업무 공간이라는 이유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밑동 주변 지름 2m 공간을 제외한 수관 아래가 대부분 포장돼 있어 정상적인 뿌리 생육이 어려워 보였다.
‘천연기념물(식물) 관리지침’은 ‘노거수는 최소한 수관폭 이상의 생육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답압(밟아 주는 일)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제대로 일하기 위한 각오”(2022년 3월20일)라는 둥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청와대를 관광지로 바꾸었다가 3년여 만에 대통령 집무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대혼란을 벌인 장본인은 현재 내란 우두머리 혐의 등으로 재판·수사를 받고 있는 윤석열이다.
그는 2년7개월의 짧은 임기 동안 단 한 번, 2024년 식목일 부산 강서구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 사전투표에 참여한 뒤였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운동 기간에 지역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는데, 특히 이곳은 박빙이 예상되는 지역이었다.
본말이 전도된 수상한 행동에 당시 야권은 “선거 개입이며 관권선거”라고 크게 반발했다.
유례없이 나무 심기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이용한 사례로 기록됐다.
윤석열은 2023년 5월4일엔 어린이날을 맞아 용산어린이공원에 소나무 한 그루를 기념식수했는데, 우리나라 나무를 일본식으로 층층이 다듬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청와대 본관의 가장자리에 소나무만 심고 잔디만 깔아놓고 대정원이라고 했어요. 권위적인 공간을 만들려는 의도 같은데, 지나치게 답답함이 느껴져요. 늘 푸른 소나무 일색인 공간에서, 대통령이 계절감을 제대로 느껴가며 국민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새 대통령이 본관을 집무실로 다시 이용할 때 낙엽 지는 나무들을 함께 심어 대정원도 ‘진짜 정원’이 되도록 함께 살폈으면 합니다.
” 박정기 대표활동가가 말했다.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옛 본관 터에 있는 740살 주목. 이종근 선임기자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옛 본관 터에 있는 740살 주목. 이종근 선임기자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옛 본관 터에 있는 740살 주목. 이종근 선임기자   202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녹지원의 170살 반송. 이종근 선임기자                            
관람 중단 앞둔 청와대, 최고 권력자들 이야기 품고 선 노거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