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혜윤 작가 신간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고
정혜윤 작가의 신간 <책을 덮고 삶을 열다> (2025년 10월 출간)를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책과 삶이 결국 하나였다는 듯한 묘한 감각에 잠겼다.
무한한 우주를 닮은 책 표지처럼 책 속에서 확장된 세계는 어둠과 빛의 공존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은 단순한 삶 곁에 놓인 소품이 아니었다.
이 책은 책을 품에 안아 들고 살아온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시 빚어냈는지에 대한 궤적이기도 했다.
삶과 예술을 향한 작가의 사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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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녹스
작가는 일본 시인의 글을 빌려 우리 삶을 새롭게 정교화 한다.
인간은 반복되는 형벌과도 같은 삶의 굴레 속에서도 마침내 '다르게 사는 방식'을 배운다는 것이다.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이라 할지라도, 정작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건 "기쁨"이다.
바위가 구르며 다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휴식"을 하고, 천천히 내려오는 동안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잠시지만 깊은"위로"를 얻는다.
고통과 희망, 고난과 숨결이 함께 존재하는 순간, 그 행위는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작가가 책 속에 인용한 글들은, 삶의 진실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내 삶의 작고 큰 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는 빛이었다.
이 책에는 예술에 대한 작가의 사유도 정교하게 펼쳐진다.
르귄은 예술을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고, 보르헤스는 예술을 "사람의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카뮈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더욱 감탄스럽고 풍요롭게 만든다"라고 믿었으며, 타르코프스키는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정혜윤은 이 거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을 "사랑하는 것을 재료로 삶을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 모든 문장은 다 보석처럼 빛났다.
예술이란 결국 더 나은 삶을 향해 사람을 옮겨가는 힘.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고통을 기억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엮어내는 과정. 그 자체로 예술에 대한 충실한 정의이자 나아갈 삶의 방향이다.
책에서 작가가 인용하는 문장들은 곧 그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며, 타자와 공명하는 도구다.
그에게 책은 곧 사람이고, 여행이며, 살아 있는 관계의 언어다.
정혜윤이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이유도, 인간이 곧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한 사람의 절규에도 귀 기울이고, 사회적 불의와 아픔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그의 경험들은 모두 그의 삶의 연장선에 있다.
그의 글은 문학적 사유와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는지 증명하는 한 증거다.
책에서는 모비딕의 멜빌 선장부터 버지니아 울프까지 문학과 사유까지 방대하게 인용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참을 만한 절망의 반복과,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웃음 짓는 순간들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진실을 발견한다.
이 말을 곱씹는 순간, 우리의 일상 속에도 문학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의 무게는 종종 반복되는 실패와 재개의 순환 구조에 머물러 있지만, 동시에 이어 붙인 문장 하나가 지금 여기를 환히 비춰주기도 한다.
정혜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 달라는 외침 뿐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우리가 귀환한 곳, 출발한 곳, 그리운 얼굴들이다.
"
이 문장들은 곧 이 책의 방향을 보여준다.
정혜윤이 말하는 삶은 문장 속에서 삶을 재발견하는 방식이며, 예술과 책을 통해 현실에 마주 선 자기 자신을 조심스레 새롭게 조정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무대 위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풍경임을 말한다.
예술의 본질과 삶의 방향을 묻는 책 속 문장 몇 개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개인의 서사에서 공동의 경험으로
정혜윤 작가는 전작 <삶의 발명>에서 자신이 겪어온 상처와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깊게 생각하며, 삶의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공허함과 다시 살아내고 싶은 의지를 엮어 낸 책이었다.
상실의 뿌리 전체를 뒤집어 보고, 그 위에 삶을 다시 짓는 여정. 그 책은 영혼의 고백이자 일기처럼 쓰였고, '나'의 골격을 회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책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는 그 발명된 삶을 확장해 보는 단계에 접어든 듯하다.
혼자였던 자리가 이제는 다양한 작가들의 문장과 공명하는 자리로 변모한다.
타인의 이야기는 수용을 통해 자기 삶으로 흘러들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삶의 발명> 이 자신의 구조를 '복원하기 위한 책'이었다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는 '다른 구조에 연대하고 연결하려는 확장의 책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타자와 함께 삶을 짓는 방식에'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핵심은 다르면서도 이어진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독서란 그저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누군가의 문장을 빌려 나 역시 내 삶의 결을 완성해 나간다는 것. 나아가, 책은 내가 아닌 타인의 삶과 연결되기 위한 쉽고도 진실한 다리라는 것.
오늘, 우리는 다시 책을 덮고 살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으로 발명된 마음이 있다면, 한 줄의 문장으로 고침 받는 삶이 있다면, 무너져가는 세상을 다시 붙들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렇다.
오늘도 우리는 책을 덮고, 다시 삶을 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삶을 연결하는 다리, 보석 같은 문장을 찾아서