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 방문기... 기억이 미화될 때, 진실은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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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 다치아라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
주변에는 당시 비행학교 건물과 훈련 받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김관식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어느 지역에나 존재한다.
마을 단위의 작은 전시장에서부터 국가가 운영하는 대형 기관에 이르기까지 분야와 형태는 다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진정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의도를 읽어내고, 그 뒷단에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방문이 아닐까. 이곳, 후쿠오카현 치쿠젠초에 위치한 다치아라이(大刀洗) 평화기념관. 언뜻 보면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공하는 안내서나 전시하는 방식, 홈페이지 문구 등을 한 발 떨어져서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을 해석하는 이들의 행태에 기가 막힌다.
과거 일본 육군 비행학교이자 '카미카제 특공대 양성 기지'였던 이곳에서 전쟁의 상흔을 전시하면서도, 동시에 전쟁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일본의 영광'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 다소 의아스럽기까지 했으니까. 더 가관인 건, 전시 처음부터 끝나는 곳까지 오로지 미군의 폭격으로 다치아라이는 피해를 봤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됐다는 것, 이 군인들의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희생이었다는 얘기로 미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1940년 칙령으로 설립된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는 소년 비행병들을 훈련시켰고, 1944년부터는 3000명 이상의 젊은 특별 간부 후보생들이 이곳에서 '카미카제(神風) 특공대(특별공격대, 즉 카미카제를 의미)'로 편성됐다.
이 중에는 '조선 출신'이라 또렷하게 적힌 비행사도 포함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1945년 3월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다치아라이 마을과 비행장은 폐허가 됐다.
결국 몇 달 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며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다.
▲  다치아라이 역사에 걸린 '평화의 비' 문구와 위치, 그리고 주변에 설치된 'T-33 제트연습기' ⓒ 김관식 ▲  상단 빨간 동그라미(항공기 제작소)가 당시 미군 B-29기의 폭격 목표였다.
가운데 하얀 네모의 '다치아라이(大刀洗)역'이 보인다.
그 아래 넓은 공터가 전투기 비행장. ⓒ 김관식 '피해자'로만 남은 일본... 반성 빠진 '평화' 후쿠오카현 하카타역에서 기야마역까지 가고시마본선 열차로 40분, 다시 다치아라이행 2량짜리 간이 전차를 타고 20여 분 달리면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에 닿는다.
내려서 도보로 5분 거리. 다치아라이역에서 내리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먼저는 '평화의 비'에 적힌 문구다.
내용을 살펴보니 '아마기철도 다치아라이역 주변에 위치한 육군비행학교, 제5항공교육대 등의 군사시설이 쇼와 20년(1945년) 3월 27일과 31일, 미군폭격기 B-29의 폭격으로 궤멸돼 많은 군인과 군속이 희생됐다'고 적혀 있다.
그것이 주요 메시지다.
다른 하나는 마치 그곳을 상징하듯 하늘 기둥에서 방문객들을 맞는 'T-33 제트연습기'다.
주변에 물어보니 다치아라이역 내 '레트로 스테이션 가게'에서 설치한 것으로, 항공자위대로부터 무상으로 대여 받았다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600엔을 내고 입장권을 샀다.
내부로 들어가기 직전, 그곳 직원이 내게 건넨 두 개의 안내서 중 하나엔 관장 이름으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왼쪽 검은색 배경에 적힌 글씨가 바로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 소개글에 나오는 관장의 메시지다.
ⓒ 김관식 '일찌기 이 땅에는 옛 육군이 동양 제일을 자랑한 다치아라이 비행장을 중심으로 일대군도가 존재해 역사적인 역할을 완수하며 크게 발전해 갔다.
그러나 1945년 3월, 미군의 대공습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받고, 민간인을 포함한 많은 소중한 생명이 상실됐다.
' 이 글을 보고 그 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
'옛 육군이 동양 제일을 자랑한' '역사적인 역할을 완수하며' '미군의 대공습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받고' '민간인을 포함한 소중한 생명 상실...'이라는 문구에서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왜 자국의 10대 청소년들이 왜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드러나지 않았고, 군국주의가 남긴 폐해에 대한 반성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일본 최고전쟁지휘부인 대본영(大本營)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문구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을 '피해자'로서만 묘사했다.
앞서 다치아라이역 입구에 놓인 '평화의 비' 문구를 보고 조금은 눈치 챘다.
이 글에서도 일본은 '쇼와 20년(1945년) 3월 27일과 31일, 미군폭격기 B-29의 폭격으로 궤멸돼 많은 군인과 군속이 희생됐다'라고만 적혀있지 않던가. 진정한 반성의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우연찮게도 이곳을 찾은 일본인 노인 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됐는데 "일본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용기 있게 싸웠다"고 손짓하며 "이걸 조종했던 사람들의 희생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는 이때, 특히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입장할 때 구입했던 <증언, 다치아라이 비행장>이라는 책자도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평화기념관이 세워진 마을인 치쿠젠마치(筑前町) 읍장인 '타카시라 키쿠미' 시가 쓴 '발간에 부쳐'라는 글을 봐도 '미국 전략 공군인 B-29의 두 번의 폭격으로 민간인을 포함한 600명에서 1000명에 가까운 분이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다.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날 평화와 번영이 있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이곳 평화기념관을 세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적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언급한 '희생'이라는 단어조차도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정작 이들이 누구 때문에 전쟁에서 희생됐는지, 주변 국가에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  태평양전쟁 당시 비행조종사 복장과 소년비행당 소년들이 훈련 받는 모습 ⓒ 김관식 ▲  97식 전투기(나카지마 Ki-27). 하카타 해역에서 건져올렸다고 한다.
ⓒ 김관식 기록조차 상세하지 않은 조선인 전사자의 흔적 1층 전시관 내부에 들어서자 당시 일본 육군이 제식으로 채용한 97식 전투기(나카지마 Ki-27)가 자리했다.
이 전투기는 일본 육군이 처음으로 갖게 된 단엽 전투기이자 전금속제 기체다.
중일 전쟁에 첫 등장해 1940년 전후 주력 전투기로 활용됐다.
이날 전시된 전투기는 하카타 인근 해역에서 인양했다고 한다.
▲  미쓰비시 A6M 제로센 ⓒ 김관식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 실물도 볼 수 있었다.
잘 알려진 제로센(ゼロ戦=零戰), 즉 '카미카제'다.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말레이해전, 필리핀 전역 등 태평양전쟁 초기 거의 대부분의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중전에서의 민첩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경량화에 집중한 대신 조종석에 방탄처리가 되지 않아 총탄에도 매우 취약했다.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제로센은 카미카제의 자살공격에 동원됐다.
이 제로센은 전후 일본인들에게 '국가 자존심 회복의 상징'으로 기억되곤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통해 이들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느꼈으며, 과연 반성은 있었는지 돌아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여러 유품과 전투기 비행복장, 다치아라이의 생활상을 둘러보며 '추억의 공간'이라 불리는 복도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카미카제 전사자의 사진과 생전이력을 살필 수 있는 복도 전시관이 나타났다.
혹시나 싶어 출신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샅샅이 찾았다.
그러다 결국 한 명의 조선인 전사자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부모와 형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과연 누군가는 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에 걸린 조선출신 카미카제(빨간 네모). 그는 후쿠오카현 치란에서 특공 출격해 오키나와 인근 해역에서 전사했다고 적혀 있다.
전사 당시 나이는 나와 있지 않다.
ⓒ 김관식 고 하동 번 님 (나이 없음) 소비(소년비행단) 제14기생(전투기 조종) 다치아라이(조선 출신) 특공(특별공격대, 즉 카미카제) 제106부대 비행 오장(하사 계급) 쇼와20년(1945년) 5월 4일 지란에서 특공출격, 오키나와 주변에서 전사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라는 책을 보면, 태평양전쟁 당시 카미카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인 청년은 총 19명이다.
이 가운데 17명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나와 있다.
특히 위 조선인도 이 제로센 비행기를 몰다 종전 직전, 오키나와에서 전사했다.
이들은 육군 소년비행병(소비) 10명, 육군 특별조종 견습사관(특조) 5명, 항공기 승무원 양성소 출신 3명, 육사 출신 1명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이 소비와 특조 출신으로, 일본 본토 청년들과 동일한 훈련을 받고 카미카제 임무에 투입됐던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한 <한겨레신문>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선 조선인 카미카제가 친일파로 간주돼 뒷전으로 밀려났던 인물들이었다.
신문은 "덕지덕지 친일파 딱지를 떼니,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단지 비행기가 좋아서,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 조종사가 되어, 남들의 전쟁에 휩쓸려 사라져간 '아무개 집 아들들'"이라고 했다.
참혹한 시대의 제물이 된 이들은 카미카제로 전사해 '친일파'로 불렸다.
그렇지만, 극한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대한민국 공군이 되어 '한국전쟁의 영웅'이나 '항공산업의 아버지'로 기억됐다.
그런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카미카제의 유산이 우리 국군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달의 전쟁영웅'과 '호국영웅'으로 선정됐던 공군 소속 군인 중 10명은 적의 공격에 비행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건 '자살공격'이었다.
'이러한 고귀한 희생 위에 현재의 평화와 번영이 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평화의 발신지로서 이곳은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내려 한다'는 이유로 세워진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 아무리 생각해도 카미카제와 평화는 공존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단어인데 이곳에서는 묘하게 섞였다.
▲  감적호(監的壕). 발사된 탄환의 착탄지점을 관측하기 위한 시설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의 비행훈련생들은 이곳에서 비행기의 사격훈련을 지켜봤다.
ⓒ 김관식 지금도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은 많은 일본인과 관광객이 찾는다.
특히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 차원에서 올 때가 많다고 하는데, 이날도 교복을 차려 입은 학생들이 줄을 지어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맞는 건, 태평양 전쟁 당시 전사한 젊은 군인들의 용기 있는 자세와 정신, 쓸쓸히 남겨진 유품과 흑백사진들 뿐이다.
한국인으로서 솔직히 이것을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2시간여를 둘러보고 기념관을 나섰을 때, 제국주의의 망령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들이 세운 이곳은 진정 평화를 위한 것일까. 전쟁으로 홀연히 사라져간 그들의 희생이 지금의 평화를 만들었을까? 적어도 나는 카미카제와 죄 없는 사람들의 떠밀린 죽은 억울한 혼령의 목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솔직한 감정이다.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 - 위치 : 2561-1 Takata, Chikuzen, Asakura District, Fukuoka 838-0814 일본 (구글맵 기준) - 홈페이지 : http://tachiarai-heiwa.jp * 관련 기사: "이 참혹함을 증언해야" 태평양전쟁에서 돌아온 한 일본군의 다짐 https://omn.kr/2ecgr 덧붙이는 글 |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과 오늘 날의 일본은 많이 다릅니다.
한국의 위상과 국방력도 마찬가지죠. 이럴 때일 수록 역사를 바로 보고, 후세에 제대로 전해야 양국이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은 그 누구의 영광도 아닙니다.
기억이 미화되어 진실이 가려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