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기술관료적 태도가 어떻게 한국 보건의료 체계의 설계권을 시장에 넘기는가
11월 4일 국회에서 열린 '영리 플랫폼 중심 원격의료 법제화,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공공 원격의료 플랫폼을 구축하지 않은 것은 복지부의 직무유기"라고 비판하며, 그동안 수많은 디지털 보건의료 인프라 관련 정책들이 왜 복지부가 아니라 산업통상자원부 주도로 추진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참석한 복지부 담당자는 "복지부가 보건의료적인 측면에서 고민을 하는 부처"라고 말했다.
몇몇 보건복지위원회 국회의원들이 "모쪼록 긍정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난 뒤, 지난 정권 시절 토론 기회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었던 시민사회단체 발표자들이 현재의 집단적 위기 상황을 다급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행정부 측의 유일한 참석자로서 들어야 했던 보건복지부 담당자를 향해 시선이 모이던 순간, 그가 내놓은 답변은 일견 겸손하거나 쿨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말한 "의료적인 것"은 무엇을 가리키며, 또 어디까지를 포함하고 어디서부터를 배제하는 것일까? 보건복지부가 하나의 집단의식 속에서 상상하는 자신들의 임무의 범위,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한다고 믿는 행정의 지형과 작동 원리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아마 그들의 세계관에서 '원격의료' - 그것이 '비대면진료'이든 '언택트 헬스'이든 - 는 단순히 효율성과 편의성을 지닌 기술로 간주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기술의 도입 자체를 정책적으로 추진할 수는 있지만, 그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게 될 의료시스템 전체를 재설계하거나 조정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그들의 정의에서 이미 "의료적인 것"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 같은 관점에선 의료란 기술적 행위에 불과하다.
의사와 환자가 어떤 플랫폼을 통해 연결되든, 그 연결이 '의료적'으로 기능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플랫폼의 소유 구조, 자본의 흐름, 환자의 배제와 데이터 윤리 문제는 모두 '비의료적'이므로 관할 밖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보건행정의 현실이다.
▲ 정형준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발표 내용
출처: 김선민TV (https://www.youtube.com/watch?v=vDqKnLVMfg4)
ⓒ 김선민
보건행정의 구조적 맹목 - 관리만 있고 설계는 없는 시스템
그의 발언은 행정의 구조적 관성을 반영한다고 본다.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오랫동안 의료를 '관리'하는 부처였지, 시스템을 '설계'하는 부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의료 공급의 주체는 민간 병원과 개원의였다.
국가는 이들을 '관리·감독'하는 위치에 머물렀다.
건강보험 제도를 통해 진료비를 조정하고, 의료수가를 협상하고, 인허가를 담당하지만, 의료시스템 자체를 공공 인프라로 설계하거나 사회적 가치를 조율하는 역할은 사실상 비워 두었다.
그 결과 행정은 늘 사후적이다.
문제는 발생하면 대응하고, 새로운 기술은 시장이 먼저 만들면 나중에 허가하는 방식이다.
이런 행정 문화 속에서 '비의료적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읽힐 수 있는 태도는 단순한 직무 회피가 아니라, 조직의 학습된 습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의료의 주체인 의사들은 대부분 민간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정부가 의료서비스의 구조를 설계하거나 조정할 여지가 거의 없다.
한국의 의료체계는 근본적으로 시장경제 구조 위에 세워진 산업이며, 공공의료는 예외적이다.
따라서 보건복지부가 "보건의료적인 측면에서 고민을 하는 부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행정 철학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의 진술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제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 정형준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발표 내용
출처: 김선민TV (https://www.youtube.com/watch?v=vDqKnLVMfg4)
ⓒ 김선민
'투자자 사회'와 중립의 자기기만
지금 한국 사회는 명백히 '투자자 사회(Investor Society)'다.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민주주의적 판단이나 윤리적 책임보다 투자 포트폴리오상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들은 주식 앱으로 기업의 주가를 지켜보며, 사회문제, 정책, 그 어떤 문제든 - 심지어 국제적 전쟁범죄까지 - '투자 리스크'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 같은 사회에서 복지부 측 담당자가 "우리는 (여러분이 걱정하다시피) 기업의 수익성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순진함이자, 사실상 공모에 가깝다고 본다.
시민단체들이 이미 지적했듯, 이윤을 목적으로 한 원격의료 플랫폼들은 그동안 벤처캐피털의 전례 없는 관대한 투자를 받으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단순한 의료 중개 서비스가 아니라, 의료 데이터의 소유자이자 인공지능 기업의 협력 파트너가 되었고, 이제 의료시스템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토론회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이런 기사가 등장했다.
제도적 공백을 이용한 디지털헬스의 노골적인 시장 전략
11월 5일자 모 언론 보도에 한 디지털치료기기 기업 대표의 인터뷰가 인용됐다.
"우리는 비대면진료 플랫폼을 기반으로 DTx 처방 생태계를 확장하겠다.
" 그의 발언은 단순한 사업 계획이 아니라, 공공의료 부재가 만들어낸 구조적 허점을 노린 시장 전략이었다.
이는 언뜻 '혁신'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책임을 회피한 의료영역 침투 전략에 가깝다고 본다.
의료인과 환자의 대면 판단 과정을 우회해, 규제와 임상 검증의 장벽을 최소화하고, 제품을 손쉽게 시장에 확산시키기 위한 구조다.
제도권 의료의 신뢰성과 공공성에 기대면서도, 그 제도가 지켜온 안전장치는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정신건강과 행동의학 영역은 치료적 개입의 윤리성이 가장 엄격히 요구되는 분야다.
그러나 디지털헬스 기업에게 원격의료 플랫폼은 기회로 주어진 제품의 '확산 경로'이며 치료와 관리의 윤리적 기준을 시장 논리로 대체할 뒷문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사회적·심리적으로 취약한 이들일 것이다.
복지부가 이를 방관하는 한, 시장은 공공의 책임을 흉내 내며 의료를 재편할 것이다.
'의료적인 것이 아니므로 관할 밖'이라는 말은, 사실상 윤리적 책임의 포기 선언이다.
▲ 호주 NEDC의 섭식장애 단계별 치료체계(Stepped System of Care)
호주의 섭식장애 국가협력기구 NEDC(National Eating Disorders Collaboration)가 제시한 단계별 치료체계 도식이다.
예방, 조기발견, 초기대응, 치료, 회복지원의 전 과정에서 당사자, 가족,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공공·민간 의료기관, 지역보건서비스, 학교, 복지·심리지원 등이 연계되어 하나의 연속적 치료·돌봄 시스템을 구성한다.
ⓒ NEDC
섬마을 의사 일화와 시혜적 상상력
토론에서 복지부 관계자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20년 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외딴섬 출장 중 저녁을 함께 하려던 의사가 식사 내내 전화를 끊지 못했다.
노인 환자들의 자녀들이 계속 전화를 걸어 진료받고 돌아오신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정확한 지침이 맞는지 확인하고 안심을 구하더라. 의사와 환자 혹은 보호자의 소통 - 즉, '원격의료' - 을 왜 막아야 하나?'
이제 그 섬마을의 의사와 주민들 사이의 일대일 소통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스케일업'하기 위해 기술이 투입된다.
시혜적 사명(社命)을 내세운 한 기술 스타트업이 정부사업으로 선정되어, '-해요체'로 통일된 UI를 갖춘 새로운 전화 진료 서비스를 만든다.
그러나 결국 실질적 수익을 내거나 투자를 유치하거나, 곧 기업공개를 해야 하는 이 회사는 상황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제품을 직접 구매해 섬마을 주민들과 의사에게 바우처 형태로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 안에 외부 영리 광고가 삽입되고, 알고리즘을 통한 주의력과 행동 유도가 슬그머니 시작된다.
대략 1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실리콘밸리 마인드셋은 구조에 대한 책임감 없이 "자, 이제 세계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풀어보자"고 팔짱 낀 채 나서는, 묘한 권력강화(empowering) 방식의 젊은 문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열정과 자신감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그들이 손에 넣은 최신 기술이 언제나 사전적 해결책이고 이로써 해결할 문제를 오히려 나중에 찾는 통례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택하는 문제의 대상은 언제나 '불쌍한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다.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나 제도적 조율, 전달 구조, 이해관계자 간의 협력 같은 문제는 스타트업의 일, 기업가 정신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품의 리텐션이고, 가능하다면 정부가 그 제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대신 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제 토론회에서 보건복지부의 사고방식이 실리콘밸리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놀랍게도 둘 다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조정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채, 독립적 '선의의 행위자'로서의 자신만을 상정한다.
관료는 행정을, 스타트업은 기술을 믿지만, 둘 다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가 무엇을 조율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영역이 동일한 상상력의 결핍, 즉 시스템 부재의 사유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년 전 그 섬마을에서의 에피소드가 가령 호주에서, 가령 섭식장애 국가전략기관인 NEDC(National Eating Disorders Collaboration)에서 파악됐다면, 문제는 처음부터 전혀 다른 식으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어떤 구조적 결핍이 한 의사에게 지역 전체의 돌봄을 떠맡게 만들었는지, 그 공백을 메우는 제도적 장치나 네트워크가 왜 존재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 그들의 출발점이다.
호주의 국가 수준 섭식장애 치료 및 돌봄 전략을 그 큰 땅덩어리 전역에 걸쳐 체계적이고 면밀히 펼쳐나가기 위해 지난 2009년 설립된 NEDC가 보여주는 차이는 '전달(delivery)'의 진정성에 있다.
그들은 '호주 섭식장애 10년 전략(National Eating Disorders Strategy 2023-2033)' 같은 정책 문서만 만들고 마는 조직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현장과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고 조율하는 조직이다.
NEDC의 대표 사라 트로브(Sarah Trobe)는 호주의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의사, 심리학자, 간호사, 보건교사, 영양사 등 섭식장애 치료에 연루된 모든 전문가들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그 대화는 일회성 대화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언어를 세심히 조정하는 실무적 대화다.
NEDC는 공개 세미나, 워크숍, 온라인 토크 등을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만든다.
한국에 사는 나처럼 그들의 목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조차 자유롭게 무료로 참여 신청해 함께 들을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다.
그들의 운영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실제로 전달하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지금 사용되는 의료 기술을 더 최신 기술로 업데이트하고 전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과거와 똑같이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사실상 현재 호주에서는 또 다른 층위에서, 전혀 다른 수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2025년 11월 호주 보험계리사협회(Actuaries Institute)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정신건강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나 복지의 영역으로 보지 않고, 보험·의료·노동시장 전체를 관통하는 금융·제도 시스템의 문제로 규정한다.
메디케어, 민간보험, 고용복지 제도 사이의 단절을 '파편화된 시스템'으로 진단하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재정·보험 모델을 제시한다.
즉, 정신건강을 '치료받을 권리'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재정과 사회 지속가능성의 핵심 인프라로 다루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논의가 거의 상상되지 않는다.
정신건강 정책은 여전히 도덕적·정서적 담론의 차원에 머물며, 제도 설계나 재정 구조의 문제로는 접근되지 않는다.
호주에서 보험계리사들이 정신건강 재정체계의 구조와 지속가능성을 논의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여전히 '정신건강 인식 개선 캠페인' -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뇌 질환이에요",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면 회복될 수 있어요", "정신질환자를 무조건 범죄자로 보지 마세요" 등등 - 이 정책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정책 격차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를 어느 수준에서 인식하고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구조적 간극이다.
▲ 호주 권고안 요약
호주는 정신건강을 개인 문제가 아닌 재정·보험 시스템의 설계 과제로 다루며, 정부·민간보험·노동복지 제도를 통합해 정신건강 재정 안전망을 구축하는 단계별 로드맵을 제시했다.
출처: https://www.actuaries.asn.au/the-mental-health-financial-safety-net-unifying-australia-s-fragmented-systems
ⓒ Actuaries Institute
울음의 언어와 예언의 윤리
지난 정권에서는 공식 논의에 참여할 권리조차 지킬 수 없었지만 이제 뒤늦게나마 정부의 원격의료 정책(혹은 그 부재)에 대해 다급히 조언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모습을 유튜브로 지켜보고, 그러나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서 우리는 스스로 구축한 국회 협력 네트워크 속에서도 정작 국감 자리에는 어느 정신과 교수를 대신 내보내야 했던 상황을 떠올리면서, 나는 특히 경험 당사자의 목소리가 '불필요하게 감정적이다', '비합리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중요한 논의에서 배제되는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당사자의 목소리는 왜 우는 소리처럼 들릴까?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울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붕괴한 시스템에서 생존해 나온 사람들이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실패하며 그 실패가 어떤 비참을 일으키는지를 직접 경험했다.
그들이 우는 까닭은 공적 자리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먼저 경험한 피하고 싶은 미래를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언이 흔들리고 단호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 경험에서 비롯된 실증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가지 말라"고 말할 때, 그들은 이미 그 길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의 언어는 감상이 아니라 조기 경보 시스템이다.
그러나 행정과 기술관료제는 이런 경고를 괄시한다.
이것이 행정의 감정 빈곤이며, 민주주의의 청력 상실이다.
문제의 조기 징후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식이 제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무시된다면, 정책은 결국 예측 가능한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토론의 마지막에 녹색병원 정형준 선생님은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간 수없이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있었는데 결국 다 놓쳤다는 측면에서 그런 감정이 올라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유튜브 생중계를 멀리서 시청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공포였다.
이제 남은 것은 기록과 책임이다.
앞으로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방기하고 외면한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호명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더 이상 "예언의 목소리"로만 머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다.
보건복지부가 중립을 말할 때, 시장은 제도를 대신 설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