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업무중 동료와 나눈 사적 대화에 모욕죄 등 고소…대응 과정에 희귀병 걸렸지만 공단은 ‘의학적 인과성’ 부인하며 산재 연장 거절
이현영씨가 2021년 9월 이후 사내 모함과 산업재해 신청, 회사 고소·고발전에 대응하며 모은 자료들. 사진에 다 담기지 않은 자료가 더 많다고 한다.
이현영 제공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무더기로 쌓인 고소장을 바라보며 이현영(48)씨는 몇 번이고 그 질문을 곱씹었다.
회사 간부들의 공금 횡령을 발견해 바로잡았을 때? 창업주의 직원 성희롱을 감싸려는 경영기획이사에게 ‘이건 아니다’라며 맞섰을 때? 퇴사하려는 성희롱 피해자를 도왔을 때? 경영진과 신뢰가 깨진 몇몇 사건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회사가 노동자에게 이렇게까지 할 명분이 되진 않았다.
현영씨는 사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은 것도 모자라 산업재해로 휴직 중에 회사로부터 줄줄이 형사고소를 당했다.
소송에 대응하며 생긴 스트레스로 희귀병이 찾아왔지만 근로복지공단마저 현영씨 편이 아니었다.
나빠진 몸 상태를 호소하는 긴 글에 공단은 간단한 답장만을 보내왔다.
‘의학적 연관성이 명확지 않아 산재를 불승인한다’는 통보였다.
회삿돈으로 성희롱 합의금 낸 전 회장 현영씨는 40여 명 규모의 가족 경영 회사 ‘㈜한국승강기’에서 회계 일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경영진의 각종 비위를 목격했다.
최종관 전 회장은 비서에게 성희롱했다가 신고당하자 합의금 500만원을 회삿돈으로 냈다.
아들 최원재 경영기획이사는 고가의 아파트 인테리어를 회삿돈으로 하거나 회사 만기 보험금을 개인 계좌로 빼돌렸다(인천지법 부천지원 2024고단203 판결). 현영씨는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성희롱 피해자를 돕다가 경영진과 관계가 나빠졌다.
2021년 9월부터 조직적인 사내 모함이 시작됐다.
상사와 동료 직원이 근무 도중 갑자기 현영씨를 겨냥해 큰 소리로 욕설하는가 하면, 자기 물건이 훼손됐다며 현영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현영씨가 “내가 왜 그런 일을 하겠냐”며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경찰 피의자 조사를 받으며 극심한 분노와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러는 사이 회사는 현영씨 직무로 채용 공고를 올렸다.
결과적으로 물건 훼손 사건의 진범은 잡혔지만 무너진 마음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현영씨는 2022년 5월 적응장애를 진단받아 산재 요양을 시작했다.
대출금 반환 소송에 모욕 등 형사고소까지 이제라도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는 현영씨를 그냥 두지 않았다.
복리후생 목적의 사내 대출금을 현영씨에게만 딱 꼬집어 갚으라는 소송(대여금 반환 소송)을 냈다.
뒤이어 경영기획이사와 회사 각각의 명의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 업무방해죄 등 세 가지 죄목으로 형사고소했다.
현영씨가 사적으로 동료와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를 경영진이 갖고 있다가 한줄 한줄 문제 삼은 것이다.
범죄일람표에 적힌 범죄 혐의만 스무 가지가 넘었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제출한 건지, 회사가 내라고 요구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충격적이었죠.” 이현영씨의 사적 대화 내용을 문제삼아 형사고소한 (주)한국승강기 범죄일람표 갈무리. 회사의 횡령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이를 비판한 직원을 모욕죄 등으로 고소했다.
이현영씨 제공 2024년 6월, 이 사건도 모두 무혐의 처분이 났다.
1년 동안 현영씨는 경기도 김포경찰서를 수없이 드나들고 100쪽이 넘는 답변서를 써야 했다.
산재로 쉬는 동안 전혀 건강을 회복할 수 없었다.
“김포경찰서 강력·형사계부터 경제 1~7팀까지 전부 불려다녔”고 “밤마다 ‘벌금형이라도 인정되면 어떡하나’ 압박감에 잠을 설쳤다.
” 그 과정에서 만성 두드러기와 유전성 혈관부종이라는 희귀병을 얻었다.
현영씨는 산재를 다시 신청했다.
서류상 요양기간이어도 회사의 보복성 고소·고발로 전혀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영씨를 진단한 주치의도 “만성 두드러기 및 유전성 혈관부종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진단서를 써줬다.
국내 논문 중에도 “신체적 피로감과 정서적 스트레스 등이 만성 두드러기의 유발 및 악화 요인”(예영민 등, 2012)이며 “정서적 스트레스가 급성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정재우 등, 2022)는 내용이 있다.
현영씨는 이를 토대로 산재 연장을 신청했다.
자문의사의 서류 판단만으로 신청 기각돼 노동자가 산재로 요양하다가 기존보다 병이 악화하면 ‘재요양’을, 몰랐던 질병이 새로 발견되면 ‘추가상병’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공단은 둘 다 거절했다.
재요양에 대해선 “그 정도의 증상 악화로 보기 어렵다”고, 추가상병에 대해선 “기존 상병(적응장애)과 스트레스 영향보다는 개인적 요인으로 발생”했다고 결론 냈다.
환자를 직접 보지도 않고 서류만 검토한 익명의 공단 자문의 판단이 근거였다.
공단 자문의는 ‘기존 질병과의 의학적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인과관계는 없는 질환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곧 인과관계가 없다는 건 아니잖아요. 주치의와 자문의의 판단이 서로 부딪치는 상황이면 제3의 의료기관에 특별진찰을 보낼 수도 있고요. 그런 과정을 전혀 밟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면 노동자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이 말했다.
경영자단체는 장기요양 환자를 ‘나이롱환자’로 폄하하며 산재를 더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현영씨처럼 회사 쪽의 고소·고발과 주치의 진단서가 있어도 기각당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나마 최초 신청 때는 변호사와 노무사 등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참석하지만, 추가상병과 재요양 때는 의사들로만 구성된 공단자문의사회가 판단한다.
“추가상병 때부턴 사실상 질병과 업무 관련성을 의사 판단에만 맡기는 상황”이라고 권동희 일과사람 노무사는 지적했다.
오너 부자 징역형… 그러나 피해자는 결국 사직 산재 연장이 거절되자 현영씨는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회사가 자택으로 출근 명령서를 수차례 보내며 출근을 압박한 것이다.
복직 안내문엔 기존 업무와 전혀 무관한 일이 적혀 있었다.
분노와 체념감으로 현영씨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2025년 1월17일, 경영진의 횡령 재판 결과가 나왔다.
현영씨는 자신이 평소 문제를 제기한 비위 행위가 법정에서 얼마나 인정됐는지 알고 싶었다.
재판부는 최 전 회장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최 이사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기쁘고 후련할 줄 알았는데 허무하더라고요. 고통받은 시간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못하잖아요. 상담 선생님이 ‘어떤 결과가 나와도 허탈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이게 뭐지' ‘저 사람들은 저걸로 그냥 끝나는 건가' 하고요.” 가해자 처벌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피해자로서 훼손당한 지난날을 최소한이라도 보상받기 원했다.
그러나 공단은 현영씨의 호소를 무시했다.
공단은 한겨레21의 질의에도 “요양 중 발생한 스트레스 상황과 추가상병의 인과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결정한 것”이라며 기존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회사 쪽도 여전히 고소·고발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승강기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유연 쪽은 “(메시지의) 전파 가능성이 없어 불송치됐을 뿐, 상대방(이현영씨)이 업무 시간에 회사를 비방하는 카카오톡을 수십 차례 보낸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성희롱 합의금도 회삿돈으로…사내 횡령 지적한 직원이 겪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