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농촌에서 1년 살기] 가을쑥부터 풍성한 밤과 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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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산으로 둘러싸인 늦가을의 구례 분지는 안개가 가득 덮인 몽환적인 선경으로 아침을 연다.
섬진강과 서시천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온 들녘과 시가지를 점령해 시정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
사람이나 새들도 안개 속에 침잠해 활동을 늦추거나 움직임을 줄인다.
고요는 안개가 걷히는 늦은 아침까지 계속된다.
숙소 앞 텃밭에는 지난 9월 초에 이식하고 파종했던 무와 배추가 안개의 장막 너머로 낮은 자세로 만추를 건너고 있다.
주변 농경지에 심었던 고추와 고구마는 모두 수확을 마쳐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데, 무와 배추밭만 푸르게 꿋꿋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초봄에 입주해 이곳에서 어느덧 9개월째 살아오고 있다.
좁쌀처럼 초 단위로 째깍거리던 시간은 다시 분 단위로 뭉쳐져 시간을 만들고, 하루를 완성시킨다.
날짜로 치자면 250여 일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그 안에는 35개의 주일이 있었고, 세 계절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조그만 땅에서도 많은 것을 내어주는 자연 ▲  아침 안개에 덮인 숙소 앞 텃밭 ⓒ 임경욱 이곳으로 이주해 처음 온상에 심은 작물 중 방울토마토와 가지는 지금도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생명력이 왕성하다.
비트나 콜라비도 지난달 수확을 마무리해 아직 먹고 있다.
육묘장에서 얻어와 심은 '장형 식용박'은 혹부리영감의 혹처럼 생겼으며, 홍두깨 방망이처럼 길다.
무게는 5kg 정도에 길이도 평균 1m다.
어떻게 요리하는지 몰라 이웃들에게 나눠줬는데, 이웃들도 먹는 방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박나물과 박고지 등으로 먹을 수 있는 좋은 식재료로 유명했다.
다행히 박의 유용성을 잘 아는 이웃이 모두 수확해 요리 재료로 가공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텃밭에서 수확한 옥수수, 감자, 고구마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고도 많이 남아돌아 겨울 간식으로 비축해 두고 있다.
몸과 마음에 자연향을 선사해 줄 귀중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자연에서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자연은 조그만 땅에서 쉼 없이 내어준다.
인근 산야 어디를 가나 먹거리가 풍성하다.
가을 쑥, 고들빼기, 엉겅퀴 등 나물로 활용할 수 있는 식물들이 파릇파릇 생기가 돈다.
구례는 특히 밤과 감이 풍성하다.
농가는 물론이고, 논두렁 밭두렁에도 감나무 천지다.
제 열매의 무게가 힘겨울 정도로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늦가을의 서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인심이 후해 그것들을 수확하는 데 조금만 손을 보태면 보답으로 한 소쿠리를 싸준다.
▲  지난 9월 초에 파종하고 이식한 무, 배추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 임경욱 농촌 소멸? 대안은 없을까 '1년 살기' 기간이 끝나가니 입주민들은 또 다른 거처를 구하느라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벌써 관내나 외지에 살 곳을 구한 세대도 있고, 창업을 해 떠난 이들도 있다.
구례군청에서 빈 농가주택을 수리해 일정 비용을 받고 임대하는 '보금자리 주택'이 단연 인기다.
운이 좋아 상태가 좋은 물건을 만나면, 이곳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이들에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여러 형태로 도시민들을 유인하는 인구 유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연령을 제한하거나 주소지를 이전해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 보니 선택의 폭이 좁다.
인구 소멸 지역은 자꾸 늘어나고, 초고령 사회로 접어드는데도 이런 제약으로 진입을 막는 것이 안타깝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주 4.5일제를 시행하고, 직장인 60%가 주 4일제를 원한다는 통계도 있다.
5도2촌이 아니라 4도 3촌도 머지않았다는 의미다.
소멸해 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도시 외곽에 소규모로 주말 농장을 조성해 임대하는 독일의 '클라인 카르텔(Klein Karte)'은 도시민들의 여가와 휴식 공간이다.
러시아의 '다차(dacha)'는 시골에 있는 오두막과 텃밭으로, 도시민들이 주말이나 휴가철에 휴식을 즐기는 곳이다.
우리도 이들처럼 지자체별로 우리 문화와 정서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 도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도농이 상생할 수 있을 것이다.
▲  육묘장에서 얻어온 '장형 식용박'이 지칠 줄 모르고 열매를 키우고 있다.
ⓒ 임경욱 내 갈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연 속에서의 살이가 익숙해져 다시 도시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맞지 않다.
힘에 겨운 농사도 부담스럽다.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에서 나고, 여름은 고산 지대에서 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봄, 가을은 그 중간 어디 쯤이 좋겠다.
가을에 젖은 서시천 뚝방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낙엽과 열매와 씨앗들이 아스팔트 길 위에서 서성인다.
진심을 다해 살았을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보니, 괜한 죄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서시천에는 여전히 먹이 사냥에 몰두하고 있는 백로와 청둥오리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내고 있다.
둔치에 자연스럽게 우거진 억새와 갈대도 서로 얽혀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이들의 꿈은 오로지 무위자연일 것이다.
나도 그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구례의 마지막 계절, 인심 후한 땅에서 얻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