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도를 만든 읍성과 작은 시장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섬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예성강과 합수하는 바다의 파수꾼 같은 섬이다.
석모도가 거느린 작은 섬들이 바깥 바다를 막아섰고, 안으론 강물이 뭍에서 싣고 온 온갖 걸 풀어헤치는 바다에 뜬 섬이다.
강화도에 닿는 바닷물은 온통 흙탕이다.
빠른 물살이 바닥 펄을 끊임없이 파헤쳐 만든 색깔이다.
저 물살을 해자 삼아 위급에 처한 나라가 궁성을 쌓고 강화를 맘껏 후리고 짓이겼었다.
▲ 교동읍성(읍내리)  화개산 전망대에서 바라 본 교동읍성(읍내리). 오른쪽이 남산으로 현재도 작은 항구다.
바다 건너 보이는 섬이 석모도, 그 너머로 길게 강화도 서안이 보인다.
ⓒ 이영천 교동도는 강화도 바깥 여러 섬 중 하나다.
이 섬은 강화를 거쳐서만 갈 수 있다.
늘 강화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존재로, 이 섬에도 다리가 걸렸다.
바다는 그럼에도 강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제법 깊어 보이는 물색이 차별 없이 퍼렇다.
물이 풍부해서인지 흐르는 굵기도 만만치 않다.
그 너머로 검은 산하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바다보다 높게 늘어져 누운 황해도 연백이다.
저 산하는 누군가에겐 뼈에 사무치는 흙이다.
한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발길 한번 내딛지 못한 땅이기 때문이다.
▲ 교동도(1872년지방지도)  조선 후기에 제작한 지도에도 '평야(平野)'라는 글자가 곳곳에 보인다.
섬과 섬 사이 갯벌을 막아 조성한 군둔전의 흔적이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2024년 북한 주민이 이 바다를 헤엄쳐 왔다.
예전의 판에 박힌 '~을 찾아서'는 분명 아니다.
그런 우스운 선전이 얼마나 낡은 명제인지 이젠 시민이 더 잘 안다.
그는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을 터이다.
출렁이는 2.5km 바다를 사력을 다해 헤엄쳤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
며칠 후면 당연히 되돌아갈 거라며 노를 저었다.
그렇게 황해도를 떠난 수만 명이, 이 섬을 그야말로 '임시' 터전으로 삼았다.
그리곤 세대가 세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2.5km 바다를 건너지 못한 시간이 까닥하면 1백 년을 넘길 기세이니… 예성강이 지척이다.
강 하구와 개성 사이가 옛 벽란도(碧瀾渡)다.
고려의 곡식 창고인 경창(京倉)을 두었던 국제무역항이다.
번성했던 항구가 짓뭉개졌는지, 아니면 분단으로 퇴화해버렸는지 지금은 행적조차 희미하다.
저곳을 지키려고 뱃사람과 군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 곤경을 감내해냈던가. ▲ 예성강 하구  사진 위 한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개성 송악산이다.
그 앞으로 바다에 면한 땅이 옛 '벽란도'가 있던 곳이다.
코리아(Korea)는 이곳을 드나들던 아랍 상인에 의해 유럽으로 알려졌다.
ⓒ 이영천 교역과 거래가 무척 활발했다.
명실공히 고려의 관문이었다.
안정적인 중국 송나라 체제가 뿌린 낙수효과다.
왜와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통항하였다.
이때 코리아(Korea)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알려지게 된다.
벽란도를 통해서다.
교동도에서 지척인 예성강 하구에서다.
유배지 교동도는 왕족 유배지로 최적지였다.
가둬서 감시는 해야겠고, 너무 멀리 방치해 놓으면 불안했으니 왕에게 교동도는 최적의 유배지였음이 분명하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경계 대상 1호인 동생 안평대군을 이 섬에 가둔다.
1453년 10월(음) 계유정난이 갈림길이다.
아우가 몹시 두려웠나 보다.
교동도에 가둔지 겨우 8일 만에 사약을 내려 죽여버린다.
▲ 연산군 유배지  위리안치 된 유배지가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탱자나무로 울타리 삼고, 무척 협소한 크기의 방과 부엌 한 칸씩이다.
화개산에 조성된 정원 안에 있다.
ⓒ 이영천 최악의 폭군 연산군도 이 섬에 유배와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역질을 앓다가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는다.
수많은 패악질과 여러 번의 사화를 빌미로 앗아간 목숨에 비하면, 무척 허망한 최후다.
조카 능양군의 반정으로 권좌를 잃은 광해군도 교동도를 거쳐 간다.
능양군은 백부를 능멸하고 싶었을 터이다.
광해가 교동도에서 죽인 동생 능창군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광해 또한 교동도가 싫었다.
자기 손에 죽어 간 형 임해군 때문에라도 여기 머무는 게 껄끄러웠을 터다.
얽히고설킨 원한 때문일까, 병자호란이 끝나고 제주도로 보내진다.
이 밖에도 수많은 왕족이 이 섬으로 유배를 온다.
▲ 교동읍성 남문  최근 복원한 흔적이 역력한 교동읍성 남문. 중죄인이 아닌 이상, 왕족이 유배 올 때마다 읍성 안에 머물렀을 개연성이 높다.
ⓒ 이영천 마지막은 고종의 조카이자 흥선대원군 장손인 이준용이다.
그를 앞세워 왕위를 찬탈하려던 대원군의 계획이 발각되어, 을미년(1895) 교동도에 잠시 유배 온다.
이렇게 유배 온 왕족을 보살펴야 했던 백성들 고난은 또 오죽했을까? 강화만큼 상처 입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만한 영광을 누리지도 못했다.
강화도가 고려와 조선의 서울을 지켜낸 선봉장이었던 탓에, 옆 교동도는 강화의 서출 노릇을 톡톡히 치러낸 셈이다.
작은 장터 짧은 2.5km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75년간 왕래가 끊겼다.
장터란 본디 오가고 만나고 사고팔고가 이뤄지는 곳 아니던가?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도록 뱃길이 끊겼으니…. 황해도와 교동도 사이 바다는, 그래서 언제나 차가운 겨울이다.
길이 끊겼음에도 황해도 사람들이 장터마저 잊고 산 건 아니었다.
2014년 개통된 교동대교로 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다만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초소에 신분증을 내보일 때, 단절된 75년 시간이 서늘하게 다가든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된 분단 현실을 비로소 체감한다.
섬에 들면 긴장이 이완된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인데도 말이다.
▲ 대룡시장  한국전쟁 때 황해도를 떠나 온 실향민들이, 기억으로 연백의 그것을 교동도에 재현해낸 재래시장이다.
무척이나 푸근한 정감을 시장이 안겨 줄 것이다.
ⓒ 이영천 섬에 들어 왕래가 끊긴 바다 너비의 두 배를 가면, 이채로운 작은 장터가 나타난다.
황해도 연백의 그것을 이 섬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란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억과 몸에 밴 습관으로 일구고 가꿔낸 장터다.
낡은 이발소는 모습뿐 실제는 국숫집이다.
황해도 입맛이 그대로 재현된 달큼하고 황홀한 장떡이 시중 빵값에도 미치지 못한다.
떡메 소리가 푸덕거린다.
상상 속 우주를 날아다니던 오래된 전자오락 기계도, 주름진 손마디 따라 뿅~뿅 노래한다.
돼지기름에 구워낸 호떡 속 흑설탕에 입술이 숫제 달착지근한 꿀통일 지경이다.
▲ 대룡 시장통  어린 시절의 한 시절로 데려다 줄 온갖가지 소품들이 즐비하다.
가서 꼭 코흘리개가 되어 보시길 권한다.
ⓒ 이영천 둘이 지나기에도 벅찬 좁은 골목이, 느리게 걷는 밝은 얼굴들로 그득하다.
골목에 든 모든 이들은 나이를 망각하니 깊이 팬 주름마저 시간을 잊는다.
모두가 어린 시절 웃음으로 되돌아간다.
뻥~하는 소리에 튀밥 튀기는 냄새가 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서 풍겨온 구수한 춘장이 발길을 잡아끌어 간다.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코흘리개 적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다.
교동읍성 섬이지만 너른 평야를 품었다.
지평선이 일망무제다.
흡사 김제평야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갯벌을 막은 간척지 아니면 느끼기 힘든 그런 풍경이다.
간척으로 일군 농토에서 재배한 쌀은 밥맛도 일품이다.
교동 쌀이 유명한 데에는 분명 그에 상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크기에 견주어 겨우 3천여 명이 살아가는 섬이다.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중이 높은 것도, 섬으로선 무척 이채로운 현상이다.
예로부터 항해가 쉽지 않은 바다였다.
바람과 물살이 사나워 바닥이 평탄한 평저선 항해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세곡선이 물살 세기로 유명한 손돌목을 울며 겨자 먹기로 지나야 했다.
그랬으니 이 바다에서 물고기인들 쉬이 건져낼 수 있었겠는가. ▲ 교동 평야  화개산 전망대에서 바라 본 교동 평야. 섬과 섬 사이 갯벌을 메워 펼쳐진 너른 평야가 무척 포실해 보인다.
ⓒ 이영천 본시 섬 셋이 제각각이었다.
떨어진 섬 사이 갯벌이, 언젠가부터 메워지기 시작한다.
고려 때로 추정한다.
사유는 단순하다.
요즘 말로 '수도방위 해군사령부'라는 위상 때문이다.
해상 방어에 있어 교동도는 바깥 바다를 막는 요충지로, 황해도 연안과 강화 상륙을 저지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에 해군기지를 두어 군사를 주둔시키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무엇보다 군량미 공급이 난제였다.
바다를 건너는 수고로움과 위험 때문이다.
따라서 군둔전(軍屯田)이 최적이었다.
주둔하는 군사들 하여금 직접 농사지어 군량미는 물론 식솔들 생계까지 감당케 한 것이다.
▲ 교동읍성(남문)  읍내리에 복원된 남문. 초라하게 아치만 남은 유적에, 최근 문루를 복원하였다.
성벽은 민가의 담장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퇴화하였다.
수군 통어영으로 위용은 자취도 남지 않았다.
ⓒ 이영천 그로써 차차 갯벌이 메워져 나간다.
섬과 섬 사이에 둑이 막히고, 물길이 생긴다.
부족한 농업용수를 가두는 저수지는 필수다.
화개산을 중심으로 북쪽 밤머리산을 향해 갯벌이 농토로 되고, 서쪽 수정산 쪽으로 땅이 잇닿아 나갔다.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다.
조선은 '경기 수영'을 두었다.
이때 지금의 읍내리를 중심으로 작은 성곽을 쌓는다.
중요도가 높아지자 경기, 황해, 충청 수영의 수군을 총괄하는 통어영(統禦營)으로 확대 개편한다.
경기도 관찰사와 같은 종2품 '삼도수군통어사'가 이곳에서 3도의 수군을 총괄했다.
▲ 교동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화개산과 교동향교, 그 아래로 교동읍성이 알밤처럼 토실하다.
바다에 접한 오른쪽 동문 옆으로 강화도 가는 동진(東津) 나루가, 왼쪽 아래 남문 밖으로 봉화대와 사직단을 가진 남산이 그려져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옛 지도에도 화개산 남쪽 향교와 그 아래 교동읍성이 마치 잘 영근 알밤처럼 토실하다.
넓게 펴진 평야는 살져 포실하다.
동문과 북문, 남문이 표시되었다.
동문 밖이 강화로 가는 나루터다.
남산에 봉화대와 사직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통어영 함선이 정박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강과 한강, 예성강이 배태한 강화만의 섬이다.
통일 한반도에서 교동도는 어떤 위상일까? 서울을 배후에 두고, 인천-고양-파주-개성-해주로 이어지는 광역대도시권(Megalopolis)을 상상해 본다.
활처럼 휜 바다 한가운데 교동도가 자리한다.
통일 정부도 이 섬에 해군사령부를 두어 바다를 안방처럼 활용할까?
왕족을 유배시키는 데 최적이었던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