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너머n']5년째 싸움 중인 딸과 아버지… 전문가 “정상적 의사결정 불가능”이라는데 검찰 “가해자 말에 답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관계자들이 2021년 4월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불법촬영 동반 준강간 사건’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범죄 피해자가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드립니다.
”
약물 및 디지털성폭력 피해자인 김지현(가명)씨였다.
언론과 국정감사 등을 통해 알려진 이 사건은 고소 뒤 5년이 흘렀지만, 아직 제자리였다.
강간 약물에 노출됐다고 판단할 만한 영상과 사진이 440개 정도 있고, 검찰의 감정 의뢰를 받은 전문가 2명이 모두 영상·사진 속 피해자의 상태에 대해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그는 여전히 약물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검찰이 강간 약물을 특정할 수 없고, 영상 속 지현씨가 가해자의 말에 답변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현씨 사례는 한국에서 ‘약물 이용 성범죄’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범죄 피해자가 형사절차에서 어떤 식으로 배제·소외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약물 준강간 사건, 경찰 송치율은 48.8% 불과
‘약물 이용 성폭력 범죄’(DFSA·Drug-Facilitated Sexual Assault)는 1990년대 후반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DFSA는 피해자가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항거불능 상태가 된 것을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르는 ‘기회형 약물 이용 성범죄’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성폭력을 저지르는 ‘주도형 약물 이용 성범죄’로 분류된다.
일반 성범죄와 견주면 피해자를 무력화하기 쉽고, 피해자에게 사망 등 심각한 손상을 남길 수 있지만, 증거 확보가 어려웠다.
피해자가 약물중독에 빠질 위험이 있어 가중처벌이 가능하도록 별도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미국은 지에이치비(GHB·속칭 ‘물뽕’으로 불리는 강간 약물)를 단순 소지해도 징역 3년, 사용하다 검거되면 최대 20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영국은 ‘약물 이용 성폭력 범죄’를 부동의에 의한 강간으로 규정해 최대 종신형까지 처벌할 수 있게 했고, 디지털 전환기에 대응한 관계·성·건강 교육(RSHE) 지침을 개정해 스파이킹(spiking·음료에 알코올이나 약물을 몰래 타는 범죄)에 대비하는 등 관련 교육도 강화했다.
프랑스 역시 2024년 ‘지젤 펠리코 약물 성폭행 사건’(남편 도미니크 펠리코가 합의 없이 아내에게 약물을 먹여 기절시킨 뒤 성폭행하고, 성적으로 복종하게 만들었던 범죄)을 계기로 국가 주도의 캠페인 등 성범죄 관련 조처를 확대하고 있다.
이렇게 각국은 약물 성범죄에 대한 통계 분석과 모니터링을 매해 하고 관련 교육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만, 한국은 제자리걸음이다.
2019년 ‘마약류 등 약물 이용 의심 성범죄 수사지침’을 만들었지만 일선에서 적용되지 않고 있다.
2025년에도 수사기관은 ‘휴대용 약물탐지 키트’를 배부하고 “의심되면 거절하세요” 등의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사이 약물 이용 성범죄는 증가했고, 한국은 강간 약물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됐다.
경찰은 2025년 9월 GHB의 원료물질이자 임시마약류로 지정된 지비엘(GBL·감마부티로락톤) 약 8천㎏을 미국에 밀수출해온 한국인 부부를 검거했다.
‘클럽 버닝썬’ 사태에서 드러났던 클럽 내 약물 이용 성범죄 역시 근절되지 않고 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2024년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를 보면, 최근 3년(2021~2023년)간 클럽 내 마약사범 검거 인원과 마약류 입수량은 지속적으로 늘었다.
클럽 내 마약사범은 2021년 161명에서 2023년 686명으로 늘었다.
특히 GHB, 필로폰 등 약물 이용 성범죄에 쓰이는 향정신성 마약류의 2023년 압수량은 2022년에 견줘 45.7% 증가했다.
2020년부터 2024년 8월까지 약물 강간 등 준강간 성범죄 4743건 중 약 32.87%(1559건)가 강남3구(강남·서초·송파)를 비롯한 서울시 클럽 밀집 지역에서 일어났다.
사태가 악화하고 있지만 수사기관의 대처는 미온적이다.
2023년에 발생한 준강간 사건을 놓고 경찰의 송치율은 48.8%에 불과하다.
구속률도 5.2%에 그쳤다.
여전히 활동 중인 약물 성폭력 의사·변호사
약물 이용 성범죄가 ‘피해자의 문란함’에 기인한다는 인식은 편견이다.
김중곤 계명대 교수(경찰행정학)는 2022~2023년 나온 ‘주도형 약물 이용 성범죄’ 1심 판결문 41건을 분석해, ‘약물 이용 성범죄’가 일반 성범죄에 견줘 상대적으로 지인 관계에서 많이 발생했고 초범인 경우가 관련 전과가 있는 가해자보다 두 배가량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거나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라서 피해자가 제때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약물 이용 성범죄는 ‘수익 창출형 디지털성범죄’와도 이어져 있다.
김지현씨 사건에서 가해자는 전자우편에 ‘카지노 홍보’라는 제목으로 불법촬영물을 첨부한 바 있다.
특정 비제이(BJ·인터넷방송 진행자)들은 약물을 먹인 피해자를 성폭행하며 이를 생중계했는데, 이때 200명이 넘는 시청자 중 단 한 명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
인터넷방송을 미끼로 여자친구를 펜션에 불러내 수면제 섞인 술을 먹여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가해자들은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있다.
약물 등을 이용한 수면치료 과정에서 환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들은 피해자와 적극적으로 합의해 의사면허도 박탈되지 않았다.
가해자가 ‘초범’이라는 이유로도 감형이 이뤄진다.
2025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서울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이 동료에게 케타민 추정 약물을 먹인 뒤 모텔로 데려가 성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드러났다.
가해자는 현재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재항고 기각되면 휴대전화는 가해자 손으로
얼마 전 김지현씨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간 검찰은 가해자의 ‘사생활 보호’(영상 속 가해자는 특정 불가능하게 손 정도만 등장한다)를 이유로 피해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는데, 법원이 여기에 제동을 걸어 피해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앞서 검찰은 주요 증거 영상물을 감정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여전히 김씨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김씨는 법원의 판단 덕에 피해 영상을 분석한 뒤 약물 이용 성범죄 수사의 부적절한 관행과 수사관의 편견을 밝혀낼 예정이다.
5년 이상 이어진 싸움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완성된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애쓰는 그가, 그리고 딸의 곁을 지키며 싸움을 조력하는 그의 아버지가 부디 더는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김씨의 재항고가 만약 기각되면 400개 넘는 피해 영상이 담긴 휴대전화는 가해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약물 성폭력, 400개의 피해 영상도 부족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