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탈중심 범죄 네트워크, 국민국가의 공모자 되다
최근 국내외를 충격에 빠뜨린 캄보디아 한국인 집단 감금·납치 사태의 배후로 중국계 범죄조직이 지목되고 있다.
비단 중국을 향한 혐오와 두려움에 이끌린 선동만은 아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역시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푸젠갱 네트워크’를 거론했다.
( 제1586호 참조 ) 중국 푸젠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범죄조직이 대만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한국과 일본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김종호는 이들이 특별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에 가까운 만큼 ‘두목’을 잡아도 범죄를 근절하기 어려울 것이라 진단했다.
여러 나라와 지역에 걸친 중국계 범죄조직은 그간 숱한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소비된 만큼, 그리 낯설진 않다.
다만 그렇기에 오히려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이들 조직의 구성과 운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럴 땐 역사책이 도움이 된다.
이평수의 ‘제국의 저항자들’(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2025)이 대표적이다.
중국 비밀결사 연구자인 지은이는 삼합회를 비롯해 수많은 범죄조직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천지회의 탄생과 성장, 활동을 추적한다.
‘제국의 저항자들’은 여러 사료와 수많은 이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벽돌책’이지만, 이평수의 주장은 의외로 간명하다.
천지회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정치결사인 동시에 상부상조의 경제공동체라는 것이다.
그간 학계에선 두 주장이 대립해왔으나, 지은이는 천지회에 정치결사의 성격과 경제공동체의 성격이 모두 깃들어 있다고 본다.
바로 그 점이 천지회가 청의 탄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고, 마침내 제국을 무너뜨린 힘이다.
천지회의 시작은 ‘이야기’였다.
청을 도와 오랑캐 ‘서로’(西魯)를 물리쳤으나 도리어 강희제에게 버림받은 소림사 승려들이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후손을 만나 ‘반청복명’을 결의했다는 이야기가 19세기 이전 어느 순간에 출현했다.
적잖은 허구와 아주 약간의 진실, 무엇보다 기층의 불만과 바람을 담은 이야기는 수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팽창했다.
무수한 청중의 각색을 거치며 이야기에 살이 붙었고, 실체를 가진 조직 천지회가 되었다.
천지회 구성원들은 원래 성을 버리고 ‘홍’(洪)씨가 되어 의형제를 맺었고, 암호와도 같은 연극을 통해 조직을 유지했으며, 경제공동체로서 함께 약탈에 나서거나 반란을 도모했다.
지은이는 19세기의 천지회와 오늘날의 중국계 범죄조직을 곧바로 연결하지 않는다.
지극히 모범적인 역사가의 자세지만, 책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천지회의 먼 후손인 지금의 ‘푸젠갱’을 떠올리게 된다.
천지회는 거듭해서 재조직됨으로써 지속한 피라미드형 결사였다.
일단 만들어지면 끝없이 증식하며 세를 불렸고, 정체성을 공유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복수의 소문자’ 집단이었기에 다른 비밀결사와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목’이 있지만 수평적 네트워크에 가까운 푸젠갱과 그리 다르지 않다.
‘복수의 소문자’라는 천지회의 성격은 끝내 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푸젠갱에 그런 혁명성이 깃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젠갱은 마땅한 삶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동북아의 젊은이들을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동남아로 ‘배출함으로써’ 사회불안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가를 강화한다.
그 점에서 19세기 천지회가 ‘제국의 저항자들’이었다면, 21세기 푸젠갱은 ‘국가의 공모자들’이다.
물론 국민국가와 초국적 범죄조직의 밀월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다.
이번 사태가 다분히 징후적이라 느껴지는 이유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중국계 범죄조직 ‘푸젠갱 네트워크’가 19세기 천지회와 다른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