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예방에도 사람의 ‘복원력’이 필요하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 논란을 세상에 처음 알린 황유미씨의 11주기인 2018년 3월6일 삼성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행진에 참가한 이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출발해 서초동 삼성전자 앞 반올림 농성장으로 향하고 있다.
맨 앞은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한겨레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25년 10월20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의 글 ‘국정자원 화재, 돌봄노동 업신여긴 나비효과’( 제1584호 참조 )는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를 계기로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다.
그동안 첨단기술로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이 화재 사건이 시스템의 충격 흡수 및 회복 능력, 즉 ‘복원력'(resilience)이 심각하게 약화됐음을 보여준 “기술재난”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얘기다.
글은 이러한 복원력 약화의 근본 원인으로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는 ‘돌봄노동'의 가치를 경시하고 저평가한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또한 모든 것을 목록과 서류로만 관리하려는 규격화된 행정의 한계와 부서 간 데이터 단절로 인한 시스템 결함이 결합되면서, 작은 불씨가 국가적 재난으로 번지는 ‘나비효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 분석이 유독 익숙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직업병 문제와 놀랍도록 닮아 있기 때문이다.
법과 절차로 겉모습은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이곳저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질병’ 재해는 적은데 사망은 많은 이유 우리의 산업재해 통계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업무상 ‘질병’ 재해자는 전체 산재의 약 19%에 불과하다.
하지만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사고’ 사망자의 1.5배가 넘는다.
이 비대칭은 직업병이 신고·인정·감시 과정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즉 ‘과소 추정'되는 경향이 강력함을 시사한다.
국제 비교를 보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진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전세계 업무상 사망의 약 86%가 직업성 ‘질병’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산재 통계에 나타난 낮은 ‘질병의 몫’은 통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병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는 우리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현장에서 발견되는 구조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류상 안전'에 갇힌 규격화의 한계다.
현재의 관리 방식은 ‘법령상 관리대상물질 목록에 있으면 관리, 없으면 제외' ‘서류상 요건에 맞으면 적합'에 가깝다.
하지만 현장의 진짜 위험은 공정 조건이 바뀌거나, 여러 유해물질을 동시에 사용하거나, 기계를 잠시 멈추고 세척·보수하는 비정규 작업 중에 급격히 증가한다.
이런 ‘틈새' 구간은 서류 기준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법적 요건을 충족했는데도 유해물질 노출이 줄지 않거나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다.
둘째, 위험 예측이 불가능한 ‘데이터 단절’과 시스템 결함이다.
사업장의 위험 요소를 미리 따져보는 위험성평가와 일터의 유해물질 농도를 측정하는 작업환경측정, 노동자 건강 영향을 확인하는 특수건강진단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각자 노동부에만 보고된다.
즉,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어떤 건강 신호가 나타나는지’를 한눈에 묶어 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시스템은 사전에 위험 경보를 울리지 못하고 문제가 터진 뒤에야 부랴부랴 사후 조사를 하는 ‘사후약방문’식 대응이 반복된다.
셋째, 국가 차원의 직업병 감시 인프라가 취약하다.
핀란드의 경우, 직무와 근무기간에 따라 노동자가 평균적으로 얼마나 유해물질에 노출됐는지 추정할 수 있는 ‘직업별 유해물질 노출정보 시스템’(FINJEM·Finnish Job-Exposure Matrix)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자료를 병원 진료 기록이나 직업병 검진 자료와 연결함으로써, 어떤 직업에서 어떤 병이 생길 위험이 큰지 예측해 관리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위험을 일찍 알아내는 데 활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중요한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직업별 유해물질 노출추정 시스템(한국형 JEM)을 개발하고, 위험성평가-작업환경측정-특수건강진단-산업재해기록 같은 데이터를 하나로 연결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관리하는 통합감시 체계가 필요하다.
넷째, 현장 전문가의 역할이 저평가돼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인용한 ‘돌봄노동 업신여김’이다.
현장에서 위험을 관찰하고 개선하는 산업위생관리기사와 직업병을 진단하는 의사는 직업병 예방의 핵심 인력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들의 전문적 판단이 단가 경쟁, 기한 준수율 같은 지표에 밀린다.
일터의 산업보건 전문가들이 솜씨를 발휘할 기회도 없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는 셈이다.
정부 대책 역시 감독·제재와 민간기관 평가·퇴출을 강조할 뿐, 이들을 국가 예방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육성하고 보상하는 설계는 약하다.
이는 기술 시스템의 오류를 보완해야 할 ‘사람’이라는 복원력을 경시하는 것과 같다.
‘서류 완비’ 놓아주고 시스템 복원력 높이자 무너진 복원력을 회복하고 실질적인 질병 예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책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평가 방식을 바꿔야 한다.
‘보고용 문서' 만들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사업주 스스로 위험을 점검하고 개선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위험성평가가 서류가 아닌, 사업장 운영의 핵심 도구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데이터가 연결되고 순환되도록 해야 한다.
위험성평가-작업환경측정-특수건강진단-직업병 데이터를 사업장과 업종 단위로 통합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형 JEM 구축 등 업종·공정별 위험을 정량화하고, 변동이나 이상 징후를 자동으로 감지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
셋째, 현장 전문인력을 ‘공공 인프라'로 격상시켜야 한다.
산업보건서비스 인력을 단순한 민간 서비스 공급자가 아니라 국가 예방 시스템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들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경력과 역량에 맞는 합당한 보상 체계를 마련해 숙련된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넷째, 취약 사업장 지원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 중인 소규모·취약 사업장 지원 정책이 점검이나 처벌 위주가 아니라 장기적인 노출-건강 데이터 모니터링 같은 실질적인 질병 예방 인프라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직업병 예방은 단순히 장비를 구비하고 서류를 형식적으로 채운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숙련된 인력, 연결된 데이터, 그리고 반복되는 학습과 개선이라는 세 축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보고서상의 정상'이 아닌 ‘실제 건강한 일터'가 가능하다.
그때 통계 아래 가라앉아 있던 직업병의 그림자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번 재난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겉으로 보이는 ‘정상'에 안주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스템을 지탱하는 복원력을 키울 것. 직업병 예방 시스템 역시 이 복원력을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
  박정임 순천향대 교수(환경보건학) ·한국산업보건학회 부회장
국정자원 화재로 본 돌봄노동의 중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